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형 칼럼] 재벌총수의 일과 운명

김세형 2018. 5. 2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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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상선 기자

[김세형 칼럼] 구본무 회장을 조문하면서 영정사진을 바라보니 약간 위를 응시한 시선은 눈동자를 살짝 감췄다. 눈을 반쯤 감은 듯 염화시중의 미소가 흘러있었다. 유머감각도 풍부했던 그는 애써 남의 단점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단추구멍만큼 작게 뜨고 살았나 싶다. 십여 년 전 그의 곁에 앉아 저녁을 먹은 날이 딱 한 번 있었고 나는 딱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LG그룹이 구씨와 허씨로 나뉘면서 (재산)싸움이 전혀 벌어지지 않았는데 그 비결이 무엇이었는가요?"구회장은 주저없이 답했다. "좀 손해를 보면 되지요. 해달라는 대로 해줬지요" 그날 밤 만찬 시 화제가 끊길 만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가지씩 풀어놓아 모두를 웃고 떠들게 해줬다. 저녁을 마치고 떠나갈 때 일일이 배웅하며 본인은 가장 늦게 떠난 장면도 재벌총수의 행동치고는 나의 기억에 남았다.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서 열린 고(故) 구본무 LG 회장의 발인식에서 구 회장의 영정이 보이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그는 재벌총수로서의 삶에 몇 가지 기록을 남겼다. 수사를 받거나 재판 후 사법처리된 일이 없다. 계열사가 망해 정부에 손을 벌린 적도 없다. 그리고 한국인의 평균수명에 비해 10년 전 짧은 생을 살았다. 그리하여 재벌4세 시대를 LG가 가장 먼저 열게 했다. 기술상, 과학인상이 아닌 의인상(義人賞)을 제정해 상금을 주는 것도 독특하다.

신문은 그가 25년간 LG그룹을 이끌면서 회사 외형을 30배 키웠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지주회사 1호로 지배구조를 단순화시켰다. 기록이 말해주는 시대이니 그게 가장 간명하게 평가기준일 터다. 매출액 30조 회사를 1995년에 물려받았는데 160조 외형으로 키웠다는 것이다. 훌륭하지만 아마존 구글 등에 견주면 초월적 경지를 넘진 못했다.

사람들은 가장 비교하기 쉬운 향년을 보고 그러다 보니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나이도 다시 셈해보게 되고 한 세대를 거슬러 이병철 회장의 수명도 따져봤으리라. 모두가 70대였다.

정주영, 신격호 회장 등의 경우 수명이 더 길었으나 끝이 안 좋았다. 잭 웰치가 회장의 임무 중 30%는 후계구도를 명쾌히하는 일이란 명언이 생각난다. 현재도 정신이 또렷하지 못하다는 총수도 더러 있으니 일찍 그 과제를 마친 구본무정신을 본받을 일이다.

구 회장의 타계를 계기로 (재벌)회장의 삶(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창업자와 2대는 인생의 절반을 함께 뛴다. 삼성, 현대가에서 보듯 1, 2세가 흥망의 책임을 같이 진다. 그래서 그들은 성공하면 사회가 알아준다. 한때 빌 게이츠가 시애틀에 아마도 지구상에서 최대 호화저택을 짓고 사는 데 대해 미국 사회가 떠들썩한 적이 있다. 그의 저택은 아마 서울대캠퍼스보다 넓을 것이고 큰 성을 방불케 하는 저택들 영화관 수영장 등등을 시민들이 손가락질했다. 큰 소리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내 사회가 타협을 보고 잠잠해졌다.

세계 1등 기업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본인이 맨주먹으로 창업했으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거였다. 미국에선 황금주(Golden share)를 발행케 해 그 주식 한 주만 들고 있어도 다른 주식을 아무리 갖고 와봐야 주총 대결에서 이길 수 없게 특혜를 준다. 이 마법의 조건은 창업 1세대에 한해서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스마트폰 발명으로 이 세상을 바꿔놨다. 그의 부인과 딸(Lisa)은 애플에 다니지 않는다.

이제 한국의 재벌 3, 4세 문제를 보자. 그들은 1, 2세와 달리 미국 유학에 귀공자로 온실에서 자란다. 그들은 맨손으로 개척한 게 아니라 물려받았다. 비범한 능력을 지녔을 터이지만 대중들은 증명해 보이라고 한다. 그들은 유복하게 자랐지만 능력은 미지수다.

그런데 가장 무섭게 그들을 짓누르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아버지를 능가하는 업적을 쌓아야 한다는 숙명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포스 왕도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친 명군주였다. 그러나 알렉산더 전기를 읽어보면 "아버지를 능가하는 업적을 쌓고 말리라"는 결의로 머릿속을 꽉 채웠다. 알렉산더는 세상을 정복한 후 열병으로 33세로 단명했다.

한국은 특히 등수로 평가하는 사회다. 과거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재벌총수들을 부르면 꼭 순위대로 자리를 배정하고 신년 시무식을 할 땐 재계총수들을 매출액 크기로 일렬종대로 세워놨다. 신규 사업을 줄 때도 그 순서는 이마에 붙은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녔다. 반드시 등수를 끌어올리고 말리라. 총수들 간 경쟁심리, 질투심은 처절하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일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정주영 현대회장이 "이병철 그 꾀돌이가 하는데 반드시 현대도 해야 한다"고 물불 안 가리고 따라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가. IMF 사태 때 30대 그룹의 절반이 망하고 2008년 금융위기 때 휘청한 그룹이 지금도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래도 총수들이 그런 천로역정을 감행한 것은 정치와 경제가 같이 간 때문이다. 즉 대통령과 권력에 친해야 IT 분야나 자금 배정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긴 세월 동안 이렇게 쌓인 스트레스가 총수들의 육신과 영혼을 악마의 맷돌에 집어넣은 것이리라.

