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부치고, 설거지 하면 끝..'무념무상' 명절이 바뀌려면

김현주 2019. 2. 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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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7)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기름떡’. 쌀가루를 익반죽해 기름에 굽고 설탕을 뿌려 준비한다. [사진 김현주]

언제나처럼 설이 돌아왔고, 늘 그래왔듯 ‘무념무상(無念無想)’ 하게 시가로 향했다. 물론 결혼 직후에는 시가의 가족관계와 명절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당황도 했고, 여느 집처럼 여자들만의 일 잔치에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50을 앞둔 나이가 되고 보니 일하는 손과 바라보는 마음 모두에 굳은살이 배겨서인지 명절에 대한 생각이나 감정이 이전만큼 강렬하지 않다.

아, 이전보다 더 빠르게 인지되는 점이 있기는 하다. 제수를 준비하고 손님들 상을 차리고 치우고 난 저녁이면, 허리가 몹시 아프고 당장 눕고 싶을 정도로 피곤하다는 것!

예민하고 이해심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다. 일생을 함께 지낼 가족에게 그런 평판을 받으며 지내고 싶은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말을 꺼내 보아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 이미 판단한 상황에서 말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일은 손이 하는 것, 불편부당함은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감내해야 하는 것, 그래서 ‘명절은 가족을 위해 며칠 몸과 마음을 내주는 기간’으로 정리했던 것 같다.

‘중년 여성의 명절’에 대해 글을 써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지난달 말 여성가족부에서 '가족 호칭에 대한 국민 생각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후였다. 시댁/처가, 아버님/장인어른, 어머님/장모님, 도련님/처남, 아가씨/처제의 차이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익숙한 것이 당연한 듯 의심도 대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게 부끄러웠다.

이런 식으로 공론화가 이루어지면, 강제할 수는 없지만 가가호호 이야기의 시작점은 되겠다 싶었다. ‘불화의 반대가 평화’라며 반쯤 감아버린 눈을 다시 떠보기로 했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B급 며느리’의 진영 씨처럼 선언적 행동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성장하는 딸을 키우는 중년의 며느리 입장에서 명절의 과정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바라보기로 했다.

70~80명 손님들의 신발들. 현관 밖으로 벗어두는 건 특별하지 않다. [사진 김현주]

제주 공항에 내렸다. 시가가 제주시에 있어 적어도 일 년에 명절 두 번은 내려온다. ‘육지 며느리’(제주도민이 아닌 며느리를 이르는 말) 입장에서 결혼한 후 처음 몇 년은 제주의 명절풍습이 쉽지 않았다. 우선 제주 말을 몰랐기에 대화의 목적과 어감의 차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폭싹 속았져(수고 많았어)”라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실 땐 지레짐작 좋은 뜻이겠거니 애매한 미소를 지었고, 기?(그래?),라고 물으시면 대충 가늠해 고개를 끄떡였다.

제사는 가가례(家家禮)라 준비하고 지내는 과정이 집안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경험한 제사와 명절은 기본적으로 규모가 달랐다. 제주에는 ‘명절 먹으러 간다’는 말이 있다. 일가친척들이 모여 종손 집, 집안 어르신 집들을 돌며 제를 올리고 각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고 나누는 풍습을 말한다.

우리 집도 얼마 전까지 시가, 큰아버님댁, 작은아버님댁, 종손댁까지 4집을 돌며 인사를 드렸는데, 지금은 제사가 아래 대로 내려오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시가와 큰아버님의 큰아주버님 댁, 이렇게 2집으로 줄었다. 모이는 인원도 놀랍다. 아버님을 기준으로 3대의 제사를 치르다 보니 한 번에 움직이는 인원이 70~80명은 족히 된다. 말 그대로 8촌까지 만나게 된다.

이렇게 명절은 가히 제주도의 ‘괸당문화’를 확인하는 자리라 할 수 있다. 괸당은 친인척을 뜻하는 제주어로, 돌보는 무리라는 뜻의 권당(眷黨)에서 비롯된 말이다. 육지의 친척이 혈연관계를 의미한다면 제주도에서의 괸당은 혈연관계를 넘어서 지연, 학연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괸당문화는 척박한 땅에서 역사적으로 핍박받아온 제주인끼리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건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해가자는 제주만의 독특한 공동체 문화다. 그래서인지 제주에서는 설이나 추석이 되면 수 십명의 괸당들이 서로의 집을 찾아가 명절 제를 지낸다.

‘떡 하러 간다’는 말도 있는데, 잔치 규모의 상차림을 명절 때마다 해야 하니 음식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집 안 여성들이 일시에 모여 품앗이처럼 음식 준비를 함께 하는 것을 이른다. 명절 전날이면 십여 명의 집 안 여자들이 주방과 거실을 꽉 채우며 전을 부치고, 고기를 굽는다.

그 외에 제사가 진행되고 먹고 치우는 과정은 아마 다른 지역과 비슷하리라(여성이 준비한 음식을 남성이 차리고 제사를 지내며, 남성이 상을 받고 식사를 하는 동안 여성은 주방에서 상을 차리고 설거지하는 것 말이다).

전, 고기젓갈 등 제수에 올릴 음식들이 하나씩 쌓이기 시작한다. [사진 김현주]

이 모든 과정이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까? 여성의 입장에서 말이다. 갓 결혼한 20~30대 며느리, 십 년 넘게 이 과정을 경험한 중년의 며느리, 그리고 누구보다 오랜 세월 이 과정을 준비해 오신 어머니는 각각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제주에 머무는 동안 조심스럽게 몇 분께 물었다.

