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된 진구

서울문화사 2019. 4. 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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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15년 차에 접어든 여진구는 왕이 되면서 비로소 연기의 맛을 알게 됐다.


“저도 모르게 행복하다는 말이 먼저 나와요.” tvN 드라마 <왕이 된 남자>가 종영한 이튿날 만난 여진구는 “행복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의 이름을 내건 드라마를 무사히 마쳤다는 것, 10.9%(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라는 자체 최고 기록을 달성하며 막을 내렸다는 것, 모든 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이번 드라마를 통해 연기의 재미를 알게 됐다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현장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드라마였어요. 오랜만에 많은 분의 사랑을 받고, 칭찬과 응원을 받으면서 드라마를 촬영해서 기분이 좋았어요.”

여진구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를 리메이크한 이번 드라마에서 1인 2역을 맡아 적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왕 ‘이헌’이자 왕을 쏙 빼닮은 광대 ‘하선’ 역을 소화했다. ‘이병헌’이라는 원조 배우가 있는 상태에서 상반된 성격의 두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배우로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제게는 도전이었어요. 원작을 좋아했기 때문에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부담이 컸죠. 하지만 이병헌 선배의 연기와 다르게 보이려고 무언가를 만들진 않았어요. 감독님이 첫 만남에서 리메이크 드라마이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재창조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원작과 다른 스토리를 창의적으로 표현하고 우리만의 캐릭터를 만들면 좋겠다고 하셨죠. 원작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었어요.”

하지만 앞서 이병헌이 만든 캐릭터를 수많은 대중이 본 상황에서 캐릭터에 변화를 주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진구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특히 이헌과 하선이 처음으로 마주한 장면은 시청자를 <왕이 된 남자>로 견인한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이헌과 하선이 대면하는 장면은 어렵다고 느끼고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니까 생각보다 더 많은 상상력이 요구되더군요. 제 표정과 감정을 완벽하게 알고, 제스처까지 파악해야 두 인물을 붙여놨을 때 그림이 그려지겠더라고요. 그 부분이 쉽지 않았는데, 1회 엔딩을 보고 안도했어요.”

여진구는 이헌을 연기하며 연기력을 칭찬받았다. 왕위와 목숨을 위협받아 정신이 쇠약해진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한 것. 아역 배우 출신으로 선한 이미지가 강한 여진구이기에 자칫하면 악역이 어색할 수 있었는데, 우려와 달리 ‘찰떡’같이 소화해내면서 찬사를 받았다.

“이헌이라는 캐릭터는 안타까운 사연을 지녔고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라 연기적으로, 또 외향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 캐릭터는 드라마 중반에 퇴장해야 하니까 시청자들이 이헌의 매력을 잊어야 했어요. 그래야 하선의 매력이 부각될 수 있으니까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연기했어요.”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이헌을 연기할 때 가장 재미있었다. 극에서 모든 사람을 휘어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게 즐거웠다.



“‘내 마음대로 다 할 거야’라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표정과 목소리 톤, 리액션을 모두 강렬하게 표현했죠. 처음에는 이헌이라는 캐릭터를 잘못 해석해 차갑고 차분한 스타일로 연기했는데, 화면으로 보니 재미가 없더군요. 그냥 처져 있는 사람같이 보여 현장에서 수정을 많이 했어요. 표정이나 행동을 폭력적으로 보이도록 연출했죠.”

이헌을 연기하면서 가장 흥분됐던 장면은 이헌이 ‘이규(김상경 분)’가 준 약을 먹고 죽는 장면이었다. 믿었던 신하에게 죽임을 당하는 왕의 감정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했다.

“처음부터 왕이 죽는다는 것을 알진 못했어요. 대본에서 엔딩을 보고 우리 드라마의 2막이 시작된다는 사실에 흥분했죠. 물론 ‘왕을 죽여도 되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파격적인 스토리가 기대되는 마음이 더 컸어요. 대본을 받고 나서 감정이 극으로 치닫는 이헌의 표정에 대해 고민했어요. 악에 받쳐 있지만 두려움도 있고 안쓰러움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현장에서 모니터로 제 모습을 보고 놀랐는데 그 장면으로 칭찬을 많이 받아 기분이 좋아요.”

또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은 이헌이 상의를 탈의하고 마약을 하는 장면이다. 여러 차례 화제가 된 장면으로, 여진구는 그야말로 물오른 연기를 보여줬다. 이로써 그는 ‘퇴폐미가 있는 배우’라는 수식어까지 얻었다.

“방송 후 악플이 달릴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극 중 인물을 이헌이 아니라 여진구로 보고 ‘오버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라고 걱정했죠. 대본에서 이헌은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인데 욕을 먹으면 제 잘못이라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런데 방송 후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고 안도했어요. 그때부터는 하선이를 연기하는 데 집중했죠.”

