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만나러 지하철역 간다? 대세가 된 '아이돌 응원 광고'

임선영 입력 2018. 1. 23. 18:07 수정 2018. 2. 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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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아이돌 광고 한해 1000건 넘어
팬이 광고주, 광고비 수백만원 모아 걸어
엑소·프로듀스101·방탄소년단 등 순위권
옥외 스크린, 버스 정류장에도 확산 추세
소비자를 넘어 '기획자'가 된 새로운 팬덤
"내 아이돌 다른 사람들도 좋아해줬으면"
지하철역 투어 다니고, '순례지도' 제작도
"건전한 취미 활동" VS "공공장소에 과해"

“꺅~도경수(엑소의 멤버)다.” 여학생 4명이 환호성을 지르며 황급히 스마트폰 카메라를 켰다. “문빈(아스트로의 멤버)은 저기 있다 저기.” 또 다른 여학생 무리는 한 명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향해 우르르 뛰어갔다. 그사이 한 여학생은 워너원의 김재환 곁에서 인증샷을 찍으며 수줍게 웃었다. 아이돌 팬미팅 현장 같은 이 곳은 ‘지하철역’이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삼성역 통로 안에서 펼쳐진 모습이다. 여학생들이 열광한 건 실제 아이돌이 아닌 ‘아이돌 응원 광고’. 삼성역 통로 벽면에 걸린 조명광고(가로 4m, 세로 2.25m) 16개 중 10개가 아이돌의 생일이나 데뷔 기념일을 축하하는 광고였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삼성역 통로 벽면에는 아이돌 응원 광고들이 나란히 걸려있다. 맨 왼쪽은 아이돌그룹 JBJ의 타카다 켄타의 생일 축하하는 광고다. 지난 21일 소녀팬들이 아이돌 응원 광고를 촬영하고 있다. 임선영 기자
두 여학생이 NCT127의 멤버 유타를 응원하는 광고를 기념 촬영 하고 있다. 임선영 기자
서울 지하철역에 ‘아이돌 응원 광고’가 급증하고 있다. 광고주는 아이돌의 ‘팬’이다. 아이돌의 생일이나 데뷔 기념일, 앨범 발매 등을 축하하기 위해 팬들이 비용을 대고 내는 광고들이다. 이런 광고가 늘면서 최근엔 문재인 대통령 생일(1월 24일) 축하 광고가 광화문역 등 10개 역에 등장해 찬반양론이 나뉘기도 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 걸린 문재인 대통령 생일 축하 광고.[ 연합뉴스 ]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1~8호선 지하철역에 걸린 아이돌 응원 광고는 1038건이었다. 2016년 400건에 비해 약 2.6배 늘었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아이돌 생일은 매월 있지 않으냐. 아이돌 광고는 비수기 없이 꾸준히 들어오는 ‘효자 광고’”라고 말했다.
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중앙일보가 서울교통공사에 의뢰해 파악해보니 지난해 아이돌 광고가 많이 걸린 지하철역 1위는 ‘삼성역’(200건)이었다. 건대역(91건)·합정역(84건)·잠실역(66건)·홍대입구역(60건) 등이 뒤를 이었다. 유동인구가 많고, 연예 기획사와 가까운 역이 인기가 좋다. 최다 광고 아이돌 1위는 엑소(94건)가 차지했다. 프로듀스 101(87건)·방탄소년단(70건)·NCT(55건)·워너원(39건) 순이었다.
지난 21일 서울 삼성역에 걸린 아이돌 광고판 앞에서 소녀팬들이 인증샷을 남기고 있다. 임선영 기자
유동인구가 많은 서울 건대역은 아이돌 광고 선호 역 중 하나다. 지난해 서울 지하철 역 중에서 삼성역 다음으로 아이돌 광고가 많이 걸렸다. 임선영 기자
서울 지하철역에 아이돌 광고가 등장한 건 2011년 무렵이다. 하나둘씩 늘어가던 아이돌 광고는 옥외 디지털 스크린, 시내버스, 버스 정류장 등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서울 시내버스 외부에 붙은 아이돌 광고 역시 증가 추세다. 서울버스운송사업조합에 따르면 2015년 77건, 2016년 111건, 2017년 153건으로 늘었다.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빌딩 스크린에는 프로듀스 101 출신 가수 사무엘의 생일(1월 17일) 축하 광고가 나왔다. [ 사진 국가대표광고 ]
아이돌 광고는 팬이 소비자에 머물렀던 ‘팬덤 문화’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팬이 주도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대중에게 알린다는 점에서다. 팬은 이제 ‘기획자’이자 ‘생산자’가 되고 있다. 지하철역 조명광고 비용은 한 달 기준 역과 위치에 따라 100만원~450만원선이다. 팬들은 한 명당 적게는 몇만원에서 몇십만원씩 돈을 낸다. 주로 광고 게재를 주도하는 팬이 팬카페·SNS·블로그 등을 통해 올리는 광고 모금 계좌에 돈을 보내는 방식이다. 광고 시안은 팬 자신이 아이돌을 가까이서 촬영한 사진으로 제작해 광고대행사에 보내는 경우가 많다.
버스 외부에 붙는 아이돌 응원광고도 증가 추세다. [ 사진 국가대표광고 ]
지난해 서울 강남구청역 버스 정류장에 붙은 배우 박해진 생일 축하 광고. [ 사진 국가대표광고 ]
아이돌 그룹 엑소의 광고비를 세 차례 댄 고교생 채모(18)양은 “단지 축하를 위해서라면 선물을 하는 방식도 있다. 그런데 공공장소에 광고를 내거는 건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인지도를 높이는 게 가장 큰 목적”이라고 말했다.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이 성행하면서 광고를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응원하는 현상은 더욱 가열됐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 새로운 팬덤 현상의 핵심은 ‘자기주도성’이다. 더 이상 팬은 아이돌 문화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인기의 부속물이 아니다. 하나의 문화 현상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내가 좋아하는 대상(아이돌)을 다른 사람도 좋아하라고 설득하는 심리의 발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실제로 지속적으로 얼굴(광고)을 보게 되면, 친밀감이 생겨 대상에 호감을 갖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심성욱 한양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광고의 파급력을 경험한 세대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홍보에 광고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12월 서울 학동역에는 방탄소년단의 멤버 진(김석진)의 생일 축하 광고가 걸렸다. [ 사진 서울교통공사 ]
서울 합정역에 걸렸던 워너원 강다니엘의 생일 축하 광고. [사진 서울교통공사 ]
케이팝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해외 팬들도 내는 광고도 늘고 있다. 한 광고 대행사 관계자는 “아이돌 광고의 광고주 20~30%정도가 해외 팬이고, 특히 중국팬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11월 엑소 찬열의 생일에 맞춰 중국팬들이 한국 버스, 옥외 광고판, 극장 등에 낸 광고비는 수천만원에 달했다”고 덧붙였다.

