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유물 2000만점 통째로 소실.. 브라질 정부는 속수무책

인현우 2018. 9. 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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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국립박물관 대화재

1818년 설립… 미주 최대 박물관

英 대영박물관 비견할 만한 규모

소방시설 제대로 작동 안 돼

다급히 주변 호수 물 끌어쓰기도

테메르 대통령 “모두에 슬픈 날

200년 연구자료 다 잃어버렸다”

리우데자네이루=로이터 연합뉴스

200년 전 설립된 이래 남미 자연사ㆍ고고학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현재도 1만1,500년 전 인류의 뼈 화석을 비롯해 브라질의 국보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브라질국립박물관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현지에서는 정부의 예산 삭감과 관리 부실이 참사를 불렀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2일 오후 7시30분경(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킨타다보아비스타 공원에 위치한 브라질 국립박물관 건물 전체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3일 오전(한국시간 3일 오후)까지도 화재의 원인 조차 확인되지 않았고, 인명 및 재산피해도 명확히 집계되지 않았다.

그러나 브라질 언론은 최소 2,000만점에 이르는 역사적 소장품 대다수가 소실 또는 손상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브라질 국립박물관은 1818년 설립된 브라질 역사상 가장 오래된 과학연구소이며, 미국의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비견할 만한 미주 최대 규모 박물관 중 하나였다. 브라질의 역사와 남아메리카의 자연사를 보여 주는 유물과 화석, 연구자료 등이 몽땅 불타버렸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다만 무척추 동물 관련 전시품은 불길을 피했다고 현지 언론은 보도했다.

미셰우 테메르 브라질 대통령은 이날 소식을 접한 후 자신의 트위터에 “모든 브라질인에게 슬픈 날이다. 국립박물관의 소실은 숫자로 계산할 수 없다. 200년의 작업과 연구자료, 지식을 모두 잃어버렸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브라질 정부의 이런 태도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오랜 경제위기와 정치 불안으로 인해 핵심 박물관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된 관리 지원이 없었다는 것이다. 국립박물관에서 일하는 교수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청소비용을 대야 했다는 현지 언론 보도까지 있었다.

이 박물관의 루이즈 두아르치 부관장은 브라질 글로부TV에 출연해 그간 집권한 여러 브라질 정권이 박물관 유지보수에 무관심했다며 격렬한 비판을 가했다. 두아르치는 “탄생 200주년인 지난 6월 행사에 단 한 명의 연방장관도 참석하지 않았다. 보존에 충분한 예산을 얻기 위해 여러 정권과 싸워 왔지만, 이제 보존해야 할 것들이 완전히 파괴됐다”고 한탄했다. 특히 박물관이 최근에야 브라질개발은행(BNDES)과의 계약을 통해 화재 방지 설비 예산을 마련, 10월 대선 이후 집행할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끔찍한 역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화재를 막기 위한 주변 소화시설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지 못했다. 리우의 소방청장 로베르투 로바다이는 가장 가까운 소화전 2개에 물이 공급되지 않았고, 다급히 주변 호수 물을 끌어다 진화에 나서야 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건물이 오래 됐고 옛 장서 같은 불에 타기 쉬운 소장품들이 잔뜩 들어 있어 불길을 잡는 데 어려움이 더 컸다”고 밝혔다.

특히 테메르 정부 들어서 대규모 예산 삭감의 1순위는 교육ㆍ과학 분야였고, 연방 리우데자네이루대학 산하에서 운영되던 브라질국립박물관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브라질 역사가 아나 루시아 아라우주는 테메르 정부가 국립박물관 관리 예산을 2017년 3,400만헤알(93억5,000만원)에서 올해 500만헤알로 삭감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화재 현장에 시민 수십 명이 모여 경악 속에 화재를 지켜 보면서 정부의 긴축정책과 극심한 부패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전소된 브라질국립박물관은 올해 6월 탄생 200주년을 맞은 유서 깊은 기관이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주앙 6세가 남미 지역의 과학적 연구를 주도할 목적으로 1818년 왕립박물관을 설치한 것이 분리독립과 공화제 혁명 이후까지 이어졌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박물관 중요 소장품은 대부분 브라질 황실의 소장품에서 비롯됐다. 고고학 부문에서 브라질에서 발굴된 유물과 함께 이집트ㆍ그리스ㆍ로마 등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고, 자연사 부문에서는 남미 최대 박물관이었다.

소장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루지아(Luzia)’라 불리는 1만1,500년 전 구석기 시대 여성의 유골이다. 1975년 브라질 중남부에서 발견된, 미주에서 가장 오래 된 유골 중 하나다. 1784년 바이아주 벤데구(Bendego) 강가에서 발견됐다는 이유로 ‘벤데구’란 이름이 붙은 초대형 운석 또한 대표 유물인데 무게가 5,260㎏에 이른다. 남미 원주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보여주는, 안데스 산맥 일대에서 발견된 미이라와 유물은 물론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묻힌 고대 로마 도시 폼페이의 벽화 등도 대표 소장품으로 꼽혀왔다.

불에 탄 건물 자체도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에서 브라질의 독립과 공화혁명에 이르기까지의 근대사를 증언하는 건물이다. 박물관이 입주한 상 크리스토방 궁전은 1808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포르투갈 왕가 전체가 브라질로 망명을 왔을 때, 엘리아스 안토니우 로페스라는 상인이 왕실에 거소로 바친 건물에 기원을 두고 있다. 1822년 포르투갈 왕자 페드루가 브라질 제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페드루 1세 황제로 즉위한 후에는 황제의 관저 역할을 했다. 이후 포르투갈의 여왕이 된 마리아 2세와, 브라질 2대 황제가 된 페드루 2세도 이 건물에서 태어났다. 1889년 브라질 공화혁명으로 페드루 2세가 축출된 후에는 잠시 제헌의회 건물로 사용됐으며, 다른 곳에 있던 국립박물관이 1892년에 입주해 오늘에 이르렀다. 두아르치 부관장은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다. 200년치의 유산, 기억, 과학, 문화, 교육의 기록이 통째로 사라졌다”고 개탄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소방관이 브라질 국립박물관 건물의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뿌리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AP 연합뉴스
브라질 국립박물관에서 발생한 화재에 손상을 입기 전 급히 꺼내 온 현미경을 비롯한 내부 장비가 건물 앞에 쌓여 있다. AP 연합뉴스
소방대와 박물관 직원이 브라질 국립박물관 내에 있는 물건을 꺼내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로이터 연합뉴스
멀리서 본 브라질 국립박물관 화재 현장. 리우데자네이루=로이터 연합뉴스
화재가 나기 전 브라질 국립박물관. 고문서 수집가 인큐나불라 트위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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