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젤번천 낳은 '빅시'의 몰락..섹시함만 쫓다 외면 당했다

정은혜 2020. 5. 2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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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빅토리아 시크릿의 연말 패션쇼,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가 모델 릴리 앨드리지와 함께 런웨이를 걷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의 대표적 여성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이하 '빅시')이 250개 매장을 폐점키로 했다고 20일(현지시간) 밝혔다. 역대 최악의 1분기 실적의 충격에 미국 내 전체 매장의 22%를 닫기로 한 것이다.

빅시는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큰 타격을 입은 브랜드 중 하나다. 모회사인 엘브랜즈(L Brands)의 시가 총액은 2015년 290억 달러(35조 6700억원)에서 올해 초엔 11억 달러(1조 3530억원)로 쪼그라들었다.

빅시의 매출을 이끌어온 건 오프라인 매장인데 정부의 락다운(봉쇄) 정책으로 북미 1100개 매장이 대부분 문을 닫은 여파다. 설상가상으로 매각조차 어렵게 됐다. 빅시를 인수하겠다던 사모펀드 시카모어 파트너스는 지난달 빅시가 매장을 닫고 직원 8만8000여명에게 무급 휴가를 준 것이 '계약 위반'이라며 매각 포기 소송을 제기했다.


5년 만의 추락, 왜?
빅시의 추락이 단지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다. 시장에 나타난 두 가지 트렌드를 읽지 못한 탓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우선 온라인 시장의 급성장이다. 블랙과 핑크색으로 꾸며진 화려한 매장이 강점이던 빅시는 온라인 시장에서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 섹시함을 강조하는 빅시의 전략이 미국 여성들의 인식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1995년부터 매년 성황리에 치러졌던 연말 란제리 패션쇼가 2019년 폐지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빅시의 란제리 패션쇼는 가장 화려하면서도 선정적인 패션쇼로 미국 지상파 방송을 통해 중계됐다. 미란다 커, 지젤 번천 등 스타 모델의 배출 창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부터 시청률이 급감해 존폐 위기에 시달렸다.

2017년 빅토리아 시크릿 연말 패션쇼. [AFP=연합뉴스]


네 번째 美 페미니즘 바람
미국 여성들이 빅시를 외면하기 시작한 건 2012년 불기 시작한 페미니즘 바람과도 연관이 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마케팅 방식에 불편함을 느끼는 여성이 늘어난 것이다. 빅시는 포르노를 연상케 하는 광고로 2016년 뭇매를 맞았고, 이후 경영진들의 말실수와 성폭력 관련 폭로도 불거졌다.

빅시는 시장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기용하지 않겠다는 경영진의 공언은 획일화된 여성 이미지를 더이상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움직임에 반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빅시 히트 상품인 푸쉬업 브래지어는 너무 불편하다는 게 소비자들의 반응이다.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푸쉬업 기능'(가슴을 모으는 기능)의 속옷을 입으려는 소비자들은 불과 몇 년 사이 급감했다.

최근 미국 내 페미니즘 운동은 네 번째 단계에 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여성들은 그동안 여성 참정권, 미혼모 생계, 동등한 사회적 지위 문제를 놓고 페미니즘 운동을 해왔다. 이번에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문화 전반에 대한 비판을 SNS를 통해 공유하고 확산하는 게 특징이다. 길거리, 직장 등 생활 전반에서 이뤄지는 성폭력 근절 운동도 핵심적인 주제다.


빅시 일군 최장수 CEO도 퇴진

아동 성매매 혐의로 구속돼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억만장자 제프리 앱스타인. [AP=연흡뉴스]


코로나19가 미국을 강타하기 전인 지난 2월, 레슬리 웩스너(82) 엘브랜즈 최고경영자(CEO)가 퇴진을 결정했다. 1963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작은 매장을 열며 의류사업을 시작한 그는 아베크롬비앤드피치, 빅토리아 시크릿, 바디케어 브랜드 배스앤바디웍스 등을 런칭하며 세계적인 소매업체 엘브랜즈를 일궜다.

지난해에는 절친한 친구이자 오랜 시간 자산 관리를 맡겨온 제프리 앱스타인이 아동 성매매 혐의로 구속된 뒤 감옥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앱스타인은 범죄 피해자에게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을 시켜주겠다"며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앱스타인의 범죄에 정·재계 인사들이 연루됐을 것이라는 의혹도 불거졌다. 57년간 회사를 이끈 최장수 CEO 웩스너를 무대에서 내려오게 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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