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캠페인] 소송, 지옥같은 고난의 행군

2007. 5. 29.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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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본 시민들이 호주머니를 털고 한국 활동가들이 차비를 아끼며 진행한 전후보상 소송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서울 청량리역 3번 출구에서 내려 전농동 쪽으로 10분쯤 걸어 내려가면 '떡전사거리'란 이름이 붙은 교차로 너머로 5층짜리 허름한 건물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이 건물 3층에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어둠의 야스쿠니에 평화의 촛불을 들자'는 취지로 2005년 한국·일본·대만·오키나와인들이 모여 만든 야스쿠니공동행동 한국위원회(이하 한국위원회)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 허름한 사무실이 일본을 상대로 끈질긴 전후보상 소송을 이끌고 있는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중추다.

"마지막으로 60만엔만 달라"

김은식 한국위원회 사무국장은 "한국의 전후보상운동이 지금과 같이 기틀을 잡은 것은 일본 시민사회에 빚진 바 크다"고 말했다. 식민지배와 전쟁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한·일 두 나라 활동가들이 이어온 끈끈한 유대의 역사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신파극 같은 느낌이 난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전후보상운동은 '위안부'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999년에 이르러서 △야스쿠니신사 강제합사 △군인·군속 강제동원 △유골 반환 등 다른 문제들로 눈을 돌려볼 여유가 생겼고, 그 사연을 모두 모아 일본 법원에 제소를 하자는 움직임으로 연결됐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본 법원에서 소송을 진행하려면 세 가지가 갖춰져야 한다. 첫 번째는 피해 당사자와 유족들로 구성되는 원고단, 두 번째는 실제 소송을 진행하는 일본 쪽 변호단, 세 번째는 그 비용을 부담하는 지원회다.

먼저 원고단과 지원회를 구성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김은식 국장은 "그때는 전후보상과 관련된 모든 쟁점을 모아 소송을 벌여보자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피해 당사자와 유족들에 대한 엄청난 양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1차로 252명에 대한 진술서가 작성됐다. 한 사람당 진술서는 대략 A4용지 2~3장 정도. 그에 더해 원고의 신분을 증명하는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 등 관련 서류가 따라붙는다. 이를 일본 법원에 제출하려면 모든 서류를 일본어로 번역해야 한다. 한국에서 관련 자료를 인터넷에 올리면 도쿄 쪽에서는 미소노 고지, 오사카에서는 훗날 야스쿠니신사 강제합사의 폭력성을 정면으로 다룬 기록 영화 <안녕, 사요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후쿠가와 마시키를 중심으로 번역 작업이 진행됐다. 그 작업에 참여한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는 줄잡아 300여 명에 이른다.

그 와중에 뜻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무라야마 전 일본 총리 때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아시아여성기금'을 받느냐 마느냐를 둘러싸고 유족 단체가 둘로 갈라진 것이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이하 유족회)는 "일본 요구에 따르자"는 양순임씨 쪽과 "그럴 수 없다"는 이희자씨 쪽으로 갈라섰다. 결국 유족회 서울지부장이던 이희자씨와 김은식 사무국장은 1999년 10월21일 유족회 사무실에서 멱살 잡혀 쫓겨나고 말았다.

며칠 뒤 일본 지원단체 관계자들 앞에 선 김씨는 "마지막으로 60만엔만 더 지원해달라"고 말했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때 여기서 운동이 끝나는 게 아닌가 괴로웠습니다.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일본에 간 거죠." 일본 지원단체 쪽에서는 격론이 일어났다. "한국의 유족단체는 이미 끝났다"는 쪽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엇갈렸다. "며칠 뒤 서울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일본인들이 봉투 하나를 내밀더라고요." 그 안에는 김씨가 요청했던 60만엔이 들어 있었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한 사람당 적지 않은 돈을 갹출했을 것이다. 그 돈으로 종로3가 종로오피스텔 505호에 '태평양전쟁 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라는 새 이름으로 간판을 달 수 있었다. 일본에서 손님들이 오면 회의실이 없어 길 건너 제일은행 본점 1층 테이블로 향했고, 가끔씩은 YMCA 빌딩 지하 다방을 찾기도 했다. 김씨는 2년 넘게 월급을 못 받았고, 차비가 없어 출근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원고단과 지원단의 관계가 튼튼해진 것 같습니다." 김은식 사무국장이 말했다.

