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지역 리포트] 탐라의 오랜 땀, 눈부신 대지 예술로 피어났다

제주=주미령 기자 2018. 9. 12.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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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손이 빚은 제주 밭담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종달리 일대에 검은색을 띤 현무암으로 만든 밭담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성산일출봉 주변 바다와 밭들을 띄엄띄엄 비추는 구름 사이로 비친 햇살과 밭담의 조화가 그림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용의 꿈틀거림이 끝없이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해서 ‘흑룡만리(黑龍萬里)’로 이름 붙여진 제주 밭담은 실용적인 차원을 넘어 제주의 미학을 대표하는 문화경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제주도 제공
지난해 열린 제주 밭담축제에서 화려한 빛깔의 등산복을 차려 입은 관람객들이 밭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제주 밭담축제에선 아름다운 가을 풍광을 즐길 수 있고 독특한 농경문화도 체험할 수 있다. 제주도 제공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할 즈음 창밖을 바라보면 한라산 자락 아래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검은 물결을 볼 수 있다. 마치 용의 꿈틀거림이 끝없이 계속되는 형상을 보는 듯하다. 이름하여 ‘흑룡만리(黑龍萬里)’. 검은색을 띤 현무암으로 만든 밭담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모습이 흑룡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흑룡만리로 일컬어지는 ‘제주 밭담’은 2013년 우리나라의 중요농업유산에 지정된데 이어 2014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중요농업유산은 농업인이 지역 환경에 적응하면서 100년 이상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룬 결과물을 지칭한다. 여기에는 농업적 토지 이용, 전통적 농업과 관련돼 육성된 문화·경관·생물다양성 등 보전유지 및 전승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전통적 농업활동 시스템이 포함된다.

제주 전체적으로 돌담의 총길이는 3만6000여㎞, 이중 밭담은 2만2000㎞에 이른다. 거의 지구 둘레의 반이 넘는 길이다.

제주에서도 밭담의 원형이 잘 보존된 곳은 조천읍과 구좌읍 등 북동 지역이다. 화산회토(화산재나 그 밖의 화산분출물로 이뤄진 토양)로 이뤄진 북동쪽 지역에는 돌이 많아 밭담이 오밀조밀한 것이 특징이다. 구좌읍 하도리·김녕리·월정리·행원리 등이 대표적인 제주 밭담의 원형 보전지역이다.

매년 제주 밭담축제가 개최되는 구좌읍 월정리에는 제주밭담테마공원이 있다. 제주도가 제주 밭담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밭담테마공원’에서 관광객들은 다양한 형태의 밭담을 관람·체험할 수 있다.

특히 성산일출봉의 장관과 아름답기로 소문난 구좌읍·성산읍의 밭담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성산읍 종달리는 밭담길로 유명하다. 또한 바다에서 날아온 모래가 섞여 흙이 다른 지역보다 밝은 색을 띠는 김녕리·월정리는 돌담의 검은색이 두드러져 경관이 뛰어나다.

1000년의 제주농업문화를 간직한 밭담

삼다의 섬 제주에서 돌은 극복의 대상이자 소중한 자원이었다. 화산섬 제주는 태생적으로 돌이 많은 지형적 특성을 갖고 있다. 돌이 많은 토지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돌을 골라낼 수밖에 없었다. 척박한 제주의 농업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지혜였다.

제주인들은 토양에서 골라낸 돌을 일정공간에 쌓기 시작했다. 표토층이 가볍기 때문에 비바람에 돌이 드러나는 대로 계속 치워야했고, 이 돌을 이용해 강한 바람을 막고 화산회토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밭담을 쌓았다.

밭담은 농작물과 토양관리 기능을 수행하다 소유권을 구분하는 경계용 기능이 추가됐다. 가족단위 소규모 공동체가 경작과정에서 나온 돌을 밭 주위에 쌓으면서 형성된 밭담이 밭과 밭 사이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된 것이다.

밭담에 경계용 기능이 부여된 계기는 1234년 제주판관 김구의 지시에 의해서다. 그는 재산권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밭담을 일종의 관습법상 소유권의 상징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자신의 농토를 나타내는 차원에서 ‘밭담 쌓기’가 본격적으로 행해지게 됐다.

밭담은 경작지의 주변 여건과 토양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쌓아졌다. 쌓는 방법에 따라 외담(한 줄 담), 접담(두 줄 담), 잣담(넓게 쌓은 담), 잡굽담(밑은 작은 돌, 위쪽은 큰 돌로 쌓은 담) 등으로 불려진다.

