교과서 속 진화론 삭제, 무엇을 노리나

허은선 기자 2012. 6. 1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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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5일, 교육과학기술부에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를 바꿔달라는 청원서가 접수됐다.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 종이 아니므로 일선 교과서에서 삭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청원인은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교진추)'였다.

교진추는 올해 4월에도 교과서를 바꿔달라는 청원서를 냈다. 이번에는 화석 기록으로는 말(馬)의 진화를 증명할 수 없으므로 이를 교과서에서 삭제해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교진추는 이 청원서를 통해 "말의 몸집이 커지고 발굽의 수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라는 주장은 진화론자들 사이에서도 비판받는 가설이므로 학생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흥구 5월22일 교진추 직원들이 과학 교과서에 실린 진화론을 비판하고 있다.

출판사 6곳 시조새 삭제·수정 방침

교진추의 청원 내용은 과학 교과서를 펴내는 출판사 7곳에 전달됐다(현재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는 국정 교과서가 아니라 인정 교과서다). 출판사는 교과서 저자에게 이를 전달했다. 교진추의 청원 내용을 검토한 A교과서의 저자는 "'시조새도 출현했는데, 이 생물은 파충류가 조류로 진화해가는 중간 단계의 생물로 여겨진다'는 교과서 기술 방식에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수정을 원할 경우 '시조새도 출현했는데, 화석 연구를 통해 이 생물은 파충류와 조류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정도로 수정할 수 있다"라는 의견을 출판사에 전달했다. 검토에는 1주일가량이 걸렸다.

시조새 관련 내용을 아예 삭제하기로 결정한 B출판사의 담당자는 "진화 파트를 담당했던 필자 한 명과 논의한 결과, 분명한 오류가 아니긴 하지만 자꾸 그분들이 태클을 거니까 삭제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진화 관련 내용을 삭제 혹은 수정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밝힌 출판사는 각각 6곳(시조새), 3곳(말)이다.

최근 교과부 수학교육정책팀은 위와 같은 출판사의 의견을 종합한 답변 자료를 교진추에 보냈다. 교과부 수학교육정책팀 관계자는 "국민신문고로 민원이 들어오면 7일 이내로 처리해야 한다. 이번 민원은 국정 교과서가 아닌 인정 교과서에 대해 제기된 내용이라 교과부에 권한이 없어서 집필진의 의견을 전달해줬다"라고 말했다. 교진추는 이번 결과에 100% 만족하지 않는다며 앞으로도 계속 교과서 개정 청원을 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는 6~7월에는 '화학적 진화는 생명의 기원과 무관하다'는 청원을, 9월에는 '생물계통수가 허구이다'라는 청원을 낼 계획이다.

ⓒ김흥구 시조새 관련 내용이 실린 종교 신문 기사와 교진추가 교과부에 전달한 청원서.

그렇다면 교진추가 이러한 활동을 벌이는 목적은 무엇일까. 교진추는 대외적으로 '진화론의 오류와 과학 발전에 따른 최신 이론 등을 학계와 교육계에 알림으로써 건전한 과학 발전 및 학술 진흥에 이바지한다'고 설립 취지를 밝히고 있다. 교진추 이광원 대표는 "회원 전부 개신교 신자이긴 하지만 우리는 분명한 학술 단체이다. 창조론을 교과서에 넣자고 주장하는 '창조과학회'의 산하 단체로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라고 말했다(45쪽 상자 기사 참조).

이러한 해명에도 교진추를 순수한 학술 단체 혹은 교육운동 단체로 보는 시각은 여전히 드물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장대익 교수는 "교진추는 명백한 종교 단체이다. 미국에도 이미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을 주장하는 단체들이 종교적 색채를 탈색하려다 실패한 사례가 있다"라고 말했다.

