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화구 안엔 신비한 연못, 태양은 불타며 바다로

2018. 10. 1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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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 중산간 가을 여행
중산간 오름 샘물은 생명수
멧돼지 놀이터 금악리 벵듸못
이효리가 석양 보던 금오름

선교사가 일군 성이시돌 목장
목장 내 우유테마 카페 '우유부단'
몸매 좋은 말처럼 매끈한 정물오름

[한겨레]

금오름의 백미는 정상의 분화구와 그 한 가운데 있는 금악담이다.

육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다도인 제주도는 ‘삼재도’라고도 불린다. 삼재란 수재, 한재, 풍재를 말한다. 물, 추위, 바람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많아서 나온 말이다.

내 기억에 물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없다. 그러나 물이 귀한 중산간 지역 한림 출신인 나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 몇 시간씩 걸어가 물을 길어오는 게 일상이었다. 오죽했으면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게 양동이에 물을 채우는 일이었겠는가? 추위는 옷을 더 껴입거나 불을 피워 이겨내고, 태풍 때문에 무너진 것들은 다시 일으켜 세우면 되었지만 귀한 물 찾기는 예부터 제주도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생명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하지만 물을 구하기가 힘들어 삼재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제주도엔 우리나라의 연평균 강수량보다 훨씬 많은 비가 내린다. 그런데 먹는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화산회토(화산재 토양)와 기반암으로 이루어진 제주의 토양 특성 때문에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지표면에 물이 고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주의 한천은 늘 사막처럼 말라 있다. 비가 한번 제대로 내리면 마치 용이 지나가는 듯 엄청난 물줄기가 하천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곧 지하로 스며들어 암석 틈이나 해안가에서 용천수로 솟아오른다. 제주의 마을이 대부분 해안가에 있는 것도 물 찾기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뱅듸못 전경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진 중산간 지역일수록 물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소중한 것이었다. 용천수를 기대할 수 없는 중산간 사람들은 주로 빗물을 모아 생활수로 사용했다. 간혹 중산간 지역 오름 주변에 샘물이 있어서 생명수 노릇을 했다.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오름 주변 샘물에서 물을 길어 사용했다. 물을 긷는 데 사용한 항아리가 그 유명한 ‘물허벅’이다. 먼 길을 가 길어 와야 했기에 허벅은 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주둥이를 좁게 만들었다. 물을 찾아 몇 시간 거리를 왕복해야 했던 우리 어머니 시절의 이야기가 불과 몇십 년 전 일이다. 제주의 생수가 불티나게 팔리는 지금 시각에서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는 물과 관계가 깊은 중산간의 작은 마을이다. 금악리는 옹기종기 모인 키 작은 가옥들 사이로 굴곡진 팽나무와 고즈넉한 돌담길이 보이는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 풍경을 품고 있지만, 마을 중앙에는 다른 중산간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커다란 연못이 있다. 애월읍 하가리 ‘연화못’ 다음으로 큰 ‘벵듸못’이다. 넓은 물을 뜻하는 이 못은 옛날 한라산에 살던 멧돼지들이 내려와 땅을 헤쳐서 습지를 만들어 놀던 자리를 물통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6세기부터 사람들이 벵듸못 주위로 자리를 잡고 우마에 물을 먹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빨래하고 목욕을 할 정도로 맑아 이웃 마을인 저지, 봉성 등지에서도 이곳까지 찾았다.

금오름

평화로운 벵듸못 뒤로 금악리의 랜드마크인 금오름이 의젓하게 가부좌를 틀고 있다. 금악리에는 크고 작은 오름이 9개가 있는데, 금오름은 그중에서도 으뜸인 오름이자 제주 서부를 대표하는 중형 오름이다. TV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에서 이효리가 아이유와 함께 석양을 감상하기 위해 방문한 오름으로도 유명하다. 표고 427.5m, 비고 178m로 20여 분이면 정상을 탐할 수 있다. 금오름의 백미는 단연 분화구다. 남북으로 봉우리가 있고 동서로는 낮은 타원형의 분화구로 깊이가 52m에 이른다. 분화구 가운데에는 금악담(今岳潭)이라는 산정호수가 있는데, 호수라기보다 작은 연못에 가깝다. 규모는 작지만 산 정상에서 만나는 물은 신비로움 그 자체다. 분화구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 비양도, 수월봉, 산방산 그리고 한라산까지 제주 서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억새가 분화구 곳곳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완연한 가을이 왔음을 알려준다. 금오름을 좀 더 아름답게 느끼려면 석양 시간에 찾는 것이 좋다. 붉게 불타오르며 바다로 향하는 해에 비치는 제주 서부의 풍경은 마치 인상파 화가 모네의 작품처럼 몽환적이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금오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생이못’이다. 금오름 초입에 있는 연못으로 자주 말라서 생이(새)나 먹을 정도의 작은 못을 뜻하는데, 오름을 오르거나 지나는 사람들이 이용하던 식수로, 4·3사건 당시엔 오름에 피신한 사람들의 생명수 역할을 한 소중한 물이었다.

성이시돌 목장에서 말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다.

