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에 앞장 선 제주 기독교인 '김연배-조봉호-강문호'

제주CBS 박혜진 아나운서 2019. 2. 18.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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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만세운동 앞장선 후 28살 숨진 조천교회 김연배 집사
독립군자금 모금 참여 고문으로 38살 순국 성내교회 조봉호 선생
감옥에서 3.1 만세 외친 한림교회 강문호 목사..신사참배 반대 교회문 닫기도
조천 만세운동에 앞장선 조천교회 김연배 집사
김연배 집사 수형자 카드<제주항일기념관>
상해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독립군자금 모금에 앞장서다 순국한 조봉호 조사(성내교회, 금성교회)
강문호 목사가 시무한 한림교회 예배당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항일운동에 힘쓴 제주기독교인들에 대해 설명하는 예장통합 제주노회 역사 및 순교자기념위원회 전문위원인 김인주 목사(봉성교회)
3.1운동 100주년 기념을 맞아 일제강점기 어두웠던 시절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항일운동에 힘썼던 제주의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해본다.

제주의 항일운동의 거점인 조천지역의 만세운동 주역 14명 중 한명인 조천교회 김연배 집사,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독립군자금 모금에 앞장서다 순국한 성내교회 조봉호 조사, 군산에서 학창시절 목숨을 걸고 재판정과 감옥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강문호 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을 갖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항일 투쟁을 벌인 제주출신 3명의 신앙인에 대한 삶을 지난 7일 예장통합 제주노회 역사 및 순교자기념위원회 전문위원인 봉성교회 김인주 목사와 알아보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인데 이 일에 기독교계에서도
관심을 많이 갖고 있나.

김)전국적으로 큰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고 더구나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이번 3.1절 100주년에 의미를 더하고 있는 것 같다.

-김 목사님이 보는 3.1 운동은.

김)우선 비폭력 저항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좋은 운동이었고 또 하나 당시 교회가 앞에서 미국 선교사와 목회자들이 앞장서면서도 뒤에서는 정부관계자에게는 아닌 것처럼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당시 3.1 운동이 성공하지 못하고 일제강점기가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민족의 역사와 함께하려는 의지가 좀 꺾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100년이 지나도록 정리도 잘 되어있지 않고 의미가 퇴색되기도 하고 마침 올해 100주년을 맞아서 제대로 정리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이 된다.

-제주에서도 민족의 3.1운동에 힘쓴 기독교인들이 있지 않았나.

김)당시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이었던 조천교회 김연배 집사가 있다. 그해에 3.1운동이 성공하지 못하자 상하이를 비롯한 여러 곳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임시정부가 세워지기 위해서 군사력이 필요했고 거기에 필요한 재정을 제주도민들이 모아서 보낸 일이 있는데 그때 희생된 독립투사 조봉호 선생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또 당시 군산 영명학교에서 유학하고 있던 강문호 목사도 우리나라의 남단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있었던 곳이 군산인데 현재 그곳을 항일운동의 거점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곳이다. 그 중심에 강문호 목사님이 서 계셨다.

%7BIMG:2%7D-먼저 김연배 집사는 조천교회 성도였다고 하던데

김)김연배 집사는 조천에 유배되었던 남강 이승훈의 거처에서 가까운 곳에 집이 있어서, 그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측된다. 당시 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딛고 신앙을 찾아 조천교회를 찾은 청년들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집안은 김해김씨 중 삼현파라고 조천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저항의식이 강한 분들이었다. 그 분들 중심으로 제주 조천 동부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그때 김연배 집사도 그 가문의 일원이었기에 그 영향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천 만세운동의 상황은 어땠나.

김)그 집안에 김장환이라고 휘문의숙에 다니고 있었는데 서울의 시위가 진압되고 학교가 문을 닫고 모두가 다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 상황이었다. 태극기와 선언문을 가지고 귀향을 했는데 3월중 제주에 내려와서 일가의 어른들에게 말씀드리니 흔쾌히 어른들이 함께하기로 결의하고 그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 때 김연배 집사도 3.1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인가.

김)당시 김연배 집사는 학습교인이었고 3월 21일부터 나흘연속 조천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21일이 토요일이고 22일이 주일이었기에 주일성수를 해야 하는 교회청년들의 상황을 고려해서 날짜를 미루자고 제안했지만 워낙 중대한 일이고 늦어질수록 발각될 위험도 커서 받아드려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21일과 22일은 성도들이 참석을 많이 못하고 그 외의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구금된 상황이었다. 그때 만세운동의 동력이 꺾일 판이었는데 23일과 24일에 김연배 집사와 조천교회 성도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진행되었는데 규모가 훨씬 커지고 확산되게 되었다.

%7BIMG:3%7D-당시에 김연배 집사도 결국 발각되어 구금되지 않았나.

김)그때 김연배 집사도 8개월 형을 받았고 함께 구금된 사람이 총 14명이었는데 그들이 지금 미밋동산의 동지라는 뜻으로 동미회라는 이름으로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다.

