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주목하는 프랑스의 '좌회전'

이종태 기자 2012. 5. 24. 10:3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미테랑 이후 17년 만에 좌파 대통령에 오른 프랑수아 올랑드는 지난 1월 중순 대중연설에서 '불구대천의 적'에 대한 투쟁 의지를 불태운 바 있다. 올랑드에 따르면, 그의 적은 "이름도 얼굴도 당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선거에 출마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적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렇게 변죽을 울린 다음 올랑드는 적의 정체를 밝힌다. "나의 진정한 적은 '금융의 세계'이다." 올랑드가 '금융의 세계'라는, 프랑스인다운 세련된 수사로 가리킨 것은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이다.

"나의 진정한 적은 '금융의 세계'"

금융자본주의는 금융 부문이 주인이고 실물경제(생산, 고용 등)는 노예인 형태의 자본주의를 말한다. '금융 부문이 수익을 올릴 수 있는가' 여부를 중심으로 경제·사회 제도들이 창출·유지된다. 이 시스템하에서 기업은 주주(금융 투자자)가 단기간에 최대의 금융수익(주식매매 차익, 배당금 등)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경영된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단기적으로 수익을 내기 힘든 장기 투자나 혁신, 고용안정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서는 기업뿐 아니라 금리·환율·재정 같은 국가의 거시경제 정책마저 '금융 수익'을 중심으로 설계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 역시 회원국인 유럽연합(EU)이다.

ⓒAP Photo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당선자는 "나의 진정한 적은 '금융의 세계'이다"라고 말했다.

27개 회원국을 거느린 EU는 금융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었다. 조약을 통해 '자본이동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어떤 회원국도 자국 내의 자본이 국경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이렇게 돈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각 회원국은 자본 유치를 위해 '바닥으로의 경쟁'에 뛰어들게 된다. 노동자를 쉽게 채용하고 해고할 수 있도록 노동법을 고치고 세율을 내리며 복지재정도 삭감한다.

그 유명한 EU의 재정준칙(회원국의 연간 재정적자는 GDP의 3%, '누적 공공부채'는 GDP의 60% 이하로 유지) 역시 금융자본주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지금 그리스, 스페인 등 '위기 국가'들이 정부지출을 무리하게 삭감해 불황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은 내년까지 재정적자를 GDP의 3%로 낮추라는 EU의 압박 때문이다. EU가 이토록 재정적자를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지출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에게 가장 두려운 사태가 바로 인플레이션이다. 앉아서 손해를 보게 된다. 물가가 오른다는 것은, 이미 투자해둔 금융자산(주식, 채권 등)의 가치가 내린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의 핵심 목표가 '물가안정'(인플레이션율 2% 이하)인 것도 같은 이유다. EU는 'ECB의 독립성'을 철저히 보장하고 있다. 여차하면 회원국 정부가 나라살림 어렵다고 ECB에 유로화를 더 발행해서 경제를 살리라고 압력을 넣고 이에 따라 물가가 오를 수 있다. 이처럼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물가안정이 중요하다. 올랑드가 언급한 '금융의 세계'에서는, 재정긴축으로 경제성장이 지체된 나라보다 정부 돈을 풀어 고용과 생산을 늘리는 나라들이야말로 '불량 국가'이고 '악의 축'인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유발해서 금융 투자자들의 이익을 해치기 때문이다.

ⓒAP Photo 독일 메르켈 총리는 올랑드 당선 직후 긴축정책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맞받았다.

EU는 이런 금융자본주의 교리를 회원국에게 강제하는 초국적 기구다. 특히 유로존 회원국은 유로화만 사용하는 만큼 통화정책은 원천적으로 시행할 수 없다. 재정정책도 '재정준칙'의 규제를 받는다. 이 밖에 노동, 세금제도, 복지, 산업정책 같은 부문도 EU 차원의 조약이나 가이드라인에 따라 제한된다. 한마디로 주권국이 아니다. 이런 질서를 유지하면서 최근에는 긴축정책의 선봉에 섰던 EU의 양대 축이 바로 독일(메르켈 총리)과 프랑스(사르코지 대통령)다. 그런데 독-프 동맹이 올랑드의 당선으로 무너지고 있다. 올랑드는 지난 1월의 한 국제회의에서 "경제위기는 신자유주의와 규제되지 않는 금융 시스템 때문이다"라며 EU의 구조 개혁을 주장한 바 있다.

