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흐름 못읽는 빅토리아 시크릿.. 트랜스젠더 모델에 사과

심윤지 기자 2018. 11. 1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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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트랜스젠더를 무대에 세워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쇼는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플러스사이즈 모델을 위한 TV광고 제작을 시도해봤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왜 패션쇼 무대에 트랜스젠더와 플러스사이즈모델을 세우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이 회사 최고마케팅책임자(CMO) 에드 라젝이 직접 밝힌 이유다. 트랜스젠더와 플러스사이즈 여성은 ‘아름답지 않은 존재’로 묘사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라젝은 이후 “경솔한 발언”이었다며 사과했다.

미국 뉴욕에서 지난 8일(현지시간) 열린 ‘2018년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서 패션모델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빅토리아 시크릿 최고마케팅책임자(CMO) 에드 라젝은 지난 9일(현지시간) 패션전문매체 보그 인터뷰에서 ‘브랜드 차원에서 다양성을 확보할 계획이 있냐’는 취지의 질문을 받았다. 최근 여성의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신체 긍정(body positivity)’이 속옷 업계 화두로 떠오른 상황에서도 ‘여전히 마른 백인 여성 모델만 고집한다’는 비판에 입장을 물은 것이다.

그는 트랜스젠더나 플러스사이즈모델을 쇼에 세우는 것을 고려해봤지만, 빅토리아시크릿 패션쇼는 “42분짜리 엔터테인먼트”고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광고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고 답했다. 다양한 체형의 여성 모델을 광고 모델로 내세우는 경쟁사들을 두고는 “작은 경쟁업체들이 잡음(noise)을 만들어내려고는 하지만 여전히 빅토리아시크릿의 단일 품목 판매량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라젝의 발언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상에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여성속옷 전문 블로그 ‘란제리 애딕트’의 운영자 코라 헤링턴은 “빅토리아 시크릿은 80세 남성이 소유하고 70세 남성이 운영한다”며 “여성과 젠더, 트랜스젠더와 플러스사이즈모델에 대한 이들의 구시대적인 관점이 빅토리아 시크릿을 갈수록 더 나쁜 브랜드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라젝은 “경솔한 발언”이었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트랜스젠더 모델을 캐스팅할 계획이 있다면서도, 지금껏 성사되지 않은 것은 “젠더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포토샵을 하지 않는 광고로 인기를 끌고 있는 아메리칸이글의 속옷 브랜드 ‘에어리’
임신한 모델을 비롯해 다양한 체형과 인종을 가진 모델을 무대에 세워 언론의 큰 관심을 받은 가수 리한나의 ‘펜티X새비지’

빅토리아 시크릿은 전세계 여성 속옷 업계 1위 업체다. 시장 점유율은 전체의 3분의 1에 달한다. 날씬한 체형의 모델을 앞세운 화려한 패션쇼, 관능적 디자인의 속옷이 브랜드의 성장을 견인했다. 지난 8일 뉴욕에서 열린 ‘2018년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서도 지지 하디드, 켄달 제너같은 유명 모델들이 대거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라젝의 호언과는 달리, 빅토리아시크릿은 최근 급격한 실적 부진을 겪고 있다. 올 한해에만 20개 매장(지난 8월 기준)이 매출 하락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모기업 L브랜드의 주가는 2015년부터 3년간 72%,올 한해에만 43%가 감소했다. 2016년 의류와 수영복 사업을 중단하면서 큰 손실을 본것이 일차적 원인이다.

그러나 달라지는 시대 흐름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도 나온다. 온라인매체 쿼츠는 “지난 10년간 여성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 트렌드는 여성의 권리 신장과 신체 긍정이었다”며 “대부분의 여성 뷰티·의류 업체가 이를 받아들였던 반면, 빅토리아 시크릿은 섹시한 여성 마케팅에 끈질기게 매달렸고, 지난 20년간 같은 광고를 반복해왔다”고 말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브라렛’ 류의 편한 속옷이 업계의 화두가 떠올랐을 때도 관련 제품 출시에 소극적이었다. 현재도 이 회사의 주력 상품은 여성의 가슴을 커보이게 하는 몸매 보정용 속옷이다.

2014년 빅토리아시크릿이 시작한 ‘완벽한 몸매’ 캠페인은 여성들에게 비현실적인 신체관을 강요한다는 비난에 직면해 광고 문구를 ‘모두를 위한 몸매’로 수정했다.

반면 경쟁자들은 ‘다양성 마케팅’을 확대하며 빅토리아 시크릿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아메리칸이글의 속옷브랜드 ‘에어리’는 포토샵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광고로 인기몰이 중이다. 포브스는 시장조사기업 유로모니터을 인용해 최근 5년간(지난해 기준) 빅토리아시크릿의 시장 점유율은 28.8%까지(2%포인트) 줄어든 반면, 같은 기간 에어리의 시장 점유율은 2.3%(0.4%포인트)로 늘었다고 보도했다. 가수 리한나의 속옷 브랜드 ‘펜티X새비지’도 패션쇼 무대에 임신한 모델을 비롯한 다양한 체형의 모델을 기용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라젝은 ‘섹시한 모델이 입는 속옷’이라는 이미지가 빅토리아 시크릿 고유의 브랜드 정체성이라는 입장이다. 그는 앞서 보그 인터뷰에서 “우리가 리한나와 같은 쇼를 한다면 분명 끌려다닌다(pandering)는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델들이 노력 끝에 얻은 날씬한 몸매를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마른 체형에 대한 비하”(skinny shaming)일 수 있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실수요자인 여성 소비자들 사이에서 빅토리아시크릿의 인기는 예전같지 않다. 시장조사업체 유고브에 따르면 18~49세 여성을 대상으로 한 브랜드 인식 조사는 2013년 이후 꾸준히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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