금오름을 오르는 길은 두 개가 있는데 숲길과 아스팔트 길이다. 과거에는 아스팔트 길을 이용해 정상까지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금지돼 있다. 금오름의 속살을 느끼기에는 숲길이 좋다. 오르는 길에 삼나무, 고사리, 소나무, 억새 등이 바람에 흔들리며 손짓한다.

금오름 정상에서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넓은 초원에서 소와 말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는 풍경이 보인다. 성이시돌 목장이다. 1961년 11월 아일랜드에서 온 고 임피제 신부(본명 패트릭 제임스 맥글린치·P James McGlinchey·1928~2018)가 중산간 지역 황무지를 개간해 초지를 만들었다.

성이시돌 목장의 소 떼.

파란 눈의 선교사가 멀고 먼 화산섬에 와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바람과 돌로 가득한 자신의 고향 아일랜드였다. 오랜 시간 대국에 약탈당하고, 목숨 바쳐 독립 투쟁을 벌여야 했던 아일랜드의 운명이, 억압과 소외로 ‘탐라’라는 고유의 이름마저 잃어야 했던 제주의 하늘에 그대로 비친 것이다. 그는 제주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황무지를 개간해 풍요의 목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스페인 성인 이시돌의 이름을 따 목장명을 지었다. 지금은 16만5000㎡ 터에 젖소, 한우, 경주마를 키우고 있다.

이시돌은 1110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농부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부지런하고 마음이 맑은 농부였다. 그가 밭에서 일할 때면 천사가 와서 도와주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세상을 떠난 지 450여 년 뒤인 1622년에 성인이 되었으며, 농민들이 주보 성인으로 받들고 있다.

목장 내에 있는 우유테마 카페 ‘우유부단’은 이시돌 목장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다. 성이시돌 목장과 사회적 기업 ‘섬이다’가 공동으로 만든 카페로, 성이시돌 목장에서 생산되는 유기농 우유와 수제 아이스크림, 밀크티 등을 판매한다. 여유롭게 들판에서 노니는 말들을 바라보며 맛있고 건강한 음료를 마실 수 있다. 우유부단은 ‘인생 샷’ 장소로 유명한 건물 ‘테시폰’과 이웃해 있다. 2000년 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동남쪽의 고대 도시 ‘테시폰(크테시폰·Ctesiphon)’의 건축양식을 바람이 많은 아일랜드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1961년 임피제 신부가 아일랜드와 비슷한 자연환경의 제주에 들여왔다. 물결치는 아치형 지붕이 마치 동화 속 건물 같다. 처음에는 목장 내 숙소 건축으로 사용되다가 이후에는 돈사(돼지우리)로 이용되었다.

테시폰

이시돌 목장의 가축들을 살찌운 건 금악리의 사람들과 넓은 들판이라면 생명수가 되어준 것은 정물오름의 ‘정물샘’이다. 성이시돌 젊음의 집과 이웃해 있는 정물오름은 오름 바로 앞에 ‘정물샘’이 있어 이런 이름을 얻었다. 정물샘은 쌍둥이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는데, 혹자는 안경처럼 보인다고 하여 ‘안경샘’이라 부른다. 이 샘은 수량이 풍부하고 수질이 깨끗해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한경면 중산간 마을 사람들까지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정물샘은 사람뿐만 아니라 소와 말을 비롯한 수많은 동물에게도 소중한 물이었다.

표고 466.1m, 비고 151m로 남서쪽의 가파른 경사를 타고 올라간 오름은 정상에서 둥글게 봉긋 솟아오르고 북서쪽을 향해 완만하게 뻗어 내리고 있다. 마치 몸매 좋은 말처럼 매끈한 곡선을 하고 있다. 금오름과 이시돌 목장의 유명세에 비해 오름을 찾는 사람은 드물다. 20여 분만 오르면 쉽게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오르는 길에는 억새가 많아 가을을 느끼기에 좋은 오름이다. 정상에 오르면 산방산과 송악산이 한눈에 잡히고 저 멀리 한라산까지 그윽하게 보인다.

정물오름

높은 가을 하늘 아래 오름이 있고 오름 발밑에는 넓은 초원에서 여유롭게 노니는 소와 말이 있다. 목장 주변에는 억새들이 살랑살랑 부드럽게 흔들리고 여행객들은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긴다. 한때 척박한 땅의 상징이었던 제주, 그곳에서도 오지로 불렸던 중산간 마을 금악이지만, 생명과 삶을 유지하고 지켜준 물 그리고 제주인들의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풍요로운 가을 풍경이다.

금악리
제주시 한림읍 금악로 2

금오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산1-1

이시돌 목장
제주 제주시 한림읍 산록남로 53

우유부단
우유부단의 이름은 ‘優, 넘칠 우’ ‘柔, 부드러울 유’ ‘不, 아니 부’ ‘斷, 끊을 단’으로 ‘너무 부드러워 끊을 수 없다’ ‘우유를 향한 부단한 노력’이라는 뜻이 있는 카페. 제주 제주시 한림읍 금악동길 38 064-796-2033

정물오름
제주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산52-1

글·사진 문신기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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