그러나 4차 산업혁명 입구에서 세상은 이제 변했다. 시장도 국내가 아니라 해외가 80%를 넘는다. 청와대가, 권력이 뭘 못 하게는 훼방은 놓을 수 있어도 특혜를 줄 방법은 별로 없다. 총수 본인이 지휘하면 결정을 빨리 내리는 스피드 경영의 이점은 대우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현대차의 삼성동 사옥 프로젝트는 하나에 17조원가량 든다. 이렇게 큰 규모의 결정을 총수 한 사람이 잘 결정하는 건 위태롭다. 전문가의 시대다. 더욱이 전 세계와 맞짱 떠서 승부를 걸려면 수조, 수십조 원이 들고 거기서 패하면 세계 일등기업도 순식간에 망하는 게 무서운 현실이다. 노키아, 코닥이 그랬다.

그래서 재벌 3, 4세는 알렉산더 증후군에서 해방시켜줘야 한다. 그들이 꼭 총수 자리를 물려받아 황제도 하고 사령관도 하는 전쟁을 일생 치러야 하는가. 빌 게이츠를 보라. 그는 마이크로소프트(MS)를 설립했으나 경영에서 손 뗀 지 오래고 퀄컴의 어윈 제이컵스, IBM 창업자 왓슨의 가문도 2대까지만 경영하고 3대에는 손을 떼고 전문경영인을 내세웠다. HP, 일본의 도요타도 마찬가지다. 주식을 보유한 재산은 지키고 최고의 전문가를 데려다 경영하게 하는 것이다.

그게 패밀리의 재산도 지키고 종업원, 나아가 국가경제의 안전을 위해서 좋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한국의 상속 증여세율은 기업을 물려받을 시 최고 65%나 된다. 호주 캐나다 홍콩처럼 상속세가 0인 나라도 있고 트럼프도 미국의 상속세율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현재 일본 독일은 50%, 영국 40%, 미국 35%다. 한국인의 평등심리나 정치적 지형을 볼 때 상속세율 인하나 철폐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제벌 4세까지는 몰라도 5세에 가면 재벌의 종말이 올 가능성이 높다.

미리 사회적 합의와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놓는 게 좋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의 대기업 가운데 오너 없는 기업은 포스코(6위), KT(12위)가 있고 시중은행들이 그렇다. 이들 기업CEO는 정권이 바뀌면 늘상 낙하산 인사에 몸살을 앓는다. 모두 청와대 눈치를 보고 정치권이 인사청탁을 하면서 엉망진창이 된다.

반쯤은 공기업인 이들 대기업 형태로 한국의 재벌 거버넌스가 전부 바뀐다면 무슨 결과가 오겠는가. 그러면 아마 민노총 한노총 노조 해방구가 될 것이다. 한국은 바로 가라앉아 남미 베네수엘라나 볼리비아 짝이 나고 세계 10위권 위치는 아르헨티나보다 더 추락해 상시 외환위기로 IMF를 끼고 살 것이다.

이것은 안 된다. 유럽은 아직 사유(私有)기업 비율이 60%를 넘지만 미국은 30%도 안 된다. 대기업의 경우 월마트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미국의 경쟁력은 세계 1위다. 기업이 철저하게 이사회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벌들도 5세, 혹은 그 이전에 그렇게 제도적으로 안정시켜놔야 한다.

미국의 HP나 포드 등의 경우처럼 오너 가문은 주식 지분을 가진 재단(펀드)으로 남아 세계 최고의 사장을 골라 앉히는 일에 주력하면 된다. 문재인정부가 바로 그런 시스템 정비에 나서야 한다. 시스템을 제대로 정비해 포스코, KT가 초일류기업으로 변신하는 걸 보면 국민들이 재벌도 저렇게 해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맨날 청와대가 입김 넣고 검찰이 들쑤시고 '회장 언제 사표 내나'고 떡을 줄 낙하산을 대기시켜 놓는 풍토라면 재벌이 훨씬 낫다.

고 구본무 회장은 겸손과 인간미, 도덕성이 얼마나 큰 힘인가를 몸으로 보여줬다. 반재벌 정서가 그렇게 강한 풍토에서도 그의 생전 모습을 칭찬하는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진심으로 칭찬하고 영면을 기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사회통합에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성격이 정말이지 터프했던 스티브 잡스의 생전에 "왜 기부를 하지 않느냐"고 누군가 물었다. 이에 잡스는 "기업가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사업보다 더 큰 기부가 어디 있겠느냐"고 퉁명스레 답했다고 한다. 진정으로 본받을 프로 비즈니스맨이다. 그러나 우리 보통 인간들은 비즈니스계 초인들에게서 사업의 천재성과 훈훈한 인간미 둘 다를 보고 싶다. 구본무의 삶은 적어도 하나를 이루고 또 플러스를 남겼다.

[김세형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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