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밴 헤일런 인후암으로 별세, 향년 65세 "진정한 기타 혁신가"[김성대의 음악노트]

입력 2020. 10. 7. 09:06 수정 2020. 10. 7.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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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후암(Throat cancer).

2020년 10월 6일. 에릭 클랩튼과 지미 페이지를 동경한 지구의 기타 영웅을 앗아간 녀석의 이름이다. 레드 제플린의 ‘Heartbreaker’를 듣고 태핑(Tapping)이라는 자신만의 연주 세계를 개척한 인물. 마이클 잭슨의 고전 ‘Beat It’에서 불멸의 연주를 남기며 1980년대 팝계 크로스오버 유행을 불러일으킨 장본인. 바흐와 모차르트를 가슴에 품고 크림(Cream) 시절 클랩튼의 주법을 좇아 기타리스트로서 꿈을 키워온 그. 에드워드 루드윅 밴 헤일런. 70년대 하드록이 저물고 80년대 헤비메탈이 유행하기 직전 혜성처럼 나타나 팬들 가슴을 설레게 한 우리의 에디(Eddie Van Halen)가 간밤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세.

모든 것은 ‘Eruption’에서 비롯되었다. 1978년, 형 알렉스 밴 헤일런(드럼)과 발표한 밴드 밴 헤일런(Van Halen)의 데뷔작에서 들려준 그 파격적인 스타일은 에디를 일순 지미 헨드릭스에 버금가는 기타 거장(Virtuoso)으로 만들었다. 그만큼 시작은 화려했고 시작이 곧 전설이었다. 하지만 혁명과 혁신은 늘 외로운 법. 충실하게 업다운을 반복하는 얼터네이트 피킹(Alternate Picking)만이 ‘진짜’라고 여기는 이들은 그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제네시스(Genesis) 기타리스트 스티브 해킷의 것을 다른 차원으로 이끈 ‘Eruption’은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의 확고한 미래였다. 그렇게 조지 린치(도켄)를 충격으로 몰아넣고 기타 월드(Guitar World)지 독자 투표 ‘가장 위대한 기타 솔로’ 2위에 오른 ‘Eruption’과 더불어 키스(Kiss)의 베이시스트 진 시몬즈가 도와 낼 수 있었던 싱글 ‘Runnin’ With The Devil’, 킹크스의 원곡을 머쓱하게 만든 커버 ‘You Really Got Me’를 앞세운 밴 헤일런의 데뷔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19위에 올라 2020년 10월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1천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밴 헤일런 형제는 비록 네덜란드 출신이었지만 야생마 같은 프론트맨 데이비드 리 로스의 말처럼 록 밴드 밴 헤일런은 단 한 장의 앨범으로 미국 로큰롤, 나아가 전 세계 로큰롤의 미래가 되었다. 그야말로 ‘전설의 시작’이었다.

물론 ‘Eruption’은 시작이었지, 에디 밴 헤일런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건반도 잘 다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신시사이저 인트로를 가진 ‘Jump’를 남겼고, 여세를 몰아 두 번째 보컬 새미 헤이거와 함께 ‘5150’, ‘OU812’, ‘For Unlawful Carnal Knowledge’를 내리 작렬 시키며 두 번째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다 ‘Can't Stop Lovin' You’라는 히트 싱글을 낸 ‘Balance’부터 조금씩 하향세로 접어드는 느낌이 없지 않더니 익스트림(Extreme)의 게리 셰론을 맞아들여 낸 ‘Van Halen III’(1998)에선 급기야 예술적 파산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로부터 14년 뒤, 다시 데이비드 리 로스와 함께 낸 ‘A Different Kind Of Truth’는 끝내 밴드의 활기가 되어주지 못한 채 에디 밴 헤일런, 그리고 밴드 밴 헤일런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재즈 기타리스트 프랭크 갬베일의 말마따나 내가(또는 우리가) 에디 밴 헤일런을 사랑한 이유는 그의 스마트하고 유쾌하고 지적인 연주 때문이었다. 심지어 기타 톤에서까지 흘러 넘쳤던 긍정과 희망의 에너지는 늘 미소짓던 그의 표정에서도 예외없이 전해졌다. 나는 그의 곡들 중엔 ‘5150’의 ‘Dreams’를, 앨범 중엔 ‘OU812’를 가장 좋아했다. 그러니까 데이비드 리 로스의 끈적한 섹스 어필보다 새미 헤이거의 호탕한 낭만에 나는 더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다. 때는 80년대 중후반, 바야흐로 에디가 기타와 더불어 건반에도 본격 심취한 시기였다. 시쳇말로 물이 오른 밴 헤일런 형제의 작곡력과 연주와 톤은 이 시기 그 정점을 찍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비록 에너지와 태도(Attitude, “우리는 관습을 거부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 데이비드 리 로스)에선 뒤질지 몰라도, 멜로디와 메시지에서 밴 헤일런의 중기는 소통과 완성을 이룬 시기였다. 많은 밴 헤일런 팬들은 그 시기 밴 헤일런 음악을 흠모했고 또 ‘로스 VS 헤이거’ 구도로 양분됐다. 당연히 나는 그때도 지금도 ‘헤이거’ 쪽이었다.

새미 헤이거는 에디 밴 헤일런의 감성과 유독 잘 어울렸다. 거칠어도 아련한 맛이 있었던 그의 목소리는 에디의 기타와 키보드에, 밴 헤일런의 음악에 아름다운 팝의 그늘을 드리웠다. ‘Why Can't This Be Love’, ‘When It’s Love’, 그리고 ’Right Now’. 당장 떠오르는 곡들만 봐도 모두 밴 헤일런의 베스트다. 그런 새미 헤이거가 떠나고 감행된 게리 셰론 영입, 데이비드 리 로스의 복귀는 결국 밴 헤일런의 침몰로 이어졌으니. 여기에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밴드의 얼굴 에디의 부재까지 겹쳐 밴 헤일런은 더는 인양이 불가능한 전설로 그저 팬들의 기억 속에서만 항해하게 되었다. 에디의 사망은 곧 밴 헤일런의 사망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디의 기타 솔로가 담긴 ‘Dreams’와 녹음 전 맥주 두 팩을 마시고 뿜어낸 ‘Beat It’의 거침없는 기타 솔로를 한 번 더 듣는다. 물론 마지막은 그의 처음이었던 ‘Eruption’의 도발이다. 이제 팬으로서 바라는 건 단 하나. 형제 밴드 밴 헤일런을 존경하다 못해 형제끼리 기타와 드럼을 맞바꿔 연주한 이력까지 쏙 빼닮은 헤비메탈 밴드 판테라의 애벗(Abbott) 형제와 저 세상에서 진한 잼(Jam) 한 번 고인이 펼쳤으면 하는 것이다. 존 페트루치(드림 씨어터)의 표현처럼 “우리 시대 진정한 혁신가(True Innovator)”, 위대한 기타리스트 한 명을 또 이렇게 떠나보낸다. 어젯밤 일이다.

*이 글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필자약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마이데일리 고정필진
웹진 음악취향Y, 뮤직매터스 필진
대중음악지 <파라노이드> 필진
네이버뮤직 ‘이주의 발견(국내)’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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