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크레프와 갈레트

정영선 2018. 2. 28. 11:3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누텔라와 코코넛이 들어간 크레프
[푸드 트래블-15] 여행을 갈 때 지도를 챙겨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구글맵에 의존해 다닌다. 대도시의 웬만한 곳에선 와이파이(wi-fi)가 터지고(물론 인터넷 강국인 한국을 따라올 수 없지만) 현지에서 유심 칩을 구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터라 이젠 칩(chip)이 무거운 책을 대신한다.

파리에 도착해서 한 가게를 찾아간 나는 그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분명히 여행을 준비하면서 봤던 프랑스 여행 책엔 영업 중이라고 나와 있던 크레프 가게였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마치 야반도주라도 떠난 가족이 남긴 집처럼 휑하니 비어 있었다. 난 이곳에 오기 전에 혹시나 여행 책이 업데이트가 안 됐을까 싶어 블로거들의 후기를 찾아봤고, 내가 도착하기 일주일 전쯤 그곳을 다녀간 후기도 보고 온 터였다. 사실 약간 불안하긴 했다. 왜냐면 지하철역에 내려서 구글로 검색을 해보니 이 집의 정보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일주일 전에 다녀온 사람도 있는데….' 하지만 정보력에 있어선 역시 구글 승. 이후에 난 여행지에서 구글 신(神)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됐다.

프랑스 파리의 크레프리 수제트
두 번째로 리스트에 올려두었던 크레프를 파는 식당은 다행히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이 식당의 이름은 '크레프리 수제트'다. '크레프리(creperie)'란 프랑스에선 크레프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작은 식당이나 가판점을 부르는 이름이다. 그 앞에 붙은 '수제트(suzette)'는 크레프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데 이 얘긴 조금 뒤에서 하자.
크레프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크레프(crepe)는 밀가루와 달걀, 우유를 반죽해 둥글고 얇게 부쳐낸 뒤, 안에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만드는 음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신촌 일대에서 크게 유행했다. 당시 유행했던 건 도쿄 하라주쿠의 스타일로 얇게 부친 반죽 안에 생크림을 잔뜩 넣고 바나나, 오렌지, 딸기 등의 과일을 듬뿍 얹은 뒤 초코 시럽 등이 뿌려져 나오는 식이었다. 물론 이것도 크레프긴 하지만 프랑스의 크레프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일본식으로 발전한 '일본 크레페'랄까.

크레프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12세기께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발전된 것으로 본다. 브르타뉴는 땅이 척박해 농장물의 재배가 쉽지 않았는데 12세기께 들어온 메밀은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랐다. 메밀은 섬유소도 많고 양질의 단백질도 많은 터라 요리에 다양하게 활용됐고, 사람들은 메밀가루를 이용해 얇은 반죽을 만들어 부쳐 먹기도 했다. 이때 크레프가 발전한 것으로 본다. 이후 크레프를 메밀가루가 아닌 하얀 밀가루로 만들기 시작한 건 하얀 밀가루 가격이 저렴해져 하얀 밀가루가 대중화한 이후다.

크레프는 안에 넣는 재료에 따라 그 종류가 무궁무진한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내가 찾아간 가게의 이름이기도 한) 크레프 수제트(crepe suzette)다. 이 이름의 유래가 재밌다. 요리사가 크레프를 굽던 중에 실수로 여기에 과실주를 쏟았고 그 순간 불길이 솟아 크레프를 망치게 됐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크레프를 그대로 내게 됐는데, 그걸 먹은 황태자가 그 맛을 극찬하며 식사에 초대한 수제트 부인의 이름을 따서 '크레프 수제트'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다. 세상의 수많은 발견은 예기치 못한 실수에서 나온다. 지금도 크레프 수제트를 만들 때는 오렌지 술인 그랑 마니에르를 넣은 뒤, 알코올에 불을 붙여 조리하는 프랑베(flambee) 방식을 이용한다.

고트치즈와 바질이 들어간 갈레트
크레프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자매 제품으로 갈레트(galettes)가 있다. 크레프를 부르는 다른 이름으로 사용될 때도 있지만, 갈레트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크레프가 흰 밀가루로 반죽을 해서 실크처럼 얇고 매끄럽게 구워 낸다면 갈레트는 메밀가루로 반죽을 해서 거칠고 좀 더 두툼하게 구워낸다. 크레프가 달콤한 간식이나 디저트의 느낌이라면 갈레트는 안에 햄이나 치즈 등을 넣어 좀 더 든든한 식사의 느낌이랄까.
사과주 시드르
갈레트를 먹을 때 꼭 곁들이면 좋은 게 있다. 바로 시드르(cidre)라고 불리는 사과주다. 메밀가루를 넣어 만드는 갈레트가 유명한 브르타뉴 지방은 사과로도 유명한 지역이다. 여기서 나는 두 재료의 궁합이 좋은 건 말할 것도 없다. 상큼하면서도 청량감이 느껴지는 사과주는 메밀 반죽으로 약간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갈레트의 맛을 한결 좋게 해준다. 마치 우리가 메밀 전병에 막걸리를 곁들여 먹는 것처럼 말이다.
누텔라와 코코넛이 들어간 크레프
크레프리 수제트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크레프와 갈레트를 하나씩 주문했다. 크레프는 누텔라와 코코넛이 들어간 것을, 갈레트는 염소 치즈인 고트 치즈(goat cheese)와 토마토 쿨리(tomato coulis), 바질이 들어간 것을 주문했다. 크레프는 예상했던 딱 그대로의 맛이었고(악마의 잼 누텔라는 모든 메뉴의 맛을 똑같이 만드는 재주가 있다), 갈레트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함께 주문한 시드르와의 조화가 좋았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서울에서 갈레트나 크레프를 파는 곳은 흔하지 않지만 크레프 반죽을 한 장씩 얇게 구워 내 중간중간 크림을 발라가며 쌓아 만드는 '크레프 케이크'는 디저트 전문점이나 제과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생각난 김에 조만간 있을 누군가의 생일을 위해 크레프 케이크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정영선 요리연구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