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작침] 나는 말하고 있다 ② : 수어(手語)사전엔 국어사전 단어의 4.5%만 실려 있다

박원경 기자 2017. 11. 2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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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릿찌릿하다', '욱신거린다', '결린다'

보고 듣는데 문제가 없는 청인(廳人)은 이 단어의 의미 차이를 단박에 알아차린다. 몸이 안 좋을 때는 이런 다양한 어휘를 자유롭게 구사해 증상을 설명한다. 의사는 환자가 설명한 고통의 표현에 근거해 적절한 진단을 내린다. 만약 이 단어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사용할 수 없었다면 어떨까.

가슴이 찌릿찌릿하고, 숨이 차서 동네 병원을 찾았던 A 씨. 3개월 간 다닌 병원은 반복해서 위장약을 처방했다. 호전은커녕 증상은 악화됐다. 약이 잘못됐나 싶어 찾은 대학병원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심장에 문제가 있어 심혈관에 관을 삽입하는 스텐트 시술이 긴급하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생명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네 병원을 탓할 수도 없다. 동네 병원이 오진을 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A 씨는 농인(聾人)이다. A 씨는 동네 병원에서 '필담'으로 의사와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A 씨는 반복해서 '속이 안 좋다'고 글로 설명했다. 이 표현은 A 씨가 글로 자신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최대치였다. 이를 보고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판단한 의사는 위장약을 처방했다. 대학병원엔 A 씨의 수어를 보고 의사에게 전해 줄 '수어통역사'가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이 차이가 '소화불량'이란 진단을 '심혈관질환'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A 씨는 수어로는 '가슴이 찌릿찌릿하다'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증상을 설명할 수 있지만, 국어인 글로는 그런 설명을 하기 어려웠다. A 씨에게 국어는 학교에서 배운 외국어처럼,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국어로 쓴 글로는 자신의 증상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A 씨의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농인이 처한 현실과 문제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마부작침] 나는 말하고 있다 ① :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말, 수어(手語)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에 이어 농인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실태, 특히 '소통'과 관련한 문제점과 개선책을 집중 취재했다.

[인터랙티브 페이지 (바로가기☞)]
http://mabu.newscloud.sbs.co.kr/20171122news/

● 수어도 사투리가 있다…'표준화'와 '전문화'를 위한 한국수어사전

농인에게는 수어가 의사소통을 위한 최우선 수단이다. 그런데 수어는, 국어에선 같은 의미라도 그 표현(국어 단어 및 관용어와 같은)이 지역마다 상당히 다르다. '짜장면'은 일부 지역에서는 '다른 손을 모으고 검지와 중지를 모아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으로 표현하지만, 다른 지역에선 '검지 손가락을 코 밑에서 물결치듯 움직여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는 동작'으로 표현한다. 표현은 같은데 의미가 다른 경우도 있다. '주먹을 쥐고 얼굴 오른쪽에서 위 아래로 움직이는 동작'이 일부 지방에선 '냉면'을 뜻하지만, 인천에선 '빨리빨리'를 의미한다. 이런 차이 때문에 수어 표준화 필요성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전문 용어를 따져보면, 상황은 더 열악하다. <[마부작침] 나는 말하고 있다 ① :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말, 수어(手語)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에서 살펴본 것처럼, 전문 용어를 수어로 표현하는 수어 단어의 수가 적은 것은, 농인들의 전문 분야 진출이 부족한 데 따른 결과이면서, 동시에 농인들의 전문 분야 진출을 가로막는 한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수어를 한국의 언어로 인정하는 한국수어법이 지난해 8월 시행됐다. 수어 표준화를 위한 '한국수어사전도'도 발간됐다. 지난해 4월에는 사용 편의를 높이기 위해 수어 표현 동영상까지 담은 '한국수어사전(http://sldict.korean.go.kr/front/main/main.do)'도 오픈했다. 이런 노력으로 수어를 둘러싼 현실은 어느 정도 개선됐을까?

● 국어사전의 4.5%만 담은 수어 사전…그나마 특정 분야에 편중

수어가 하나의 언어이자,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 받은 지 1년이 3개월이 지났다. 국가가 편찬한 수어의 얼굴, 즉 '한국수어사전'을 살펴봤다. SBS <마부작침>은 인터넷 '한국수어사전(이하 수어사전)'에 등재된 어휘를 전수 분석했다. 이를 분야별로 나눠 '표준국어대사전(이하 국어사전)'에 실린 단어들과 비교했다. 한국에서 법으로 공용어 자격이 부여된 한국수어와 국어를 비교해 수어 표현의 보강이 필요한 부분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2017년 11월 현재, 수어사전에 등재된 수어 표현은 23,004개다. 이 중 인사나 대화, 직업, 색깔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단어가 10,272개, 법률과 의학 등 전문 용어 10,793개, 문화관련 1,052개 순이다. 반면, 2014년 발표된 표준 국어 대사전에 실린 단어는 511,160개에 이른다. 한국수어사전 단어 수는 국어사전의 4.5%에 불과하다.

