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까지 삼킨 비트코인"..일본이 '가상통화 대국' 된 이유는

김신회 기자 2018. 1. 3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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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가상통화 '퍼스트무버' 부상..장기불황·발 빠른 규제 아래 '와타나베 부인' 선전
일본에서 최근 등장한 아이돌 걸그룹 '가상통화소녀'/AFPBBNews=뉴스1

일본이 '가상통화 대국'으로 부상했다. 연이은 가상통화 거래소 해킹 파문조차 선도국가(first mover)로서 먼저 겪는 '성장통'으로 인식될 정도다.

30일 가상통화 정보업체 코인힐스에 따르면 세계 최대 가상통화인 비트코인 거래에서 일본 엔화가 차지한 비중은 51.12% 이른다. 달러(27.77%), 원(9.43%), 유로(6.71%), 러시아 루블(0.93%)이 뒤따라 5위권에 들었다.

최근 해킹 파문을 일으킨 일본 가상통화 거래소 코인체크의 오츠카 유스케 COO(최고운영책임자)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고객층이 60대에서 20대 젊은이까지 다양하다"며 일본인들의 가상통화 투자 열기를 전했다. '2030세대'가 주축인 한국과는 사정이 다르다는 얘기다.

보수 성향이 짙기로 유명한 일본이 가상통화시장을 주도하게 된 이유는 뭘까.

①통화정책 반발

직거래 기술인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비트코인은 기존 통화체제를 부정한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 따라 움직이는 돈값에 대한 반발과 불신이 가상통화의 확산을 부채질했다.

1990년대 말 장기불황의 늪에 빠진 일본에서는 돈값의 기준이 되는 기준금리가 줄곧 0% 수준에 머물다 2년 전부터는 -0.1%로 유지되고 있다. 초저금리 기조에 예금의 매력을 잃은 일본인들은 은행에서 돈을 찾아 집에 쌓아두기 시작했다. 최근 고독사한 일본 노인들의 집에서는 현금 뭉치가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장롱예금'에 담기엔 가상통화가 현금보다 간편하다. 임금과 연금 투자 수익률이 정체된 가운데 가상통화가 안겨주는 대박 기대감은 덤이다. 일본에서 30·40대 남성을 중심으로 20대는 물론 60·70대에 이르는 고령층까지 가상통화 투자 행렬에 합류하고 있는 이유다. 최근 일본 소셜미디어에서 '미스 비트코인'으로 유명해진 후지모토 마이(32)는 돈을 모두 은행에 넣는 대신 비트코인에 투자한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②와타나베 부인

일본인들은 공공연한 돈 얘기를 금기시하지만 실제로는 투기에 열광적이다. 장기간 이어진 저금리 기조가 위험 투자를 부추겼다.

일본 개인투자자들은 특히 외환(FX) 마진거래에 적극적이다. 외환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다. 이들은 흔히 '와타나베 부인'이라고 불린다. 금리가 낮은 일본에서 자금을 조달해 해외 고금리 자산에 투자해 수익을 내는 캐리트레이드 선수들이다.

재팬타임스는 최근 데이트레이딩에 익숙한 일본인들이 외환시장에서 가상통화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가상통화의 엔화 거래 가격이 달러 거래 가격보다 높은 경향을 띠는 건 일본인들의 강력한 수요를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③마이너스 금리

장기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일본 통화당국이 경기부양을 위해 쓸 수 있는 선택지는 사실상 바닥났다. 일본은행(BOJ)은 1999년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추고 2001년엔 시중 자산을 매입해 돈을 푸는 양적완화를 시작했다. 2016년엔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다. 유례없는 극약처방의 연속이었지만 물가상승률 목표(2%)를 언제 달성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경기가 더 나빠질 경우 그나마 쓸 수 있는 대책은 금리를 더 낮추는 것인데 효과는 미지수다.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지 2년이 됐지만 소비와 투자는 기대만큼 늘지 않았다. 돈을 맡기고 되레 수수료를 내야 하는 마이너스 금리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시중에 돈이 돌지 않았다는 얘기다.

더욱이 기존 화폐 경제에서는 마이너스 영역에서 금리를 낮출 수 있는 폭이 제한적이다. 은행이 고객에게 현금 보유 비용이 넘는 수수료(마이너스 금리)를 물릴 수 없기 때문이다.

케네스 로고프 미국 하버드대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일본이 화폐를 없애면 마이너스 금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단순히 화폐 폐지를 예고하는 것만으로도 투자와 소비를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최근 고액권 폐지 논의가 부쩍 활발해졌다. 화폐의 빈 자리를 결국 가상통화가 메울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는 아직 법정 가상통화를 발행할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다만 미국, 스웨덴, 캐나다, 싱가포르 등 여러 나라의 중앙은행들이 가상화폐 발행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는 만큼 BOJ의 입장이 바뀔 공산이 크다고 본다. BOJ가 1990년대에 이미 극비로 '전자현금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와이 유코 BOJ 핀테크센터 책임자도 지금 당장은 가상통화를 발행할 필요가 없지만 인구 감소 등에 따라 환경이 바뀔 수 있다고 밝혔다.

일본에서 최근 등장한 아이돌 걸그룹 '가상통화소녀'는 지난 12일 데뷔 라이브 무대에서 "종이는 이제 끝나는구나. 시대는 디지털"이라며 화폐 시대의 종언을 예고했다.

2014년 당시 세계 최대 비트코인 거래소였던 일본 마운트곡스가 해킹 사태 속에 파산하자 투자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사진=블룸버그

④발 빠른 규제

일본이 가상통화 천국으로 부상한 건 무엇보다 정부의 발 빠른 대응 덕분이다. 일본 최대 가상통화 거래소인 비트플라이어의 가네미쓰 미도리 CFO(최고재무책임자)는 "사실상 일본은 가상통화 거래소를 규제하는 제대로 된 법체제를 가진 최초이자 유일한 나라"라고 평가했다.

일본은 지난해 4월 자금결제법 개정안을 시행했다. 세계 최초로 가상통화를 법률로 규정(결제수단)하고 가상통화 거래소 등록제를 도입했다. 2014년 당시 세계 최대 비트코인 거래소로 일본에 있던 마운트곡스의 해킹 및 파산 사태에 대한 반성이 배경이 됐다.

이런 가운데 한국과 중국의 강도 높은 규제가 일본 가상통화시장으로 투자자들을 몰아넣었다. 일본 가상통화 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비즈니스인사이더에 "지난해 가을 이후 일본에서 거래를 하는 중국인 개인 투자자가 늘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한 중국인 투자자가 돈뭉치를 가득 실은 차량을 타고 일본 가상통화 거래소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다만 지난 주말 일어난 코인체크 해킹 사태가 일본 가상통화 규제의 허점을 드러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꼬집었다.

김신회 기자 raskol@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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