밭담의 구조적 특성은 기공이 많은 현무암 중 비교적 둥근 돌을 골라 쌓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밭담의 중간중간에는 틈새가 많이 생긴다. 이 틈새는 태풍 등 강풍이 불 때 바람을 통과시켜내는 작용을 해 밭담이 여간해서 무너지지 않게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태풍에 시멘트 담벽은 무너져도 밭담이 끄떡하지 않고 버티는 이유다.

제주의 전통 농업시스템이 된 밭담

바람이 강한 제주의 특성상 밭담은 전통 농업시스템의 중요한 축을 형성했다. 강한 바람은 작물을 쓰러뜨리고, 집중호우는 토양을 유실시키는 원인이 됐다. 밭담은 바람을 완화시키고, 토양유실을 막아내는 역할을 함으로써 열악한 농업환경을 이겨내는 수단으로 작용해왔다.

밭담의 높이는 제주인의 농토에서 재배작물을 선택하는 주요한 고려사항이기도 했다. 밭담이 낮은 경작지에는 감자·당근과 같은 키 작은 작물, 밭담이 높은 밭에는 조·보리 등이 재배됐다.

이처럼 제주 밭담은 악조건의 농업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독특한 농업시스템으로 군림해 왔다. 제주도는 밭담이 제주의 농업을 지켜온 버팀목으로서 농업적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제주의 미학을 대표하는 빼어난 문화경관으로 평가받게 되자 제주연구원과 함께 제주 밭담에 대한 자원조사와 도록 발간, 관리방안 마련 등 ‘제주 밭담의 원형 보존관리 및 활용 종합계획’을 수립·추진해 오고 있다.

양두환 제주도 친환경농업정책과장은 “제주 밭담은 이제 제주의 미학을 대표하는 문화경관, 생물다양성의 매개물, 미래관광의 핵심코드로 주목받으며 농촌관광 활성화와 지역주민의 소득을 창출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제주 밭담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관광자원화를 위해 밭담 민박, 밭담 푸드, 밭담 트레일 등 콘텐츠를 활용한 다양한 상품개발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 제주의 가을 즐기고 문화 체험하러 오세요
15일부터 이틀간 밭담축제

제주 밭담의 가치와 의의를 전국화·세계화하기 위해 열리는 ‘제주 밭담축제’는 제주도와 제주도농업유산위원회가 주관하는 제주의 대표적 가을축제다. 2015년 시작돼 올해 4회째를 맞는 제주 밭담축제는 오는 15∼16일 양일간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제주밭담공원에서 마련된다.

제주의 아름다운 가을 풍광과 독특한 농경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축제에서는 밭담 쌓기, 굽돌 굴리기 등의 체험 활동을 통해 밭담이 갖고 있는 우수한 과학기술·창의성·역사성 등을 배울 수 있다. 또 밭담 콘서트, 맷돌 바리스타 카페, 현무암 비누 만들기, 돗통시(제주 전통 변기) 체험 등 다양한 상설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이밖에 각종 경연프로그램 참여는 물론 마을 주민들이 제주 식재료를 이용해 정성스럽게 준비한 풍성한 먹거리도 맛볼 수 있다.

참가자들이 제주갈옷을 입고 직접 작물을 캐고 모종을 심는 밭농사 체험과 제주산 농산물을 이용해 음식을 만드는 밭담푸드 콘테스트 역시 해를 거듭할수록 인기를 더하고 있다. 축제기간 운영되는 밭담 브랜드 홍보관과 제주전통 농기구 전시관은 젊은 세대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기성세대들에게 추억을 선물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제주의 전통 도시락 ‘동고량’을 들고 밭담길을 걷는 ‘제주 밭담길 걷기’는 전문 해설사와 직접 걸으며 밭담의 유래와 특징 등을 직접 듣고 공연도 함께 볼 수 있다. 밭담길 걷기는 축제 기간 모두 5회 운영될 예정이다. 축제 사전 참가 신청자들에게는 프로그램 북, 전통도시락 ‘동고량’이 들어있는 선물 꾸러미 등이 제공된다.

가족들과 밭담길 걷기 체험을 위해 올해 축제 사전신청을 한 김영민(33·서울시 마포구)씨는 “제주도 여행 중 명승지의 경치만큼이나 곳곳에서 만나는 돌담에 눈길이 머물러 이번 축제에 참여하게 됐다”며 “무엇보다 제주만의 매력을 담은 천년의 숨결 제주 밭담이 후손들에게 잘 계승되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제주도농업유산위원회 관계자는 “제주 밭담은 제주 사람들이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면서 지켜온 생명의 역사 그 자체”라며 “허술해 보이지만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쓰러지기는커녕 미동도 없는 제주 돌담은 바람의 방어막이 아닌 바람의 통로로 바로 ‘소통의 힘’을 보여주는 제주문화의 한 단면”이라고 평가했다.

제주=주미령 기자 lalij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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