교진추가 개신교 모임인 증거

실제 교진추가 창조론을 믿는 개신교도의 모임이라는 증거는 많다. 이광원 대표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 출신으로 창조과학회 사무처장을 지냈다. 서울의 한 과학고등학교에서 생물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진화론을 가르칠 때마다 '선생님은 창조론이 더 신빙성이 간다'는 의견을 덧붙이고, 학생들에게 진화론에 대한 토론을 시켰다. 이 대표에 따르면 당시 학생들은 일제히 '진화는 사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교진추가 제출한 교과서 개정 청원서에 교수 대표로 서명한 윤의수 교수는 이미 10년 전 창조론 교과서 편찬을 시도했던 인물이다. 전공은 진화생물학과 무관한 식물세포학으로, 소속 대학인 공주대에서 < 성경과 과학 > 이라는 과목을 강의했다. 창조과학회 홈페이지에서 '교과서위원회' 메뉴를 클릭하면 교진추 홈페이지로 연결된다. 실제로는 교진추가 창조과학회의 산하 단체가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그러나 창조과학회 직원은 "창조과학회가 (직접) 교과서를 이야기하면 과학이 아니라 기독교 대변인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분리된 인원들이 있다"라고 해명했다.

창조론을 비꼬는 의미로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을 숭배하는 패러디 종교도 생겨났다.

이들에 따르면, 교진추의 최종 목적은 진화론을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것이다. 교진추 이광원 대표는 "진화론의 본래 성격은 유물론이다. 사람의 정신도 물질 현상이라고 보는 진화론을 가르치면 학생들에게 잘못된 세계관이 형성된다. 물질은 순환하기 때문에 생명을 죽여도 죄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낙태나 이기주의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교진추 연구소 김오현 소장은 "과학 교과서 백그라운드가 시작부터 잘못됐다. '우주의 진화' 단원으로 시작해 한 학기 동안 '진화'만 가르친다. 인력과 시간적 여유만 있었다면 우주에 관한 부분도 개정을 요구했을 텐데 (시간이 없어서) 먼저 생물학적 부분을 (청원)했다"라고 말했다. 교진추 백현주 총무는 "기원에 관한 문제는 과학이 아닌 철학이나 종교 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교진추는 나아가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라 신념일 뿐이며 진화론자들 간에도 다양한 주장이 대립하는 '가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교진추 백현주 총무는 "당시로 돌아가서 증명하거나 실험할 수 없는, 즉 주장할 수밖에 없는 신념의 문제에 해당하는 기원론을 과학 시간에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이제껏 과학계는 이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아왔다. 이들을 '링 안에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창조론자들의 '꼼수'에 휘말리는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서울대 수의학과 우희종 교수는 "창조론자들이 BBK나 광우병 논란처럼 찬반 여지가 있는 동일 선상의 대결 구도로 창조론을 끌어올리려 한다. 이렇게 되면 일반인들은 사실과 거짓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진화론 교육을 둘러싼 논쟁을 다룬 영화의 포스터.

그러나 교과서에서 진화론 관련 내용 일부가 삭제될 위기에 처하면서 과학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과학자 일부는 현행 교과서의 허점을 교진추가 또다시 파고들 수 없도록 낡은 교과서 내용을 개정하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나아가 이들은 창조론 대 진화론을 신념 대 신념의 싸움인 양 포장하는 창조론자들의 주장이 허위라고 못 박는다.

서울대 장대익 교수도 "너도나도 신념이라며 '물귀신' 작전을 펴는데 진화론은 명백히 엄청난 경험적 자료를 축적한 입증된 이론이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장 교수는 교진추가 교과부에 제출한 청원서를 '학술적·지적 사기' '왜곡의 종결자'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진화론자들이 발표한 연구 결과를 마치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이 발표한 자료인 양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청원서는 진화생물학의 대가인 스티브 제이 굴드 교수도 마치 진화론을 부정한 인물처럼 인용했다.

국내 최초의 진화심리학 박사인 경희대 전중환 교수는 교진추가 '이론'의 의미를 혼동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삼성 라이온즈가 올해도 우승할 것 같아!'라는 개인의 추측·생각을 이론이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학에서 의미하는 이론이란, 수많은 증거에 의해 지지되며 더 완벽한 이론이 나오기까지 사실로 인정받는 지식의 체계를 말한다"라는 전 교수는 교진추의 경우 진화론이 전자라고 주장하지만 진화론은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고 잘라 말했다. "과학 이론은 증거에 입각한다. 진화는 이론인 동시에 역사적 사실이다"라는 것이다.

허은선 기자 / alle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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