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지나 재소환된 '건방진 계집들'

2018. 1. 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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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신여성 도착하다'-

[한겨레]

‘9월의 매력’(1933년 <신여성> 표지) 권진규미술관 제공

‘ARRIVAL(도착)’이라는 단어가 적힌 들머리 계단을 지나 전시장에서 처음 맞닥뜨리는 것은 나혜석의 삽화 <저거시 무어신고>(1920년 <신여자>)이다. 외투를 입고 바이올린을 든 단발의 ‘신여성’을 손가락질하며 남자들은 숙덕인다. “아따 그 계집애 건방지다. 저것을 누가 데려가나” “그것 참 예쁘다. 장가나 안 들었다면… 맵시가 둥둥 뜨는구나” 한켠에는 호기심과 동경, 또 한켠에는 비난과 훈계가 착종된 남성들의 시선 속에서 고개를 살짝 숙인 여성. 그것은 지난 20세기 초반 각종 대중매체와 예술작품에 등장했던 ‘신여성’의 상징적 모습이다.

나혜석의 <저거시 무어신고>(1920년 <신여자>)
안석주의 만평 ‘여성선전시대가 오면’(1930년 <조선일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여성 도착하다’는 잡지 등 각종 인쇄물과 회화·조각·자수·사진·영화 등을 통해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사회를 풍미한 신여성의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전시는 3개의 틀로 짜여져 있다. 잡지 표지·삽화, 대중가요, 영화 등에서 다뤄지거나 남성예술가들이 묘사한 ‘신여성 언파레-드’, 근현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나혜석·김명순·최승희·주세죽·이난영 등 5명의 신여성을 오마주한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선보이는 ‘그녀가 그들의 운명이다’ 세가지다.

기생 김영월의 사진. 연도미상. 부산박물관 제공

1부 ‘신여성 언파레-드’에선 교육받은 여성, 서구화된 외모와 사치스러운 차림새, 자유연애주의자, 살림에 대한 정보와 교양을 갖춘 현모양처 등으로 변주되는 신여성들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언파레-드는 ‘on parade’를 뜻하는 1930년대식 표현으로 당시 언론엔 인물을 나열하고 그들의 신상정보·특징을 소개할 때 언파레-드라는 말을 사용했다. <신여성> <부인> <별건곤> <여성> <만국부인> <여성조선> 등 대중잡지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주로 남성 작가들의 붓끝에서 나온 탓인지 남성들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이상적 기준이 반영돼 있다. 가령 <신여성> 1933년 9월호 표지인 ‘9월의 매력’은 기타를 곁에 두고 몸의 곡선이 드러나는 얇은 한옥을 입은 채 우아한 자세로 포도를 먹는 단발머리 여성을 담은 작품이다. 교양과 취미를 갖고 있으면서 단아하면서도 육감적인 외모, 모던함(단발)과 전통성(한복)이 혼재된 이 이미지에선 당시 신여성에 대한 혼란스러운 시선이 읽힌다. 그런가하면 당시 피어나는 대중문화의 선도자이면서도 하층민으로 천대받았던 기생들이 펴낸 잡지 <장한)(長恨)>(1927년), 경성의 카페에서 일하는 여급들의 기고문이 실린 <여성(女聲)>(1934년) 등은 자신의 사회적 권리와 위상을 확보하려는 여성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1920~30년대 음악수업을 받는 학생들. 이화역사관 제공

2부에선 사군자·서예작품 등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기생들의 작품을 비롯해 자수·공예작품, 여학교·미술학교에서 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나혜석·이갑경·나상윤·박래현·천경자의 회화 등이 전시돼 있다.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남편 김기창과 함께 12차례나 부부전시회를 열었던 박래현의 <예술해부괘도>다. 의학도들이 암기하는 해부도처럼 신체 각 부위의 각종 뼈·관절 이름이 적힌 이 작품은 신체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화폭에 담기 위해 미술학교 학생들이 어떤 공부를 했는지 잘 보여준다. 도쿄에서 유학한 나상윤의 <누드>는 화장한 얼굴 아래로 뱃살이 늘어지고 가슴이 쪼그라든 중년 여성을 여성의 눈으로 포착한 것으로 1927년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준다.

손응성의 <산보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신여성 5명을 조명한 작품 중에선 작가 김명순을 영상으로 재해석한 <나쁜 피에 대한 연대기>(김세진)가 흥미롭다. 기생의 딸로 태어나 남성 동료 작가들의 공개적인 모욕을 받으며 글을 썼던 그는 “유리관 속에 춤추면 살줄 믿고… 이 아련한 설움 속에서 일하고 공부하고 사랑하면 재미나게 살 수 있다기에 미덥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왔었다”(1924년 <조선일보> 기고문)라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다. 작가 김세진은 1951년 세상을 뜬 것으로 알려진 김명순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는 가정 속에서 김명순의 작품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시낭송하듯 묶어냈다.

박래현의 <예술해부괘도>. 조시비미술대학 역사자료실 소장
나혜석이 그린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1920년 <신여자>)

전시를 둘러보고 나면, “2017년 한국에서 신여성을 다시 불러내는 일은 ‘매우 신나지만 조금은 우울’한 일”이라는 말(김수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신여성의 급진적인 모습과 함께, 그들이 겪었고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겪고 있는 구조적 차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살림과 작품활동을 동시에 하느라 정신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나혜석 <신여자> 1920년 6월호)은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된 방황을 거듭하고 있는 21세기 여성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4월1일까지. 02-2022-0600.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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