진짜 왕 대신 왕이 되는 광대 하선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왕이 돼 누군가의 이익보다는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으로 왕으로서 인정받는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길래 스스로를 희생할까?’라는 생각이 들어 하선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하선이 왕이 되어 하는 행동에 의문이 생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하선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면서 하선이 변화하는 걸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어요.”

<왕이 된 남자>는 ‘브로맨스’가 돋보이는 드라마였다. 왕 이헌에게 충성하는 도승지 이규 역의 김상경과 궁에 들어온 하선을 감시하다 인간적인 매력에 하선을 진심으로 아끼게 된 ‘조내관’ 역의 장광까지 세 사람의 조합은 또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수많은 드라마에서 왕 역할을 해온 김상경은 적재적소에서 여진구에게 조언을 건네며 연기에 도움을 줬다.

“김상경 선배가 답답하셨을 거예요. 알려주고 싶은 것도 많으셨을 텐데, 저를 믿어주셨어요. 부족한 점만 말씀해주셨죠.

예를 들어 이규가 봤을 때 하선과 이헌의 차이점도 중요하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 조언을 해주셨어요. 제가 교수님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죠. 제게 많은 것을 물려주셨어요.”


연기로 칭찬받고 나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런데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답답하고 화가 났어요. ‘나는 왜 이렇게밖에 연기를 못 하지?’라며 자책했죠.

“작품이 없을 땐 백수… 평범한 20대”

여진구는 지난 2005년 영화 <새드 무비>로 연기를 시작해 쉬지 않고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아역으로 연기했고 지난 2012년 방영된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는 김수현의 아역을 맡아 호평받았다. 또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는 주연 ‘화이’ 역을 맡아 김윤석, 조진웅, 장현성 등 선배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제34회 청룡영화상,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에서 신인남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 이후 여진구는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로 많은 분에게 칭찬받고 상을 받고 나서 연기가 힘들었어요. 스스로 많은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고, 작품에서 원하는 캐릭터가 생겼죠. 욕심은 많은데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선배들이나 감독님에게 많이 기댔어요.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답답하고 화가 나는 마음이 생겼어요.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연기를 못 하지?’라며 자책했죠.”

슬럼프를 극복한 방법은 정면 돌파였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 연기하며 스스로 답을 찾으려 했다. 어떤 자세로 연기해야 하는지, 어떻게 역할을 준비해야 하는지 답을 찾던 중에 만난 <왕이 된 남자>에서 결국 답을 얻었다. 김희원 감독 덕분이다.

“감독님이 저와 배우들을 믿어주셨어요. 감독님은 리허설을 보시고 배우의 연기에 맞춰 콘티를 수정하시면서 배우들이 놀 수 있는 현장을 만들어주셨는데, 사실 처음에는 굉장히 놀랐어요. 온전히 제 생각대로 캐릭터를 표현해야 하니까요. 이런 현장이 처음이라 놀랍고 무서웠어요.”

하지만 그 덕분에 지금의 칭찬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고 여긴단다. 이번 드라마를 통해서 연기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배웠다는 것.

“연기를 한 가지 느낌으로 단정 지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확신하면 안 되지만, 또 확신을 가져야 해요. 스스로 어떻게 캐릭터를 그릴지 구체화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잘못됐다는 판단이 들면 새로운 방식으로 연기하는 유연성도 있어야 해요. 과거에는 저 스스로 캐릭터를 구체화하고 확신하는 것이 어려워 그 고민을 감독님과 선배님의 몫으로 돌렸는데, 이젠 그 힘듦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힘들고 어려운 만큼 좋은 연기가 담긴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연기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이유로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의 아역 출신 배우들이 하는 고민인 성인 연기자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평생을 연기하며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연기로 인정받고 싶었고 그 마음이 그를 노력하게 만들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연기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었어요. 만약 성인 연기자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지금 당장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저는 오늘 인정받지 못해도 돼요. 왜냐하면 버티면서 연기를 하면 30대나 40대쯤 배우로서 인정받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연기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만난 <왕이 된 남자>는 그에게 변곡점이 됐다. 그에게 배우로서 자신감을 갖게 해줬고, 여진구라는 배우의 고집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이 깨달음을 잊지 않고 하루빨리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모든 장르를 아우를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것이 목표다.

“배우는 평가받는 직업이에요. 평가받는 것이 부담스럽고 두려울 수 있지만, 하다 보면 또 평가를 받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요. 칭찬받고 싶고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다는 마음이죠. 지금은 그런 마음이 충만해요. 연기하는 삶 자체가 여진구의 삶이에요. 배우가 돼 다행이고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여진구는 배우의 삶은 특별한 순간이 많지만, 또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작품을 할 땐 치열하게 고민하고, 작품이 없을 땐 백수라며 자신 또한 취업을 걱정하는 평범한 20대 청춘이라고 설명했다. 연기를 통해 스스로를 테스트하고 한계에 부딪히며 자신을 입증하고 싶다는 여진구, 그가 왕이 된 원동력이다.







에디터 : 김지은 | 사진제공 : JANUS 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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