올랑드는 재정긴축보다 경제성장이 더 중요하다고 공공연히 선언해왔다. "EU 회원국들에게 긴축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다. 유럽인들에게 성장·일자리·번영·미래를 선물하자." 재정적자를 감수하더라도 정부지출을 늘려 경기를 부양하자는 소리다.

올랑드는 부자 증세를 공약했다. 연 100만 유로(약 15억원) 이상 소득자에게 최고 75%까지 소득세율을 적용하자는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소득세율은 7만 유로 이상 소득자들에게 최고 41%다. 실제로는 최상류계층 1%가 총소득의 18.3%, 0.1%는 17% 정도를 세금으로 낸다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올랑드의 75% 소득세율은 매우 급진적이고 상징적이다. 유럽통합이 본격화된 1980년대 초 이후 유럽에서는 '부자가 세금을 적게 내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신념이 공리처럼 간주되어 부자 감세만 일관되게 추진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올랑드는 교사 6만명 충원 등 공공부문 투자로 일자리를 늘리고, 노동권을 보호하며 최저임금을 인상하겠다고 공약했다.

전체 EU 차원의 공약도 많다. 먼저 올랑드는 '신재정 협약'의 재협상을 주장하고 있다. '신재정 협약'의 핵심은 '재정준칙'을 어기는 나라에 실질적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재정적자가 GDP의 3%를 넘기는 나라의 경우에도 제재할 수 있는 국제법적 근거가 없었다. 더욱이 EU 경제가 위기 국면에서 빠져나오는 경우 재정적자를 GDP의 0.5% 이하로 제한하겠다는, 매우 과격한 조항도 들어가 있다. 지금까지 EU는 경제위기에 대한 처방 차원에서 재정긴축을 제시했다. 그러나 '신재정 협약'은 긴축을 일상적인 경제질서로 못박고 그만큼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이 협약은 유로존 17개국 가운데 12개국 의회에서 비준되면 내년 1월부터 발효되는데, 현재 포르투갈 정도만 비준한 상태다. 올랑드가 '신재정 협약'의 재협상을 통해 '성장 조항'을 신설하자는 것은 결국 EU가 추진해온 긴축 흐름을 뒤집자는 것이다.

ⓒReuter=Newsis 그리스 북부 도시 테살로니키에서 5월2일 보수당인 신민주당의 지지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신민주당은 최근 총선에서 패했다.

지난 3월 중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럽의 르네상스'(유럽 사회주의자 집회)에서는 "EU가 프랑스나 독일의 소유물이 아니다"라며 EU의 지배구조를 바꾸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또한 올랑드는 금융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무너지고 있는 공공 서비스를 보호하기 위해 EU에 '공공 서비스 보호를 위한 지침' 제정을 요구하고 ECB 역시 '물가안정' 일변도에서 벗어나 성장과 고용에 유리한 통화정책 쪽으로 운영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재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약속했다. 발언만 보면 올랑드는 EU와 전 지구적 금융자본주의 체제라는 대세에 엄청난 타격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6일 당선이 확정된 직후 바스티유 감옥 앞에서 가진 경축행사에서 올랑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승리는 유럽의 모든 시민들에게 '변화가 임박했다'는 것을 알리는 메시지이다. 부서지고 황폐화되어 분열된 프랑스를 수리하고 바로잡고 재통합할 것이다. 긴축정책의 종식을 바라는 유럽의 모든 시민들에게도 희망을 배달하겠다."

메르켈과 EU의 반격

그러나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려운 법. 유럽의 진보를 위한 올랑드의 꿈은 실천될 수 있을까. 올랑드는 일단 유럽 정치의 최근 흐름에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최근 EU에서는 독일·프랑스 정부와 EU의 재정긴축 정책에 대한 저항이 급속히 강화되고 있다. 지난 4월 네덜란드는 신재정 협약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려다 실패해 내각이 총사퇴했다.