더욱 심각한 건, 청인(聽人)사전에 비해 절대 수가 적은 수어사전 등재 어휘가 특정 분야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전문 용어 부분이 심각하다. <마부작침>은 국어사전의 전문 용어 분류에 따라 한국수어사전의 전문 용어 편중 실태를 분석했다.

국어사전은 전문 용어를 53개 분야로 분류하는데, 모두 140,192개의 어휘가 등재되어 있다. 분야별 어휘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역사(17,842개), 가장 적은 것은 언론(163개)이다. 이 분류에 따를 때 수어사전의 전문용어 숫자는 12,498개(일상생활, 전문용어, 문화관련 구분없이)로 국어사전의 10% 수준이다. 이 중 국어사전 대비 수어사전의 어휘 등재율이 가장 높은 것은 '기독교(66.2%)'로 나타났다. 이어 정치(64.7%), 카톨릭(36.3%), 컴퓨터(30.7%)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항공 관련 어휘와 고유명사는 2.4%에 불과했다. '기독교'의 1/30 수준이다. 이어 책 제목과 인명(3.2%), 농업(3.4%), 화학(3.6%) 순으로 국어사전 대비 수어 사전 등재 비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분야에서 농인 간, 또는 농인과 수어사전을 보고 수어를 익힌 청인 간 대화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앞서 A 씨가 어려움을 겪었던 의료 부분 용어 등재율도 10.1%에 불과하다. 말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지만 농인에겐 애초부터 불가능한 단어가 상당한 것이다.

● 틀린 표현, 어색한 표현 수두룩…이래서 소통이 될까?

한국수어 발전을 위한 두 개의 기둥은 수어 용어의 '확대'와 '표준화'이다. 청인 사전 대비 4.5%, 그나마 분야별 편중 현상이 심각한 현재의 한국수어사전은 '수어 용어 확대'라는 하나의 기둥이 아직 충분히 세워지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또 다른 기둥인 '표준화' 사정은 어떨까.

[SBS 뉴스 사이트에서 해당 동영상 보기]

- '목숨' 수어 표현

사람의 생명을 의미하는 '목숨'. 그런데 수어사전에 실린 '목숨' 표현은 '목숨'을 뜻하지 않는다. 수어사전엔 '검지와 중지를 모아서 얼굴 가운데에서 코로 향해 2번 밀어 올리고 목을 끗는 동작'이 '목숨'을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실제로는 '죽는다'는 것을 뜻한다. '쇼핑'은 '물건을 구경하고 나아가 구매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수어사전 상의 표현은 단지 '사다'를 의미할 뿐이다.

● 어떤 것 없고, 어떤 건 엉뚱하게 포함된…너무나 아쉬운 수어사전

수어사전의 문제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사용하는 현대 서울말', 표준어의 사전적 의미다. 여기서 핵심은 '두루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표준어를 담은 사전에 사용하지 않는 단어만 많고, 정작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없다면 사전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어사전의 존재 이유도 마찬가지다. 수어사전에 등재되는 단어 수를 늘리고, 정확한 표현을 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실제 농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담는 것이다. 그런데 <마부작침>이 취재 과정에서 만난 많은 농인과 수어 전문가들은 수어사전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농인이 두루 쓰는 표현이 없고, 있어야 할 표현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카레, 고등어, 갈치, 파프리카'. 실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이 단어들은 수어사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청인들이 운전 중 귀가 따갑게 듣는 '꼬리운전'이라는 표현 역시 수어사전엔 없다. 수어사전을 입구로 삼아 수어를 배우려는 사람들, 수어사전을 중심으로 표현을 정리하려는 사람들에게 위 단어들은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표현이 없는 경우도 있다. 전문 용어 수어 부분엔 '국어 교과 용어' 분류가 별도로 존재하지만, 막상 '문학'과 '소설' 같은 국어 교과에선 필수적인 용어에 대한 수어 표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청인들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을 표현들이 '카레, 고등어' 등을 제치고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매니폴드(하나의 관에서 여러 갈래의 관이 갈라져 있는 관)'나 '스탠딩웨이브현상(자동차가 고속으로 주행할 때 타이어 접지부의 바로 뒷부분이 부풀어 물결처럼 주름이 잡히는 현상)'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농인들 중 이 표현을 아는 사람,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현실의 결과는 수어사전에 대한 외면이다. 인터넷 상에 등재돼 있는 한국수어사전의 단어별 평균 조회수는 1,220번에 불과하다. 그나마 '인사'와 관련된 수어 표현 조회수가 평균을 대폭 끌어올린 결과다. 전문용어 수어 평균 조회수는 114번에 불과하다. 온라인 수어사전이 공식 서비스를 시행한 이후 1년 7개월 동안의 결과다.

