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파괴된 국가 제도, 유대인 학살 방아쇠를 당기다

김유진 기자 2018. 5. 11.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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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블랙어스
ㆍ티머시 스나이더 지음·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616쪽 | 2만8000원

아돌프 히틀러가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은 나치 독일이 점령한 소련 서쪽 지역들에서도 광범위하고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 1942년 우크라이나 크레메네츠에서 촬영된 사진에서 독일인 청년들이 유대인 노인을 길거리에 끌고 와 모욕을 주고 있다(왼쪽). 폴란드 중부 우지의 게토에서 온 유대인들이 헤움노 수용소로 이송되기 위해 열차에 오르고 있다(가운데 위). 라트비아 리가의 게토에 독일어와 라트비아어로 철조망을 넘거나 게토의 유대인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을 총살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박물관 홈페이지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수없이 연구해 온 주제를 다루는 일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20세기 최악의 비극이자 야만으로 꼽히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연구라면, 특히나 조심스럽게 접근할 법도 하다. <블랙어스>를 쓴 동유럽사 권위자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는 안전한 길을 택하지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히틀러에 빗댄 책 <폭정>(2017)으로 미국의 공공 지식인 반열에 오른 스나이더 교수는 이 책에서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직관’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나치 독일의 이데올로기는 600만여명의 유대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홀로코스트를 주동했지만, 살인자들의 상당수는 나치나 독일인이 아니었다. 또 희생자들의 대다수는 독일 밖에 살았고,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강제수용소를 보지도 못했다. 서문에서 그는 생태학적·국제적·정치적·인간적 관점에서 홀로코스트 역사를 재구성하겠다는 야심찬 시도를 밝힌다. 눈길을 끄는 것은 ‘생태학’이라는 단어다. 저자는 <나의 투쟁> 등에 나타난 히틀러의 세계관을 분석하면서 ‘유대인 절멸’이라는 끔찍한 계획이 히틀러의 생각 속에 똬리를 튼 과정을 유추한다. 히틀러는 인간 종족들이 생물 종과 거의 다르지 않으며, 종족들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끝없는 투쟁을 벌인다고 봤다. 정글의 법칙을 신봉하는 그가 보기에 유대인은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는 ‘비종족’ 내지는 ‘반종족’이었다. 유대인들은 한 지역에 정주하지 않았고, 히틀러의 눈에선 ‘더러운 사상’이었던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에서 모두 두각을 드러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자연이 입은 하나의 상처”이자 “흑사병보다 더 나쁜 유행병, 정신적 유행병”으로 간주하며, 지구의 생태 균형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해법은 단 하나, 유럽 전체에서 유대인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새로운 땅이 필요했다. 미국의 광활한 영토를 부러워했던 그는 독일 민족의 ‘생활공간(lebensraum)’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체코에 이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아프리카 대륙을 대하는 제국주의자들의 시선과 마찬가지로, 히틀러는 동유럽을 ‘아프리카’로, 그곳의 종족 슬라브인들은 열등한 ‘흑인’으로 바라봤다.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는 유대인들을 도심 속의 게토로 몰아넣었다. 저자에 따르면 “게토는 유대인을 어떤 이국적인 장소로 추방하기 전에 모아 두는 오수 저장 탱크였다”. 팔레스타인과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가 유대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킬 장소로 거론됐다. 1930년대 후반 마다가스카르 이송 계획은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영국의 저항에 부딪혀 백지화됐다.

히틀러는 1941년 6월 의기양양하게 소련을 침공했지만 추위와 작전 실패로 인해 고전했다. 소련을 단숨에 차지한 뒤 유대인들을 시베리아로 추방하겠다는 구상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치가 점령한 소련 서쪽 지역에서는 독일군과 그들의 현지 조력자들에 의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됐다. 유대인을 절멸하겠다는 나치의 ‘최종 해결’이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겨지기 전이었다.

저자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지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치른 엄청난 희생을 ‘반유대주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독일군과 함께 소련을 침공한 특수임무단이 유대인 사살을 계획했고, 현지 주민들 사이에도 유대인 혐오 정서가 팽배했다고 해도, 반년 만에 유대인 100만여명이 희생된 “학살 속도전”을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의 핵심 테제라고 할 ‘국가’의 존재 의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등장한다. 나치의 소련 점령지들은 1939년 독일과 소련이 체결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따라 소련의 지배를 받다가 불과 2년 만에 독일 치하로 들어갔다. 저자는 이들 지역은 소련과 독일에 의해 차례로 “이중 점령”을 당하면서 “국가 없는 상태(statelessness)”가 됐다고 분석한다. 소련은 국민국가를 파괴했고, 곧이어 독일은 소련이 만든 제도들을 파괴했다.

저자가 보기에 국가가 파괴된 곳에서 집단적인 유대인 학살이 가장 먼저 저질러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유대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국민국가 제도의 갑작스러운 붕괴로부터 가장 큰 위협을 받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중 점령지의 유대인들은 국가로부터 분리됐고, 시민권이 약속하는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다. “홀로코스트는 국가 파괴라는 한쪽의 극단에서 발생했고, 국가의 온존이라는 다른 쪽 극단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다.”

덴마크와 소련 점령지 유대인들의 운명이 극명하게 엇갈린 연원도 여기에 있다. “주권국가, 신념과 지지자를 갖춘 정당들, 다양한 형태의 현지 시민사회, 협조를 기대할 수 없는 경찰”이 존재했던 덴마크에서는 유대인 6000여명 중 481명만이 붙잡혔다. 구명되지 못한 덴마크 시민 유대인들 중 일부는 아우슈비츠가 아닌 체코 테레지엔슈타트의 임시 수용소로 보내져 목숨을 건졌다.

홀로코스트 역사에 관한 약 500쪽 분량(각주 제외)의 책에서 아우슈비츠를 다루는 장은 20여쪽에 불과하다. 가스실로 대변되는 강제수용소의 참혹함이야말로 나치의 만행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이미지가 아니었던가. 책은 그마저도 ‘아우슈비츠의 역설’을 지적하는 데 할애하고 있어 어떤 면에서는 당혹감을 준다. 아우슈비츠의 역설이란,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유대인들이 ‘국가 없는 지대’에 있던 유대인들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컸다는 점이다. “대다수 유대인은 아우슈비츠가 주된 학살 시설이 될 때쯤이면 그 동쪽에서 이미 죽임을 당했다. 아우슈비츠는 기억되었지만, 홀로코스트의 대부분은 대체로 잊혔다.”

이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축소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우슈비츠만큼이나 이중 점령지와 소련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을 사살한 죽음의 구덩이, 베우제츠와 소비부르, 트레블린카, 헤움노의 학살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홀로코스트를 이해하면 인류를 보전할 기회를 얻을 것”이라며 현재 우리가 기후변화나 식량 문제 등으로 인해 대량 학살이 저질러질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중국이 식량 문제에 직면해 아프리카를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전망은 아무래도 비약으로 들리지만.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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