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22] 2년간 목숨 건 항해.. 유럽의 중심을 대서양 해변으로 옮겼다

리스본/송동훈 문명탐험가 입력 2019. 1. 31. 03:05 수정 2020. 11. 17.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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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상징 제로니무스 수도원

벨렝(Belém) 지역은 리스본이라는 왕관의 한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빛나는 다이아몬드다. 포르투갈이 세상의 바다를 지배하던 16세기에 수도 리스본은 유럽의 중심이었다. 항구는 수많은 배로 북적였고, 시장은 동방에서 온 진기하고 값비싼 물건들로 가득했다. 세상의 바다를 누비며 역사를 개척해 나가고 있는 강인한 뱃사람들과 유럽 전역에서 동방의 물건을 사들이기 위해 몰려온 상인들로 리스본 거리는 넘쳐났다. 활력과 부의 도시 리스본. 엔히크 왕자(Henrique o Navegador 1394~1460년)가 그토록 염원했던, 리스본을 베네치아를 대신하는 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꿈은 이뤄졌다! 한때 지중해 패러다임의 변방에 놓였던 투박했던 중세 도시는 그들이 개척한 대서양 패러다임의 최전선에서 화려한 르네상스의 도시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그 진취적이었던 시절의 유산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1755년 11월 1일 리스본을 덮친 대지진 때문이다. 대지진에 뒤이은 화재와 쓰나미는 도시의 절반을 폐허로 만들었고, 최소 1만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강력한 정치가 폼발 후작(Marqués de Pombal 1699~1782년)의 지도하에 리스본은 빠르게 정상을 되찾고, 도시는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탄생됐지만 그때의 모습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대항해시대의 중심지였던 벨렝 지역만은 지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 살아남았다. 불행 중 다행이다. 대재앙조차도 대항해시대를 상징하는 제로니무스 수도원만큼은 우리에게 남겨놓았으니.

대항해시대의 상징인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웅장한 모습.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이 가져다준 부의 산물로, 마누엘왕과 그의 후손들이 잠들어 있는 영묘(靈廟)이기도 하다.

영웅들이 영면한 제로니무스

벨렝은 리스본 중심가에서 테주(Tejo)강을 따라 대서양으로 향하는 외곽이다.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은 그 벨렝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리스본뿐 아니라 포르투갈을 통틀어 가장 화려하고 상징적인 곳이다. 후기 고딕 건축을 새롭게 해석한 포르투갈 특유의 마누엘 양식으로 지어졌다. 제로니무스가 여느 고딕 건축물보다 화려하고 이국적인 이유다. 들어가는 입구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인파에 밀려 가장 먼저 들어가게 되는 곳은 성당이다. 외관뿐 아니라 내부도 장중하고 사치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다른 성당들과 확연하게 다른 점은 입구의 양옆에 놓인 두 개의 관이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특이한 배치다. 관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왼쪽은 바스쿠 다가마(Vasco da Gama 1460년경~1524년)의 관이고, 오른쪽에는 카몽이스(Luís Vaz de Camões 1524~1580년)가 누워 있다. 바스쿠 다가마는 뱃사람이다. 그는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뱃길을 개척했다. 이 수도원 자체가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는 사실상 이 수도원의 창조자다. 카몽이스는 시인(詩人)이다. 포르투갈의 셰익스피어다. 그는 대항해시대를 노래했다. 카몽이스의 시를 통해 그 시대는 인류의 기억 속에 길이 남을 전설이 됐다. 그 전설의 시작에 항해왕 엔히크가 있었다면, 클라이맥스에 바스쿠 다가마가 있다. 그는 어떻게 인도로 갔을까?

바스쿠 다가마의 관. 기도하는 모습은 그가 위대한 뱃사람인 동시에 산티아고 기사단원이었음을 나타낸다.

