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에도 촌스럽고 맥락없는 '아재패션' 바람.. 추해도 좋아 '고프코어' 신드롬

김은영 기자 2018. 1. 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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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 바지에 등산 재킷, 두꺼운 운동화… 추할수록 돋보이는 ‘고프코어’ 신드롬 럭셔리 패션계에서도 촌스럽고 맥락없는 ‘아재 패션’이 인기 발렌시아가, 베트멍, 버버리, 구찌 앞장 서… 독특함 찾는 밀레니얼 세대 호응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거 같고… 요즘 패션은 다 왜 그렇죠?”

얼마 전 미팅 자리에서 한 마케터가 말했다. “제대로 된 옷이 없어요. 아무리 길거리 패션이 유행이라지만, 이건 너무 심한데요.” 그가 투정을 늘어놓는 덴 이유가 있다. 먼저 최근 발행된 명품 브랜드의 2018년 봄·여름 광고를 살펴보자.

발렌시아가의 2018 봄·여름 남성복 화보(왼쪽)과 ‘버버리 x 고샤 루브친스키’의 광고/사진=각 브랜드

발렌시아가의 2018 봄·여름 남성복 화보에는 낡고 큼직한 아노락(anorak·방한을 위해 입는 허리길이의 재킷)과 바람막이 점퍼, 투박한 운동화를 신은 모델들이 대거 등장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빛바랜 사진을 보는 듯 촌스러운 컬러와 어벙한 실루엣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영국 클래식의 대명사 버버리는 브랜드의 유산인 체크 무늬와 트렌치코트를 과감히 비틀었다. 버버리는 러시아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와 함께한 협업 컬렉션에서 트렌치코트와 해링턴 재킷(Harrington jacket∙허리와 손목에 밴드가 들어간 남성용 재킷), 낚시 조끼와 체크 반바지 등을 새롭게 해석했다. 이제껏 보아온 명품의 권위나 정통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 투박하고 둔탁한 아웃도어 패션, ‘고프코어’가 뜬다

‘고프코어(Gorpcore)’가 뜨고 있다. 고프(Gorp)는 그래놀라(Granolas), 귀리(Oats), 건포도(Raisins), 땅콩(Peanuts)의 머리글자를 딴 약자다. 트레킹이나 캠핑을 갈 때 먹는 견과류 간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웃도어 의류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파타고니아의 플리스(Fleece·양털) 집업 재킷, 노스페이스의 바람막이 점퍼, 낚시 재킷, 투박한 등산화, 테바 샌들, 힙색이라 불리는 패니 백(fanny back) 등이 고프코어 룩을 대표한다.

고프코어는 3년 전 유행했던 놈코어(Normcore·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스타일)의 연장선상으로 해석된다. 놈코어가 일상복을 ‘무심한 듯 시크하게’ 착용하는 것이었다면, 고프코어는 정장와 셔츠에 플리스 집업 점퍼를 입거나, 양말에 스포츠 샌들을 신 듯 패션 따윈 관심 없이 실용성만 추구하는 ‘아재 패션’에 가깝다. 그런 탓에 고프코어에는 ‘어글리 프리티(Ugly Pretty·못생긴 게 패션이 됐다는 뜻)’, ‘안티 패션(Anti fashion·반 패션)’ 등의 수식어가 따른다.

베트멍 2018 봄·여름 컬렉션, 스커트에 투박한 등산 점퍼를 입거나 정장에 바람막이 점퍼를 입는 식의 부조화로운 ‘고프코어’ 룩을 선보였다./사진=베트멍

뎀나 바잘리아가 디렉팅한 발렌시아가의 2018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은 고프코어 룩의 정석을 보여준다.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셔츠와 선명한 색상의 아웃도어 재킷, 바짝 올려입은 배바지와 투박한 신발까지, 그야말로 패션 테러리스트가 따로 없다. 뎀나의 개인 브랜드 베트멍은 어떤가. 일반인을 모델로 캐스팅해 길거리에서 촬영한 2018 봄·여름 컬렉션은 맥락 없이 옷을 마구 입혀 놓고, 패션모델처럼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하도록 해 촌스러움을 배가시켰다.