“결혼한 후 제사 차림을 좀 단출하게 줄여보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더라구요. 새 며느리가 들어와서 상이 바뀌었다, 이런 말 듣는 게 마음에도 걸리고, 남편 입장도 생각하게 되고. 그래도 매년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꿔 보려고 해요. 남편도 점점 더 많이 도와주는데 어르신들이 놀라기는 하죠.”

“처음에 시집와서는 나도 당황했지. 우리 집 제사와 많이 다르더라구. 같은 제주인데도 말이야. 하긴 제사는 집안마다 하는 방식이 다르니까. 힘이 들기는 하지만 지금은 부모님 입장도 이해되고. 우리 딸들이 결혼할 때는 달라지겠지 않겠어? 어쨌든 명절은 가족이 마음먹고 모이는 자리고, 누구나 즐거워야 하잖아. 그렇게 바뀌도록 해야지.”

“제사는 정성이야. 가족들 무탈하고 잘되라고 조상께 인사드리는 거니까, 몸은 힘들지만 마음으로 준비해야지. 외지 며느리들은 힘이 들긴 할 거야. 그래도 이게 제주식이니까 이해해야지. 나도 이제 힘이 들지, 매년 점점 더. 그래도 어쩌겠어, 해야지.”

제사 전 떡과 전, 젓갈, 과일 등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차리고 있다. [사진 김현주]

내려가는 비행기에서 읽었던 중앙선데이 김영민 서울대 교수의 『설이란 무엇인가』란 인터뷰가 기억났다.

“중요한 건 죽은 사람은 음식을 안 먹는다는 것이고, 명절이란 산 사람들이 권력관계를 확인하는 자리라는 것이죠. 술을 누가 먼저 따르고 전을 누가 부치느냐는 오래된 권력이 원기를 회복하는 작업이랄까.”

가족의 틀과 가풍을 유지하기 위한 의례! 그것을 위해 여성이 가사노동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사실 명절 자체는 즐거운 날일 수 있다. 비록 “제사 때문에 가사노동이 두 배로 늘어나고 여성들만 음식 만들기나 상 차리기에 고생해야 하고 어느 여성이 명절을 좋아하겠습니까”라며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명절을 없애달라는 청원이 올라오는 때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핵가족 시대, 각자의 일상이 바쁘다는 이유로 가족이 다 함께 모일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명절이야말로 오랜만에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함께 식사하며 정을 나눌 수 있는 흔치 않은 자리다. 그러니 명절의 의례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편함을 고쳐가는 게 필요하다.

남자 어른들을 위해 가장 먼저 상을 차린다. [사진 김현주]

마침 지난 1월 제주 여성가족연구원이 ‘성 평등 문화확산을 위한 제례의 방향’에 관해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명절 때마다 제례를 차리기 위해 제주에 내려가는 입장인지라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제사(기제사, 차례, 종교의례 포함)를 지내거나 이에 참석하는 제주도 거주 만 30세 이상 기혼 성인 남・여 401명을 대상으로 1:1 면접조사(조사 기간 2018년 11월 2일~11월 18일,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 4.9%Point)를 진행했는데 인식의 차이가 눈에 띄었다.

제례와 관련해서는 남성과 60대 이상이 더 경직된 성 역할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여성과 30대는 상대적으로 성 역할 고정관념과 변화에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제사의 기능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 인식이 더 많지만, 부정적 인식도 다수 존재했는데, 구체적으로 인간의 근본을 깨우치게 하는 제사의 교육적 기능, 조상을 잘 섬기면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제사의 기복적 기능, 집안의 친목 도모 기능, 친족공동체의 결속 기능에 대하여 남성과 60대가 더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사가 어떻게 변화하길 바라느냐는 질문에는 봉사 대수의 감소, 더 이른 제사 시간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제사의 지속을 원하는 비율이 그렇지 않은 비율보다 더 많았지만 이러한 경향은 남성과 50대 이상에서 더 강하게 나타났으며, 여성과 40대 이하는 제사의 지속을 원하지 않는 비율도 40% 이상 나타나 여성과 다음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제사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례와 성 불평등 인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제사를 성 불평등한 문화로 바라보는 인식이 29.7%로 나타났고, 성 불평등한 영역으로는 시장 보기와 음식 만들기, 청소 및 설거지가 지목되어 주로 여성이 부담하고 있는 가사노동에 대한 문제가 지속해서 제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성은 여성의 가사노동 부담에 대해 공감을 같이하면서도 이러한 공감이 실질적 참여나 성 불평등 인식으로는 이어지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이 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사와 명절을 가족의 즐거운 이벤트로 만들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의 역할에 대한 공유가 필요하며, 특히 주로 여성이 부담해왔던 가사노동을 남녀가 함께 부담할 수 있는 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

제례가 끝나고 나면 제수 음식과 잔치 음식을 올려 식사 대접을 한다. [사진 김현주]

“양성 평등한 설 명절 함께 보내요. 설 먹거리 온 가족이 함께 준비해요. 오순도순 온 가족이 함께 즐겨요.”

제주 시내버스 안에서 본 캠페인 문구 등 다행히 이런 움직임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보이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결국 이런 이야기를 자주 나누다 보면 올해보다 내년이 나아질 것이고, 점차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명절이 되지 않을까.

“엄마, 나 이번 제주도에서 보낸 시간이 100점 만점으로 치면 몇 점인 줄 알아? 99점! 정말 재미있었어.”
13살 딸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건넨 말이다.

‘그래, 엄마도 명절이 조금씩 더 재미있어지길 바라. 그래서 언젠가는 무념무상이 아닌 잔뜩 기대를 가지고 내려올 수 있도록 말이야.’

김현주 콘텐트 크리에이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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