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가 사라진다]백약이 무효 묘수는 어디에

2013. 8. 2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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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셋값이 연일 폭등하고 있지만 백약이 무효다. 집값의 70~80%를 넘는 건 기본이고 오히려 집값보다 비싼 전셋집도 등장했다. 가뜩이나 전세금 부담에 시달리는 중산층들은 '몇천만원 올려달라'는 집주인 성화에 못 이겨 또다시 대출을 받거나 평형을 낮춰 이사할 수밖에 없다. 그마저도 원하는 전셋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다.'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이 치솟으면 집값이 오른다'는 부동산 시장 공식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서민들은 내집마련은커녕 오히려 월세 시장으로 떠밀리는 모습이다. 전셋값 상승세가 지속되면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전세 제도가 아예 사라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정부도 뾰족한 수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서 "전월세 대책을 마련하라"고 질타했지만 당장 전세 공급을 늘리기는 역부족이라 올가을에도 전세대란이 재발될 것이란 우려다. 전셋값 안정을 위한 묘수는 없는 것일까.

전세 없는 부동산 시장 올까

집값-전셋값 격차 줄어 '월세시대' 눈앞

"매물을 보지도 않고 계약하는 건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닙니다." 서울 마포구 도화동 A중개업소 정 모 대표는 최근 마포삼성아파트 전용 90㎡ 전셋집 1건을 겨우 계약했다. 워낙 매물이 없다 보니 전세 계약을 맺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2년 전에 비해 6000만원이나 오른 3억4000만원에 매물이 나오자마자 새로운 세입자는 집 내부를 보지도 않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원래 살던 직장인 부부는 치솟은 전셋값 때문에 재계약을 못 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다. 정 대표는 "지난 4월 이후 전셋값이 한 달에 1000만원씩 뛰었다. 워낙 수요가 몰리다 보니 집주인들이 재계약할 때 적어도 5000만원 이상은 올려 받는 경우가 흔하다"고 귀띔했다.

인천 부평구에 사는 사업가 박 모 씨(41)는 얼마 전 집주인과 말다툼을 했다. 1억9000만원 보증금을 내고 살던 106㎡ 전셋집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집주인이 전셋값으로 무려 2억6000만원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아파트 매매 시세가 3억4000만원 정도인 걸 감안하면 전세가율이 75%를 훌쩍 넘은 셈이다. 반전세로 전환하거나 대출을 받는 방법 등 이리저리 궁리해봤지만 얼마 전 대출을 잔뜩 받아 사업을 확장한 바람에 도저히 엄두가 안 났다. 그는 "7000만원을 더 낼 바엔 차라리 다른 집으로 옮기겠다"며 집 평수를 줄여 인근 노후 아파트로 이사 갈까 고민 중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중개업소 여러 곳에 전세 매물을 문의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매물 나오면 연락 주겠다. 무조건 기다려라"였다.

전셋값 급등은 이제 놀라운 소식도 아니다. 성수기, 비수기는 물론이고 강남, 강북, 수도권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셋값이 오른다. 2008년 이후 올 7월까지 전셋값은 34.9% 급등했다. 서울 반포동 반포자이 전용 165㎡ 전세는 8월 초 12억8000만원에 거래돼 2달 전인 6월보다 무려 1억3000만원 상승했다.

고가 전세금 부담에 가계 소비 위축

전셋값이 폭등하면서 부동산 시장은 대혼란에 빠졌다. '전세가율 급등 → 매수세 형성 → 매매가 상승'으로 이어진 부동산 시장의 전통적인 공식이 먹혀들지 않고 있어서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서울과 수도권 아파트 전세가율은 지난 7월 58.3%까지 뛰었다. 2002년 11월(58.3%) 이후 최고치다. 그럼에도 집값은 오히려 떨어지는 분위기다. 2009년 이후 지난 7월까지 서울 아파트값은 2.3%나 하락했다.

박재룡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은 "실물경기가 극도로 위축돼 있고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이 오르는 상황이라 실수요자의 주택 구매력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당장 전세 수요가 매매 수요로 전환돼 집값이 오를 가능성은 낮다"고 우려했다.

전세난이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실수요자 입장에선 주택을 구매해도 집값이 오를 것이란 확신이 없어 전세만 선호한다. 집주인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전세금을 받아 되돌려줘도 집값이 충분히 올라 '쏠쏠한' 재테크였지만 요즘엔 오히려 집값이 떨어지는 분위기인 데다 금리마저 낮아 전세 대신 월세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전세 매물이 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전국적인 재건축, 재개발 사업 이주 수요도 전세난을 부추겼다. 서울 재건축, 재개발 단지 중 관리처분인가가 떨어진 사업장은 총 3만여가구. 이들 단지는 이주, 철거, 착공 등 사업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난해 말 서초구는 잠원대림, 신반포1차 등 주요 단지 이주로 서울 시내에서 전셋값이 가장 많이 오르기도 했다. 게다가 올 하반기 전국 아파트 입주 예정 물량이 10만가구에 불과해 공급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양용화 KEB외환은행 부동산팀장은 "전세 공급보다는 수요가 훨씬 많아 전세대란은 적어도 3년 이상 장기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셋값 상승과 집값 하락은 비단 부동산 시장에만 영향을 주는 건 아니다. 집주인들은 갈수록 떨어지는 집값 탓에, 세입자들은 치솟는 전세금 부담 때문에 소비를 줄이는 분위기다. 특히 전세 매물이 줄면서 어쩔 수 없이 월세에 거주해야 하는 저소득층은 가처분소득을 줄이면서 전체적인 가계 소비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은 실질 전세가격(소비자물가를 반영한 전세금)이 1% 높아질 때마다 단기적으로 0.37%, 장기적으로 0.18%가량 소비가 줄어든다고 분석했다. 향후 1년간 전세금이 10% 오른다면 소비자물가를 반영한 국내 민간소비는 3.1%나 급감한다. 국내총생산(GDP)으로 치면 무려 1.64%나 줄어드는 효과다.