구찌도 빠질 수 없다. 2018 프리폴(Pre-Fall) 컬렉션에서 구찌는 광택 있는 원단과 구찌의 GG로고가 선명히 들어간 화려한 의상에 투박한 양말과 등산화를 매치해 고프코어 트렌드에 올라탔다.

운동화 시장도 코프코어가 대세다. 아디다스의 스탠스미스처럼 매끈하고 날씬한 운동화에서 둔탁하고 못생긴 ‘아저씨 운동화’로 유행이 옮겨지고 있다. 아디다스가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와 협업한 ‘오즈위고(Ozweego)’, 역시 아디다스가 뮤지션 칸예 웨스트와 만든 ‘이지 러너(Yeezy Runner)’, 리복이 베트멍과 손잡고 만든 ‘인스타 펌프 퓨리(Insta Pump Fury)’, 발렌시아가의 ‘트리플S(Triple S)’ 등이 인기를 끈다.

베트멍과 리복이 협업한 운동화 ‘인스타 펌프 퓨리’, 투박한 모양새가 특징이다./사진=베트멍 인스타그램

◆ SNS 시대, 장인정신보다 개성 찾는 소비자들… 못생겨도 좋아, 매력만 있으면

고프코어라는 엉뚱한 패션의 유행을 이끈 건 하이 패션 브랜드다. 이미지로 소통하는 SNS 시대,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해도 모자랄 판에 의도적으로 촌스러운 패션을 선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밀레니얼 세대가 주류 소비자로 편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발렌시아가와 베트멍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는 최근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하이패션의 변화를 언급했다. 그는 “럭셔리가 바뀌고 있다”며 “하이패션은 품질과 장인정신에서 독창성에 중점을 두는 추세다. 젊은 세대들은 전통적인 브랜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뛰어난 완성도보다 눈에 띄고 특별한 무언가를 찾고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발렌시아가는 지난해 이케아의 장바구니를 패러디한 가죽 가방과 삭스 슈즈 등 실험적인 제품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밀레니얼 세대로부터 높은 지지를 얻었다. 케링 그룹에 따르면 발렌시아가의 고객 65%가 밀레니얼 세대며, 매출의 50% 이상이 이들에게서 나온다. 발렌시아가는 지난해 11월에는 미국 쇼핑 검색 플랫폼 리스트(Lyst)가 선정한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스커트 정장에 MLB 모자와 등산화를 매치한 구찌 2018 프리폴(Pre-Fall) 화보./사진=구찌

트렌드 정보 회사 PFIN의 이라희 수석연구원도 고프코어의 ‘독특함’을 고프코어의 인기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SNS가 일상인 젊은이들에게 차별화된 이미지로 관심받고 싶어 하는 욕구는 독특하고 낯선 것을 넘어 못생긴 이미지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는 국내 젊은이들이 익선동과 성수동 등 오래된 골목을 찾아다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서울대학교 김난도 교수가 집필한 트렌드 코리아 2018은 소비자들이 개성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두면서 매력 있는 상품을 찾는 경향을 짚었다. 김 교수는 “자신만의 확실한 개성이 있다면, 심지어는 못생겨도 매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고프코어 트렌드를 살피다 보니 익숙한 장면이 떠오른다. 아웃도어 붐이 절정에 달했던 2010년대 중반, 도심에서도 여행지에서도 고기능성 등산복을 일상복으로 입어 눈총을 샀던 우리네 중장년 층의 모습이다. 그들이 즐겨 입던 패션이 최신 유행으로 돌아오다니 격세지감이다. 하지만 아무리 유행이라도 아줌마·아저씨처럼 입을 순 없는 법. 이라희 PFIN 연구원은 “스커트와 셔츠, 정장 바지에 등산 재킷이나 두꺼운 운동화, 패니 백 등을 매치하면 센스있는 고프코어 룩을 완성할 수 있다”며 “고프코어는 추하게 연출할수록 더 멋지다”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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