바스쿠 다가마 인도에 닿다

1497년 7월 9일 토요일. 아침이 밝자 벨렝 앞으로 펼쳐진 해안가로 사람이 몰려들었다. 친지와 친구를 배웅하거나, 역사적인 항해를 직접 보기 위해 리스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바스쿠 다가마가 자신의 뱃사람들을 이끌고 해안가를 향해 행진하자 환호성이 터졌다. 행진이 바다와 땅이 맞닿은 곳에 이르자 일순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무릎을 꿇었고 고해성사를 올렸다. 떠나가는 뱃사람들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지켜보는 모든 이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바로스·João de Barros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 역사가) 왜 울었을까? 이 항해의 역사적 의미가 주는 감격과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오버랩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 항해의 목표는 인도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10년 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돌며 예감한 '인도로 가는 길'의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 이들에게 주어진 소명이었다. 150~160명에 달하는 뱃사람이 4척의 배에 올라탔다. 바스쿠 다가마의 기함(旗艦) 가브리엘호를 필두로 탐험대는 테주강을 따라 대서양으로 나아갔다. 기수를 남쪽으로 돌린 탐험대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내려갔다. 카나리제도(7월 15일)를 거쳐 케이프 베르데 제도(7월 26일)에 도착한 탐험대는 8월 3일 항해를 재개했다. 이때 바스쿠 다가마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던 기존의 항해 루트를 버리고 먼 대서양을 향해 서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미쳤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과감한 시도였다. 이유는 항해에 유리한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목적지는 남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 그렇게 망망대해를 갈라, 시대와 인식의 한계를 깨며 바스쿠 다가마의 탐험대는 나아갔다. 무더운 적도, 거친 바다, 치명적인 괴혈병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11월 4일 희망봉에서 멀지 않은 세인트헬레나만(灣)에 도착했다. 무려 93일간의 원양 항해.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37일)을 압도하는 항해였다. 포르투갈은 자신들의 항해술, 조선술, 관측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했음을 증명했다. 폭풍을 뚫고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나아간 바스쿠 다가마의 탐험대를 맞이한 것은 인도양 전역에 펼쳐진 거대한 무역 네트워크였다. 동아프리카는 선진적인 이슬람 문명의 땅이었다. 모잠비크(Mozambique), 몸바사(Mombasa)를 거쳐 말린디(Malindi·1498년 4월 14일)에 도착한 탐험대는 최종 목적지인 인도 코지코드(옛 캘리컷)로 가는 길을 아는 현지 도선사를 구할 수 있었다. 탐험대는 계절풍을 타고 바람같이 나아가 코지코드에 도착했다(1498년 5월 20일). 북아프리카에 최초의 해외 영토인 세우타를 정복한(1415년) 이래의 꿈, 인도로 가는 길을 드디어 개척한 것이다.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다

남부 인도의 교역 중심지인 코지코드는 신천지였다. 후추를 비롯한 고가(高價)의 아시아 물산들이 넘쳐났다. 당시 코지코드의 지배자 사모린(Zamorin)은 바스쿠 다가마가 선물이랍시고 가져온 조잡한 유럽 물건들에 대해 코웃음을 쳤지만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코지코드의 교역을 장악하고 있는 무슬림 상인들은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포르투갈 탐험대의 출현이 갖는 의미를 냉철하게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동남아~인도양~중동을 통해 유럽으로 가는 기존 교역로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이 될 터였다. 그들의 적의(敵意)로 코지코드와 무역협정을 맺는 데 실패한 바스쿠 다가마는 급하게 귀환길에 올랐다. 현지 사정에 무지했던 탐험대는 계절풍이 아프리카에서 인도 쪽으로 불어오는 8월 말에 출항했다. 결과는 대참사. 아라비아해를 건너는 데만 무려 3개월 가까이 걸렸다. 수많은 선원이 괴혈병으로 쓰러졌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바스쿠 다가마 일행은 아프리카를 돌아 리스본으로 되돌아왔다(1499년 9월 9일). 그들의 배에는 후추를 비롯한 동양의 물품이 가득 실려 있었다. 막대한 이익은 희생을 잊기에 충분했다. 온 포르투갈이 환호했다. 전 유럽이 경악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년 10월)에 이은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구세계의 종말이었다.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을 본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는 바스쿠 다가마의 업적을 기려, 그가 인도를 향해 출발했던 벨렝 해변에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세우라 했다(1501년). 이 건물은 100년에 걸쳐 건설됐고, 대재앙으로부터 살아남았다. 오늘날 벨렝을 찾는 모든 이는 눈앞에 장려하게 펼쳐진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감동할 것이다. 감동할 수밖에 없게 지어졌다. 그러나 참된 감동은 역사상 가장 도전적이고 진취적이었던 한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의 행위로부터 우러나오는 것 아닐까? 건물이 결과라면, 행위는 원인이므로.

[대항해 출발지엔 '벨렝탑'… 수도원만큼 화려한 건축물]

벨렝 지역의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벨렝탑. 마치 강인하고 도도한 한 척의 배와 같다.

벨렝 지역에 있는 대항해 시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건물은 벨렝탑(Torre de Belém)이다.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마누엘 1세에 의해 지어졌다(1514~1520년).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를 향해 출발한 그 지점에 세워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로 떠나는 포르투갈 범선들은 이 탑에서 출발했고, 이 탑으로 돌아왔다. 벨렝탑은 역사적인 의미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지만 화려함은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뒤지지 않는다. 탑 곳곳이 대항해 시대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그리스도 수도원의 상징인 사각형 십자가로 장식돼 있는 것도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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