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완·박인하의 만화는 시대다] 우리 곁의 세상과 순정 그려낸 '로코'의 여왕

2020. 4. 18. 04:0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5) '인어공주를 위하여' 이미라
이미라 작가의 대표작들. ‘인어공주를 위하여’(왼쪽)와 ‘은비가 내리는 나라’ 만화 컷. 작가 제공

1970년대 만화는 어린이를 위한 B급 문화였다. 스포츠신문이나 성인용 주간잡지에 어른을 위한 만화가 연재됐고 가판용 성인만화가 판매되기도 했지만, 만화는 기본적으로 어린이용이어야 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며 새로운 장편 서사만화가 만화방에서 인기를 얻으며 만화 독자의 연령층이 높아졌다. 역사의 격랑에 펼쳐지는 로맨스나 세계의 운명을 건 여성 전사의 활약을 그린 황미나 신일숙 김혜린 김진 강경옥 등의 여성만화는 청소년은 물론 어른도 사로잡았다.

1982년 창간된 잡지 ‘만화 보물섬’의 성공 이후 연이어 창간된 만화잡지는 도시 어린이들의 필수교양이 되었다. 심지어 민주화 운동 현장에도 만화가 함께 했다. 대자보나 단체 회보에 만화가 발표됐다. 이처럼 1980년대는 다양한 만화들이 용광로처럼 녹아들었던 ‘한국 만화의 르네상스’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만화 보물섬’을 보던 어린이 독자가 성장하며 10대 만화 독자가 크게 늘어났다. 이미라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10대 여성 독자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작가였다. 이미라는 만화방 만화인 ‘바람의 방향’으로 데뷔했다. 데뷔작 ‘바람의 방향’도 좋은 평가를 받지만, 선풍적인 인기몰이는 후속작으로 갈수록 더욱 거세졌다. ‘늘 푸른 나무’(1988), ‘늘 푸른 이야기’(1989), ‘인어공주를 위하여’(1989)로 이어진 이슬비와 푸르매, 서지원이 등장하는 10대 청춘물은 만화방에서 가장 사랑을 받은 여성만화였다.

만화가 이미라는 아름다운 작화와 특유의 유머를 복합장르 안에 녹여내며 1990년대 10대 여성 독자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작가 제공

섬세한 작화와 유머

이미라 만화의 작품에 드러나는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 특징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반짝이는 섬세한 작화, 독자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시적인 내레이션, 화사한 필터를 사용한 듯 아름답게 그린 인물 컷이다. 그래서 그의 컬러 일러스트는 물론 만화방용 만화책 본문을 몰래 잘라 수집하던 팬들이 많았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이미라 만화의 주인공은 마치 아이돌처럼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두 번째 특징은 ‘우스개’다. ‘바람의 방향’은 서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진지한 센티멘털 로맨스지만, 후속작부터 배경은 한국, 그것도 작가가 거주하는 대구가 됐다. 동시대 구체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서사는 훨씬 더 독자에게 친숙했다. 친숙한 공간에서 캐릭터들은 특유의 유머러스함을 보여줬다. 비극적인 사랑은 대개 감정이 가라앉게 된다. 이미라의 만화는 센티멘털로 흘러가기 쉬운 로맨스에 개그를 끊임없이 배합해 극의 텐션을 유지했다.

서구에서 한국으로 방향을 선회한 이미라는 ‘늘 푸른’ 시리즈와 최대 히트작 ‘인어공주를 위하여’에 고등학생들의 가벼운 로맨스와 웃음을 담았다. 대중들은 진지한 서사만큼 가벼운 웃음도 보고 싶어했다. 1970년대에는 있었지만, 1980년대에는 없던 가벼운 청춘물의 빈자리를 이미라 만화가 채울 수 있었다.

이미라 만화의 두 특징인 매력적인 캐릭터와 유머러스함을 드러내는 출구는 모두 ‘캐릭터’였다. 이미라 만화의 캐릭터는 금발과 흑발로 양분된다. 흑백 만화에서 선으로만 머리카락을 묘사하면 금발로 받아들이고, 머리에 검은색이 들어가면 흑백 캐릭터가 된다.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도 헤어 스타일은 기호화돼있어 금발 아니면 흑발로 받아들인다. 여성 주인공 이슬비는 검은 긴 머리의 캐릭터다. 검은 긴 머리이지만, 청순 캐릭터라기보다는 귀엽고 발랄한 캐릭터다.

이미라 월드에서 흑발 여성 캐릭터는 1960년대 순정만화 캐릭터처럼 슬픔에 혼자 눈물 흘리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의 눈높이에서 가장 친숙한 자기동일시가 가능한 캐릭터로 나오는데, 이미라는 주체적인 인물로 흑발 여성 주인공 캐릭터를 묘사한다. 독자는 학업 성적이 유난히 뛰어나지도 않고, 학생회장이나 동아리를 끌어가는 ‘인싸’도 아닌 이슬비에게 자기를 투사한다. 반면 긴 금발을 지녀 로맨스 만화 여주인공 같은 백장미에게 자기를 투사하는 독자는 많지 않다. 그는 예쁘지만 아프고, 비련의 주인공으로 묘사된다.