● 억지로 만들어 낸 표현들…"청인을 위한, 청인에 의한 수어사전"

수어사전이 제 역할을 못하고, 외면 받고 있는 이유로 수어 사전이 '청인 관점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게 주로 꼽힌다. 마치 영어 사전을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 만들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어사전과 대조 비교할 용도로 '청인' 입장에서 수어사전을 만들다 보니, 농인이 실제 사용하는 표현, 필요로 하는 표현은 없다. 또 농인 현실에 맞지 않는 억지 표현들이 수어 사전를 채우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카레, 고등어' 등은 농인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음식이고, 서로 표현도 하지만 수어사전에 없을 뿐이다.

장진석 수어 통역사는 "현재의 수어사전은 청인들이 생각하기에 농인들에게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는 표현을 정리하고,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농인들이 실제 사용하는 표현에 대한 면밀한 관찰, 농인들의 목소리가 배제된 것이 현재의 수어사전이라는 것이다. 장진석 통역사는 "과거 수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수어사전 편찬 작업을 주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SBS 뉴스 사이트에서 해당 동영상 보기]

-'사이버쇼핑몰' 수어표현

이렇게 청인 관점에서 수어사전을 만들다보니 전혀 이해하기 힘든, 그래서 농인들이 사용할 지가 의심스러운 수어 표현도 등장한다.

'생각', '꿈', '모습', '시장', '거리'

이 단어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용어는 무엇일까. 수어사전에 따르면 '사이버쇼핑몰'이다. 수어사전은 이 단어들을 뜻하는 수어표현을 이어 붙여 '사이버쇼핑몰'이라고 등재했다. 하지만, 이 표현을 보고 '사이버쇼핑몰'이라는 단어로 이해한 사람은 취재진이 만난 농인들, 수어 전문가 들 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농인들은 '인터넷'과 '쇼핑몰'을 뜻하는 수어를 조합해 쉽게 표현하는데, 수어 사전을 만든 사람은 이를 몰라 억지로 표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청인 관점에서 만들어진 사전의 결과는 소통 단절이다. 또 법으로 공용어, 언어의 자격을 부여받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국어의 보조적 수단으로 수어를 남게 하는 것이다. 한국어 단어에 대응하듯 작위적으로 만든 수어사전은 농인과의 짧은 소통만 가능하고, 깊이 있는 대화는 불가능하게 만든다. 장진석 통역사는 "'I hungry. Want food' 정도는 외국인이 '배가 고프니까 음식을 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대화가 길어지면 소통은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며, "단어 중심의 수어 표현을 활용해 농인과 한두 문장 수준의 소통이야 가능할 지 몰라도,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가까이 다가가며 함께하는 한국수어'…갈 길 먼 수어

27만 여명. 우리 사회 농인들의 숫자다. 농인 가족과 수어를 구사하며 농인들과 일상생활을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 즉 농사회에 속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100만 명에 육박한다. 결코 적지 않는 숫자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농인들에게 관심을 깊이 있게 갖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한국수화사전'을 처음 제작한 것이 지난 2005년이고, 수어를 농인들의 고유한 언어로 인정한 것은 불과 1년 전이다. 아직도 농인들을 낯설어 하고, 농인들의 위한 복지를 '봉사'나 '서비스'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가까이 다가가며 함께하는 한국수어'

지난 9월 발표된 제1차 한국수어발전기본계획의 표어다. 한국수어사전은 '보이는 언어, 수어로 통하는 세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수어엔 관심도 없고, 통일된 수어 제정의 필요성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과거에 비해 상당한 진전이다. 하지만, '수어를 통한 평등(세계농인협회의 표어)'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권지윤 기자 (legend8169@sbs.co.kr)
박원경 기자 (seagull@sbs.co.kr)
안혜민 분석가 (hyeminan@sbs.co.kr)
디자인/개발: 임송이
인턴 : 홍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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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경 기자seagu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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