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공·학원강사.. 사표 내고 '프로 큐!'

윤동빈 기자 2019. 7. 2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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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당구협회 투어 선수 4人

'축구 왕국' 브라질에선 택시 기사도 플립플랩(한 발로 공을 빠르게 두 번 건드리는 고급 기술)을 구사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한국은 당구 캐롬(3쿠션) 종목에서만큼은 브라질 축구와 같은 저변을 구축하고 있다. 전국 당구장만 2만2000여개, 동호인 150만명에 이른다.

캐롬 왕국답게 올해 첫 삽을 뜬 프로당구협회(PBA) 투어에 참가 중인 국내 선수 중에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선수가 여럿 있다. 페인트공, 보컬 트레이너, 수학 학원 강사, 사이클 선수…. 각기 다른 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틈틈이 당구 실력을 연마해 온 '재야의 고수'들이다. 이들은 22일 서울 잠실 롯데호텔월드에서 열린 2차 투어(총 상금 2억8000만원) 출전에 앞서 지난 17일 서울의 한 카페 앞에 모였다. 사진 촬영을 위해 자신의 과거 이력을 나타내는 소품을 하나씩 들고 왔다.

'프로 당구 선수'로 새 출발 한 이영주, 김민정, 김갑선, 오수정(왼쪽부터)씨. 페인트 회사 사원증과 영어 교재, 칠판지우개, 자전거 등 각자 이전 직업을 상징하는 소품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이진한 기자

1차 투어 여자 초대 챔피언에 오른김갑선(42)씨는 칠판 지우개를 가져왔다. 그는 부산·대구에서 이름난 수학 강사였다. 부경대 1학년이던 1996년 남자 동기들을 따라 당구장에 처음 갔다가 당구의 매력에 푹 빠진 김씨는 14년간 수학 강사로 활동하면서 끊임없이 당구를 쳤다. 김씨는 "크리스마스, 설, 추석에도 당구를 매일 3시간 이상 치다 보니 동기들이 제대했을 땐 이미 나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며 "당구장 손님들은 모두 나를 당구장 집 딸로 알았다"고 했다. 김씨가 선수 등록을 한 건 재작년이다. 20여년 구력에 비해 선수 경력은 짧다. 그는 "당구는 오직 즐기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선수로서 업적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은 최근에서야 들었다"고 했다. 김씨의 2차 투어 목표는 2연속 챔피언이다.

남자 투어에 출전 중인이영주(42)씨는 작년까지 10년 차 페인트공이었다. 그는 화학 회사 재직 당시의 사원증을 들고 나왔다. 2016년 전업 선수에 도전한 이씨는 한 달 200만원 정도 수입으로 생활하기 어려워 작년 페인트 회사로 다시 돌아갔다. 이라크 카르발라의 석유 정제소에 투입된 이씨는 월 600만원을 벌 수 있었지만 당구와의 인연은 질겼다. 한국에서 프로투어의 장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달 휴가 때 트라이아웃(투어 선발전)에 도전해 38번째로 통과했다. 이씨는 "회사에 두 번째 사직서를 내고 나온 만큼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프로 당구 세계에서 승부를 내겠다"고 말했다.

1차 투어 여자 32강전(2회전)에서 탈락한김민정(44)씨는 1995년 스무 살 때 가수의 꿈을 접은 뒤로 2년 동안 보컬 트레이너로 활동했다. 이후 IT 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하고, 대치동에서 영어 강사를 하다 2016년부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평생 나를 사로잡은 건 노래와 당구 딱 두 개였다"며 "둘 다 사랑 관계에서 '밀당'하듯 확실히 잡히지 않았지만, 프로투어를 계기로 당구를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사이클 선수였던오수정(36)씨는 자전거를 몰고 나타났다. 대구 동부여중 2학년 때부터 6년간 선수로 활약했던 오씨는 창원경륜 실업팀에서 뛰던 2003년 연습 주행을 하다 넘어져 오른쪽 무릎 골절상을 입었다. 이후 케이블 방송사 콜센터에서 일하며 회사 동료들과 당구장을 다니던 오씨는 당구장 매니저였던 신기웅 선수와 만나 결혼했다. 오씨는 "누구나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당구 덕분에 운동선수의 꿈을 계속 이어갈 수 있어서 기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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