이슬비와 로맨스로 얽히는 남성 캐릭터는 금발과 흑발 캐릭터로 나뉜다. 이슬비가 좋아하는 캐릭터는 금발로 뛰어난 외모이지만, 성격상 약점을 갖고 있다. ‘인어공주를 위하여’의 경우 삼각관계 끝에 여성 주인공 슬비와 연결되는 남성 주인공 지원은 푸른고교의 불량써클 불개미단의 보스로 등장한다. 여성 주인공과 연결되지 않는 금발 캐릭터는 모든 측면에서는 완벽한 캐릭터로 나온다. ‘인어공주를 위하여’에서는 학생회장 조휘인처럼 공부도 일등이고 인간성도 좋으며, 배려심도 넘친다. 다만 사랑에는 실패한다. 흑발 캐릭터는 주로 금발 주연과 대립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작품의 유머를 담당한다.

학원물이 아니라 판타지 만화도 캐릭터 구도는 유효하다. 도깨비 나라와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은비가 내리는 나라’(1992)에서 도깨비 나라에 살다 지상의 세계로 쫓겨 온 이슬비는 흑발 캐릭터다. 이슬비를 좋아하는 유니콘 왕국의 시리우스 왕자는 금발 캐릭터고, 이슬비의 연적인 도깨비 나라 가시찔레의 머리는 금발이다. 설정상 붉은색이지만, 흑백 만화에서 표현은 금발과 같다. 이슬비가 지상에 내려와 함께 살게 된 남성 캐릭터 한빛의 머리는 흑발이다.

흑발 캐릭터는 친근함과 우스개를 주로 담당한다. 금발 캐릭터는 멋스러움과 비극을 담당한다. 흑발과 금발은 서로 이어질 수 있지만, 흑발과 흑발, 금발과 금발은 이어지기 힘들다. 이 명쾌한 기호는 만화에 여러 인물이 등장해도 독자들이 헛갈리지 않도록 하는 가이드 역할을 했다. 이미라 만화에는 유독 만화 첫 페이지에 책장을 뜯어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적혀있었다. 기호화된 캐릭터는 10대 독자들에게 쉽게 수용되고, 마치 아이돌처럼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사랑입니까?’(왼쪽)와 ‘인어공주를 위하여’ 표지. 작가 제공

장르의 마술사

이미라 만화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까닭은 매력적인 주인공들의 힘이 세지만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작품이 10대 주인공이 등장하는 학원물이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장르 서사를 혼합시킨다. ‘인어공주를 위하여’를 보면, 밝고 경쾌한 학원물이지만 마치 일일 드라마를 보듯 다양한 장르 서사를 활용한다. 작품 중반부까지는 대가족 일상 드라마가 코믹하게 전개된다. 이슬비 가족은 인기 만화가 아버지 이상형과 매니저 어머니 슬하에 다섯 딸로 구성돼있다. 만화가 딸들은 첫째부터 진아 일숙 혜린 미라, 그리고 막내 슬비다.

여성만화 독자라면 누구라도 이상형의 딸 이름이 김진 신일숙 김혜린 그리고 작가 자신인 이미라에서 빌어왔다는 걸 쉽게 알아챘을 것이다. 가끔은 작가 본인의 신세타령이 엿보이기도 하는 마감 과정은 아주 생생한 생활감과 개그감을 보여준다. 대가족형 생활드라마를 작가 경험과 연계시킨 흥미로운 전략이다. 슬비 친구인 혁진이 만화가가 되고 싶어하면서 슬비네 집을 드나들면서 생활드라마는 학원물과 연계된다. 주인공 슬비를 중심으로 한 로맨스 서사도 슬비가 어린 시절 의지하고 기댄 푸르매 찾기로 시작된다.

이처럼 이미라 만화는 ‘늘 푸른’ 시리즈와 ‘인어공주를 위하여’처럼 코믹한 학원물이면서 동시에 생활드라마, 로맨스, 미스테리와 같은 다양한 장르가 결합됐다. ‘은비가 내리는 나라’나 ‘남성해방 대작전’(1996), ‘신 로미오와 줄리엣’(1999)처럼 판타지에 로맨스, 미스테리, 개그 같은 장르도 결합했다. 단행본 홍보문구를 인용하면, 이미라 만화는 ‘코믹 터치 러브송’과 ‘어드벤처 코믹 로망’이다.

여러 장르가 결합돼도 멋진 캐릭터와 개그는 빠지는 법이 없다. 이미라 월드를 좋아한 1980~1990년대 여학생들은 이미라 만화를 보며 밤을 새우고, 내레이션을 옮겨 쓰고, 그림을 따라 그렸다. 당시 10대가 좋아하던 로맨스 만화의 여성 주인공은 긴 금발의 우아한 캐릭터였지만, 이미라 월드에서는 씩씩한 이슬비가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은비가 내리는 나라’나 ‘남성해방 대작전’에서는 기존 관습이 전복된 사회를 상상하기도 했다. 1980년대 대하서사 여성만화가 먼 세상 이야기를 그렸다면, 이미라는 우리 곁의 세상을 그렸다. 지금 보면 깜짝 놀랄 폭력이 등장한다. 시대의 한계다. 그럼에도 우리 슬비는 늘 씩씩했다. 그의 컬러 브로마이드는 누군가의 교과서를 장식했고, 서정적인 내레이션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