권주안 주택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전세금 상승은 소비 감소, 내수경기 침체로 이어지면서 소득 재분배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전셋값이 급등하면서 세계에서 한국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전세 제도가 아예 사라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월세 비중은 계속해서 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올해 1~7월 전월세 주택 거래량 83만6637건 가운데 월세 주택은 총 32만5830건으로 전체의 38.9%를 차지했다. 10가구 중 4가구가 월세라는 얘기다.

임일섭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금융분석실장은 "전세 제도는 매매가격이 지속적으로 올라야만 유지된다. 우리나라 인구구조, 가계부채 부담 등을 감안할 때 매매가격이 안정되면 전세주택이 점차 사라지면서 월세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자연스레 서민 주거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내다봤다.

정부도 전세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각종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다. 목돈 안 드는 전세주택, 전세자금 저리대출은 오히려 전세 수요를 장려하는 대책이라 전세 시장만 자극한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박근혜정부 대표 공약으로 20만가구가 공급될 예정인 행복주택도 일부 지자체 반대, 예산 부족으로 첫 삽조차 뜨기 어려워 보인다. 전세자금 저리대출은 매매 수요 전환이 가능한 전세 수요자까지 전세로 눌러앉히는 부작용이 우려된다.

전문가들은 전셋값을 안정시키려면 매매시장 활성화 대책이 선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미 발표된 취득세 영구 인하, 양도세 5년 감면을 비롯해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폐지, 분양가 상한제 폐지 등 남아 있는 규제를 죄다 없애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와 여당은 이미 발표한 취득세 영구 인하 도입 시점을 내년 초에서 관련 법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하는 9월로 앞당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가을 이사철 거래 공백을 막기 위해서다. '준공 후 미분양 아파트의 임대주택 전환'을 비롯해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늘리고 민간임대 시장을 활성화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아울러 주택 임대 시장이 전세에서 월세로 전환되는 추세인 만큼 월세 시장 안정 대책도 필요하다. 세입자를 위해 월세 소득공제 기준을 완화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현재는 연봉 5000만원 이하인 무주택 가구주만 연 300만원 한도에서 월세액의 50%까지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은 정부와 새누리당이 검토 중인 각종 전월세 대책을 반대하고 나서서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올지 의문이다. 민주당은 "취득세 영구 인하,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분양가 상한제 폐지는 전세난에 시달리는 서민보다 부자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대신 전월세 상한제, 자동 계약 갱신 청구권, 최우선변제보증금 인상 등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전월세 상한제가 반시장적 규제인 데다 전월세 공급이 줄어 오히려 임차인이 피해를 볼 것으로 우려한다.

전세 역사 살펴보니

고려시대 전당 제도에서 유래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있는 전세 제도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전세는 우리나라에 관습으로 내려오던 전당(典當·전답을 담보로 금전을 융통받고 해당 부동산 사용 수익을 이자로 제공하던 제도)이라는 '금전대차'와 주택 임대차가 결합된 형태에서 시작됐다. 고려시대 전답을 대상으로 하던 전당 제도가 조선시대에 주택을 활용한 '가사전당' 형태로 발전됐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임차인이 가옥 가격의 50~80% 금액을 가옥주에게 위탁할 경우 별도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고 계약했다. 계약 종료 시점에 해당 금액을 돌려받았다.

지금 같은 전세 제도는 조선시대 말기인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후 부산, 원산, 제물포항 개항으로 지방인구가 서울로 이동하고 주택 수요가 늘어나며 나타났다. 1910년 조선총독부 관습조사보고서에는 '전세란 가옥 임차 시 차주로부터 일정 금액을 가옥 소유주에게 기탁해 별도 차임을 지불하지 않고 가옥 반환 시 그 금액을 반환하는 제도'로 등재돼 있다.

전세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건 1970년대부터다. 당시 아파트 건설이 급증하면서 아파트를 분양받기만 하면 적잖은 시세차익을 남길 수 있었는데 목돈이 없던 수요자들은 전세에 관심을 갖게 된다.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전세를 주면 내집마련 하는 데 자금 부담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은행 가계대출이 쉽지 않던 상황이라 일종의 무이자 대출 개념으로 주택을 구입한 셈이다. 이후 집값이 상승세를 탈 때마다 전세는 집주인, 세입자 모두에게 인기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특별취재팀 : 김경민(팀장)·김헌주·정다운 기자 / 사진 : 윤관식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22호(13.08.28~09.03 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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