그 다음은 변호단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일본 변호사들은 부담스럽고, 승소 가능성이 낮은 재판에 하나같이 손을 내저었다. 결국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묻는 굵직한 재판을 맡아온 오구치 아키히코(63) 변호사를 설득했다. 오구치 변호사는 장고 끝에 재판을 맡기로 했다. 거기에 다른 일본인 변호사 2명과 재일동포 변호사 2명이 합세했다. 애초엔 피고를 야스쿠니신사로 정할 예정이었지만, 천왕제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를 상대로 하는 것은 일본 우익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와 일본 정부만을 상대로 재판을 벌이기로 했다. 그동안 한국에서 진술서를 쓴 피해자와 유족의 수는 늘어나 414명이 됐다.

일본에 갈 때마다 김을 팔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보추협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일본에 갈 때마다 김이나 휴대전화 줄을 사가면 일본 사람들이 그걸 조금씩 웃돈을 줘서 사주는 거죠." 이희자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는 매달 150만원씩 되는 사무실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다시 사무실은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됐다. 운동단체 사이에 "보추협 어쩌면 좋냐"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결국 민족문제연구소가 보추협을 떠안기에 이른다. 서우영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그때는 연구소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우리나라 전후보상운동의 맥이 끊기는 꼴은 보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지옥 같은 고난의 행군을 벌이면서 보추협은 '미쓰비시 원폭 피해자 소송'과 '신일본제철' 피해자 소송을 진행했고, 한-일 회담 문서 공개를 이뤄냈으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법 통과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수천 명의 열정과 7년이라는 긴 시간을 잡아먹은 끝에 일본 도쿄지방재판소는 2006년 "원고의 소를 각하한다. 소송 비용은 원고의 부담으로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굴하지 않았고 2007년 2월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들의 이름을 빼달라"는 새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의 상대는 지난번 재판 때 피해간 야스쿠니신사다. 재판은 승소할 수 있을까. 김은식씨는 "필요한 것은 한-일 두 나라 사람들의 좀더 많은 관심"이라고 말했다.

[야스쿠니신사 합사 피해자 돕기]일본 사회에 둔중한 충격을!

10,601,000원5월11일 현재 모금액 1060만1천원모금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자동응답(ARS) 전화도 열려 있습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목숨을 잃어야 했던 2만1천여 명의 할아버지들 원혼이 억눌려 있습니다. 할아버지들의 억울한 영혼을 모셔오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사회 세력은 지난 10년 동안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왔습니다. 밤 새워 번역을 했고, 집회에 나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상근 활동가들은 월급 한 푼 못 받으며 버티고 있습니다.그동안 일본 정부에 전쟁 책임을 묻기 위한 소송은 일본 시민단체들의 자발적인 모금에 의존해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힘으로 야스쿠니신사에 갇혀 있는 할아버지들의 원혼을 모셔와야 합니다. <한겨레21>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우리가 모아낸 작은 정성들이 하루가 다르게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사회에 둔중하고 의미 있는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독자 여러분, 작은 정성을 모아주세요. 계좌이체우리은행 1006-401-235747, 예금주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ARS 060-707-1945·한 통화 3천원 주관민족문제연구소, '노합사(NO 合祀)', <한겨레21> 문의민족문제연구소(02-969-0226), 홈페이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www.anti-yasukuni.org),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38-29 금은빌딩 3층(우편번호 130-866) 모금자 명단김영호(5만) 채민철(3만) 김대회(3만) 김선재(1만) 노태운(5천원) 박현정(3만원) 여순주(5만원) 홍재훈(10만원) 박상언(5만원)

*그 밖에 ARS 전화로 75명이 힘을 모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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