아이돌 광고가 있는 지하철역은 팬들에게 ‘투어 코스’로 떠올랐다. 아이돌의 광고가 있는 지하철역 ‘순례 지도’를 제작해 SNS에 올리는 팬들도 있다. 21일 삼성역에서 만난 중학생 최가은(16)양은 이날 강원도 홍천군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최양은 “워너원 이대휘의 광고가 걸린 지하철역을 돌아보려고 왔다. 이제 합정역·이태원역이 남았다”고 말했다.

한 팬이 제작한 워너원 강다니엘의 지하철역 광고 위치 지도. [ 사진 디시인사이드 ]
경기도 성남시에서 온 중학생 김모(15)양은 “아스트로 문빈의 광고가 걸린 역삼동 버스정류장에 다녀왔고, 삼성역을 봤으니 선릉역에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중학생 윤모(16)양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광고판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게 유행처럼 됐다”고 말했다. 삼성역 역무원 윤모(50)씨는 “주말과 방학 땐 하루에 150명 안팎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서울 역삼동 버스 정류장에 걸린 아스트로 문빈 응원 광고. [ 사진 독자 제공 ]
지하철역 아이돌 광고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직장인 고모(55)씨는 “중학생 시절 가수 혜은이에 팬레터 10통을 쓴 경험이 있다. 같은 마음이 표현 방식만 새로워진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직장인 김해린(33)씨는 “건전하고 자기만족도 높은 취미 활동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반면 고교생 자녀를 둔 김현욱(49)씨는 “요즘 문제가 되는 연예인 조공의 연장선 아니냐. 어른들의 상업 논리에 애들만 휘둘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인 진철범(28)씨는 “공공장소인 지하철역에 아이돌 광고가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을 해왔다. 개수 제한을 두고, 많은 이들에게 의미있는 공익광고의 수도 늘려야한다”고 했다.
지난 21일 서울 삼성역에 걸린 아이돌 응원 광고를 지나가는 한 시민이 바라보고 있다. 임선영 기자
전문가들은 ‘인물 광고’에 대한 적절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곽금주 교수는 “인물 광고는 주목도가 높아 과도하면 시민들의 피로감이 커진다”고 말했다. 구정우 교수는 “공공장소의 인물 광고에 대해선 논란과 부작용을 예방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 필요가 있다. 특히 정치인 광고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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