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국부이자 독재자'..92세 마하티르의 화려한 복귀

박수현 기자 2018. 5. 1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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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의 박정희’로 불리는 마하티르 모하맛(92) 전 총리가 10일 말레이시아의 14대 총선에서 승리하며 또 총리가 됐다. 2003년 정계 은퇴 선언 이후 15년 만에 권좌에 복귀했다. 총리로 공식 취임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국가 지도자가 된다.

마하티르는 1925년 말레이시아 케다주의 주도 알로르세타르에서 태어나 싱가포르에서 의과대학을 나왔다. 이후 고향에서 개업의로 일하다 통일말레이국민기구(UMNO) 당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였다. 1964년 총선에서 당선되고부터는 상원의원, 교육·통상·국방장관, 부총리를 거치는 등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이후 1981년 7월 말레이시아의 4대 총리로 취임했다. 2003년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5차례 총리직을 연임하며 23년간 장기 집권했다.

마하티르는 말레이시아의 근대화를 이끈 ‘국부(國父)’로 평가받는다. 말레이시아를 고무·주석 등 원료 수출국에서 전기제품·철강·자동차를 생산하는 ‘아시아의 호랑이’로 탈바꿈시켰다. 중산층을 키우고 10억달러대의 부호를 탄생시킨 주역이라는 평을 받는다.

특히 1997~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는 해외 투기 자본 배척, 자본 통제와 같은 ‘경제 쇄국 정책’을 펼치며 위기를 극복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만류에도 고정환율제를 택하고 정부 지출을 대폭 늘렸다. 이후 말레이시아 경제는 물가 폭등 없이 회복했는데, 이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IMF의 외환위기 처방이 틀렸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인다.

그러나 이른바 ‘박정희 따라잡기’로 불리는 경제 정책을 펴 ‘개발 독재자’라는 혹평도 함께 받았다. 그가 시행한 ‘동방을 보라’ 정책은 강력한 통제체제를 바탕으로 인적·물적자원을 총동원해 고도의 경제 성장을 꾀하는 방식이다. 마하티르는 이 과정에서 야당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과 국가보안법 남용, 언론 재갈 물리기 등을 서슴치 않았다. 급기야 1999년에는 안와르 이브라힘 당시 부총리를 동성애 혐의로 투옥시켜 정치적 보복을 했다는 비판을 불렀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랜드마크인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 위키피디아

마하티르는 재임 기간 국제사회와도 끝없는 마찰을 빚었다. 외환위기를 겪은 후부터 이슬람 가치관에 바탕을 둔 반(反)서방 발언을 이어가며 반서방과 반세계화의 선봉장으로 변신했다. 말레이시아는 주요 이슬람 국가 중 하나로, 국민의 61.3%가 이슬람교 신자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대항하기 위해 정보기술단지인 ‘멀티미디어 수퍼 코리더(MSC)’를 조성하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던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를 세웠다.

마하티르는 2003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정계를 떠나 국내외 강연과 회고 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던 2016년 3월 한때 자신이 후견했던 나집 라작 현 총리의 비자금 스캔들이 터지면서 재임 기간 몸담은 ‘국민전선(BN)’을 걷어차고 나집 총리 퇴진을 목표로 야권에 ‘반(反)나집 연대’를 제안했다.

마하티르는 당시 “말레이시아의 명성을 되찾겠다”고 정계 복귀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해 7월 ‘신야권연합 희망연대(PH)’의 의장으로 선출된 데 이어 9월 말레이시아원주민연합당(PPBM)을 창당해 PH에 합류했다. 야권이 마하티르를 다시 전면에 앞세울 때 기존 야권 지지층인 젊은 층과 중국계의 표심이 이탈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말레이시아 다만사라에서 유권자들이 제 14대 총선 투표에 참여하고 있다. / 말레이시아 ‘더 스타’

이번 총선에서 PH는 하원 222석 중 과반인 113석을 확보했다. 나집 총리의 BN은 79석을 얻는데 그쳤다. 당초 전문가들은 이번 총선에서 마하티르가 총리에 복귀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전망했다. 13개 정당 연합체인 여권의 BN이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줄곧 집권해온 데다가, 올 3월 말 BN이 통과시킨 선거구 재획정안이 BN에 최소 10석을 늘릴 수 있도록 보장했기 때문이다. BN은 선거를 앞두고 월 소득 700달러 이하의 가정에 200달러 상당의 보조금을 주는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정책도 내놨다.

말레이시아 정치 전문가인 브리짓 웰시 터키 이펙대 교수는 이날 PH의 승리를 마하티르의 공으로 돌렸다. 수십 년간 권력을 유지하며 부정부패 의혹에 휩싸인 BN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이 마하티르의 등장으로 구체화됐다는 것이다. 웰시 교수는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마하티르”라며 “그가 중요한 ‘게임 체인저’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마하티르는 10일 새벽 술탄 무하마드 5세 말레이시아 국왕 측으로부터 야권이 승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면서 이날 중 총리 취임 선서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재임에 실패한 나집 총리에 대해서는 “그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며 “우리는 복수를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법치의 회복”이라고 했다.

마하티르 모하맛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2015년 가족들과 함께 90번째 생일을 맞고 있다. / 장남 무크리즈 마하티르 페이스북 캡처

일각에선 고령인 마하티르가 총리직에 복귀해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그의 나이 때문이다. 고령과 건강 문제 지적에 마하티르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너무 오래 남아있고 싶지는 않다”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경험이 없다”고 했다. 그는 “그들이 내가 초기 단계에 도움을 주기를 원한다”며 “2년이 될 수도 3년이 될 수도 있다. 그 후에 내가 은퇴하더라도 정부에 조언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마하티르는 금주와 금연, 식사 조절로 건강을 유지한다고 밝혀 왔다.

마하티르는 의과대에 다니던 시절 같이 의학을 공부하던 아내를 만났다. 둘은 졸업 후 결혼해 7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이 중 3명은 입양했다. 장남 무크리즈 마하티르는 UNMO 소속 당원으로 2016년 케다주 행정수반직에서 물러났다. 차남 모크자니 마하티르 역시 UNMO 출신으로, 현재 세팡 인터내셔널 서킷의 최고경영자(CEO)다. 세팡 인터내셔널 서킷은 1990년대 자동차 산업을 육성시키려 했던 마하티르의 주도 아래 세워졌다. 장녀 마리나 마하티르는 말레이시아에서 이름난 여성운동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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