-김연배 집사는 형기를 마치고 나머지의 삶은 어떻게 살았나?

김)그 이후로는 신앙의 일에 더 헌신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곧바로 세례를 받아 집사로 임명받아 조천지역 외에도 동부지역에 가서 전도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힘을쏟는 준조사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김연배 집사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김)안타깝게도 부인이 항일운동의 뜻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에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결국 이혼하게 되고 외동딸도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시름에 빠져있다가 당시의 난치병이었던 결핵으로 28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되었다.
그 후 후손이 없다보니 교회에서는 김연배 집사에 대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70년 후인 1993년 광복절에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받게 되었다.

%7BIMG:4%7D-그에 비해 조봉호 조사는 조금 알려져 있지 않나

김)조봉호 조사는 당시 경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신앙을 갖고 민족정신에 눈을 뜨면서 3.1운동 이후 독립군자금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시 군자금 모금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을 것이라고 보이고 있고 자신의 재산도 상당히 많이 헌납했다고 하던데.

김)상해임시정부가 들어서고 군대양성을 위해 재정을 충당해야 하는데
이때 한 사람에 2원씩 모금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이 일에 제주 교회의 목사로 있던 모슬포의 윤식명 목사와 성읍의 임정찬 목사가 힘을 더했다. 교회가 중심이 되어 펼친 범도민적 참여가 이루어졌다. 약 50일 동안 4,450여 인의 모금을 통해 1만원이라는 거금이 되어 이를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또한 당시 그 돈에는 조봉호 조사의 재산도 상당히 많은 부분 차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손자 조태신이 "조부는 80필지에 이르는 밭과 집을 모두 처분, 독립군자금으로 헌납했다… 조부가 독립운동을 위해 모든 재산을 기부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니…"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송금된 군자금의 큰 부분이 그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조봉호 조사는 그 일로 발각되지 않았나

김)독립군자금모금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또 다시 다른 토지를 매매해 그 돈을 군자금으로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찰나 발각되고 말았다. 그때 60여명이 검거되고 심한 고초를 겪게 되었다.
그는 만원의 큰돈을 마련한 것과 더불어 다른 사람이 고초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이 주도한 것처럼 동지들과 말을 맞추고 혼자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투옥된 1년 뒤 대구형무소에서 심한 고문의 여독으로 1920년 4월 28일 3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그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현재 제주시 사라봉 모충사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다음은 군산에서 만세운동을 한 강문호 목사는 어떤 분이었나?

군산 재판정에서 3.1운동을 벌이다 투옥된 제주출신 강문호 목사(한림교회)
김)강문호 목사는 당시 군산 영명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었는데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3.1운동 시위가 일어난 곳을 군산으로 보고 있는데 이곳에서 강문호 목사가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때 강문호 목사는 발각되지 않았고 교사와 다른 학생 30여명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 상황이었다. 재판정이 열렸을 때, 강문호목사는 방청석에 앉아 있었고 30여명의 만세운동 주동자들이 간수에게 끌려 재판장으로 들어오는 찰나, 선생님과 학우들이 묶어 들어오는 광경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자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많은 방청객들이 이에 호응하여 재판장은 별안간 만세 시위장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는 결국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강문호 목사는 감옥에서도 상당히 강하게 반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김)강문호 목사는 수감 중에 고문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립만세를 있는 힘껏 외쳤다고 한다. 또 복역 중 노역을 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응하지 않고 "내가 왜 너희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 하냐?"고 강하게 반항하셨다고 한다.

%7BIMG:6%7D-복역을 마치고 목회자가 된 것인가?

김)그렇다. 목사로 임직된 이후에도 민족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고, 항상 일본 경찰․헌병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수시로 가택수색을 당하시기도 했다, 일제의 창씨개명을 끝까지 반대하는 등 계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지속적인 일경의 감시 속에 사역이 어려워지자, 그는 고향 제주에서 남은 생애 복음을 전하기로 서원하고 한림교회에 부임했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종료되어 형편이 풀리자, 다시 그에게 동역을 원하는 권유가 반복되었지만,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켜, 한림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제주교회가 항일운동에 어떤 일들을 벌였나

김)일제 강점기 시대가 오랜 시간 지속되다 보니 항일운동의 뜻이 점점 쇠하여진 것 같다. 하지만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모습을 보면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예장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기 위해 모인 총회자리에 제주노회와 경남노회만 참석 거부를 밝히고 당시 총대였던 이도종 목사와 김계공 장로가 참석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두 분이 경찰에 취조와 구금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들이 예배드리는 것을 거부하며 교회 문을 닫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김)당시 목회자들이 타 지역으로 추방당하기도 하고 신사참배와 일본어로 예배드리라는 강요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기에 문을 닫아야 했던 암흑의 시절이 있었다.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제주의 성도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길.

김)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 남북과 한일관계가 묘한 상황이다. 신앙인들이 신앙의식을 갖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나아갔으면 좋겠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역사적 정의를 새겨보는 3.1절 100주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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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CBS 박혜진 아나운서] zzzini@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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