프랑스와 같은 날 총선을 치른 그리스에서는 긴축을 받아들인 거대 좌우 양당이 심판받았다. 우파 신민주당은 18.9%, 사회당은 13.2%를 득표하는 데 그친 것이다. 대신 정치적으로 사회당보다 왼쪽인 '급진좌파동맹'(SYRIZA)의 지지율이 3배나 뛰어오르면서 16.8% 득표로 제2당 지위를 차지했다. 급진좌파동맹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대표는 '루스벨트 스타일의 뉴딜'과 '구제금융 조건 재협상'을 요구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재정긴축의 본거지인 독일에서도 지난 5월6일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주 지방선거에서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민-자민당 연정이 패배했다. 영국 보수당도 5월3일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EU의 경제위기 처방(긴축)에 대해 유럽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인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 이전부터 '올랑드가 대통령이 되는 경우 유로존의 경제 정책이 진보 성향으로 돌아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증폭되어 왔다.

ⓒAP Photo 3월2일 브뤼셀에서 EU 정상들이 모여 유럽연합 정상 회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회의적인 의견도 많다. 올랑드가 '꿈'을 이루려면 독일의 메르켈 총리부터 설득해야 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메르켈은 굉장히 완고하다. 그녀는 올랑드 당선 직후 연설에서, 신재정 협약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견고한 금융제도와 성장이 함께 가야 유럽이 진보할 수 있다"라고도 말했다. 심지어 메르켈의 정치적 동지인 볼커 카우더 기민당 의원은 "독일은 프랑스의 선거 공약에 돈을 대주기 위해 있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냉소했다.

그런데 메르켈이 말하는 성장의 의미는 올랑드의 성장과 많이 다르다. 경제성장의 방법론으로 올랑드가 정부지출 증가 혹은 회복을 강조한다면 메르켈은 재정긴축 강화와 함께 경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메르켈식 구조개혁의 핵심은 노동시장 유연화다. 채용과 해고를 더욱 쉽게 하고 실질임금을 낮춰 자본의 수익성을 올리면 고용과 생산이 회복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이는 '독일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수년 동안 독일 수출산업 성장의 비밀은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해 가격 경쟁력을 높인 데 있었다.

EU와 ECB도 올랑드의 성장 드라이브에 맞불을 놓고 있다.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은 최근 유럽 경제의 성장을 위해 신재정 협약과 더불어 별도의 '성장 협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ECB 마리오 드라기 총재도 '재정적자 감축 아니면 죽음'만 주장하다가 지난 4월부터 '성장 협약'을 외쳐 시장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기존의 긴축정책을 완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 개혁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올랑드 성장론에 대한 일종의 '김빼기'다.

올랑드, 믿을 수 있는가

더욱이 올랑드의 개혁 의지를 의심하는 분위기도 강하다. 무엇보다 그동안 유럽에서 EU 통합을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정당 중 하나가 프랑스 사회당이고, 올랑드는 이 당에서 뼈가 굵은 정치인이다. 더욱이 올랑드는 사르코지와 함께 프랑스의 예산적자를 2017년까지 0으로 만들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정부지출을 1150억 유로 줄인다는 이야기다. 설사 백만장자들에게 75% 소득세율을 적용한다고 해도 교사 6만명 충원 등 공공투자가 가능할 예산을 마련할 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그래서 올랑드가 결국 EU·독일정부(메르켈)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더욱이 EU 체제하에서 프랑스 대통령이 감행할 수 있는 정책전환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경우, 올랑드가 할 수 있는 개혁은 결국 메르켈·EU·ECB가 시사하는 노동시장 구조조정, 즉 노동자 착취 심화로 귀결될 것이다.

프랑스는 200여 년 전 시민혁명을 통해 자유·평등·우애라는 계몽주의 가치로 봉건시대의 종료를 앞당겼다. 올랑드는 이런 프랑스를 발판으로 다른 EU 회원국들을 결집해 21세기 초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앞당기는 세계사적 업적을 이뤄낼 수 있을까. 그가 실패한다면 21세기 초의 유럽과 세계는 경제 붕괴와 분열, 반란으로 얼룩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종태 기자 / peeker@sisain.co.kr

싱싱한 뉴스 생생한 분석 시사IN Live - [ 시사IN 구독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