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가 일본의 숨은 영웅? 인기 '애니'의 이상한 선택

박명훈 2017. 11. 1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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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오타쿠'의 일본 이야기4] <명탐정 코난>

[오마이뉴스 글:박명훈, 편집:최유진]

(*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일본판 <명탐정 코난> 기준으로 서술했습니다. - 기자 말)

 <명탐정 코난 : 진홍의 연가>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난 미국에 가서 아버지처럼 악당을 잡는 훌륭한 CIA 요원이 될 거야."
- <명탐정 코난> 등장인물 중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 혼도 에이스케의 말

'빠라빰빰 빠라빰빰~ 내 이름은 코난, 탐정이죠!'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추리·미스터리 일본만화 <명탐정 코난>. 케이블 만화채널에서 지금까지 방영되고 있고 때때로 극장판도 영화관에 내걸린다. 부모님의 손을 잡은 어린이들이(그리고 과거에는 어린이였던 코난 오타쿠들이) 콩닥콩닥 기대감에 휩싸인 채 삼삼오오 극장을 찾는다.

가장 최근 한국에서 개봉한 21기 극장판 <진홍의 연가>는 45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 모았다. 홍보도 케이블 채널 중심으로 이뤄지고 극장수가 적었던 점을 감안하면 고정 팬층이 아주 탄탄하단 얘기다. 1994년 만화잡지 <주간 소년 선데이>에서 연재를 시작, 90권을 넘긴 단행본의 누적판매량은 무려 2억 부를 돌파했다. 이 장수만화가 지금까지 인기를 잡아끄는 비결은 뭘까?

만화는 귀여운 어린아이들, 의문이 꼬리를 무는 범죄현장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짜릿한 추리대결, 살인사건, 수수께끼에 휩싸인 일명 검은 조직, FBI·CIA 잠입요원들의 등장 등 흥미로운 요소들로 맛깔나게 버무려져 있다. 발행 초창기에는 본격 추리-미스터리를 내세웠다. 그러다 연재회수가 길어지면서 추리의 탈을 쓴 현실초월기술(오버테크놀로지) 판타지(?)로 궤도를 튼 모양새다. 현란한 가상의 장비들이 판치는 '007 시리즈' '킹스맨 시리즈' 등의 풍경도 이 만화에서 음미할 수 있다.

주인공 쿠도 신이치의 생체시계를 어린 시절로 되돌려 에도가와 코난으로 만든 정체불명의 비약 APTX4869, 나비넥타이형 음성변조기, 손목시계 뚜껑을 열어 버튼을 눌러 발사하는 마취총, 허리띠 중간부분에서 튀어나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축구공, 프로 축구선수들을 초월하는 '넘사벽' 각력(발차기 힘)을 선사하는 코난 전용 운동화 등등.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릴 흥미로운 함정들이 한 무더기다. 주된 배경은 일본(현실)이지만 시간이 현실과는 다르게 흐른다는 점도 매력이다.

사계절이 몇 번이나 돌아도, 초등학교 1학년인 그 아이

사계절이 몇 번이나 돌아도 코난은 영원히 초등학교 1학년이다. 역시 신이치의 소꿉친구이자 여자친구인 모리 란도 처음부터 쭉 고등학교 2학년(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전선도 큰 진전 없다는 게 함정). 통화용으로 쓰이던 귀걸이형 수신기가 묵직한 폴더폰을 거쳐 스마트폰으로 바뀌었건만 등장인물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는 무대가 미국이나 영국 등으로 옮겨져 첩보액션영화를 방불케 할 추격전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현실의 요소들을 빌려 맵시 좋게 꾸며낸 만화 속 세상이다.

그런데 <명탐정 코난>에는 현실을 훌쩍 넘어서는 무시무시함도 탑재되어 있다. 검은 조직을 수사하는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존재가 바로 그것. 검은 조직은 군수, 소프트웨어, 제약 등 아주 폭 넓은 사업을 관할하는 초거대 국제범죄조직이다.

FBI와 CIA는 미국을 대표하는 정보기관이다. 지난 2013년 전직 CIA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은 CIA의 상위기관인 미 국가안보회의(NSC)가 한국, 독일 등, 미국과 동맹을 맺은 우방국 가운데 최소 35개국 정상의 대화내용을 도·감청했음을 폭로한 바 있다. 상황이 이런데 <명탐정 코난>은 'CIA는 일본을 위해서'라고 취급하고 있다.

논란의 여지가 크지만 백번 양보해서 FBI와 CIA가 미국의 이익을 위해 몰래 타국에서 첩보활동을 할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일본에서도 '어 이건 아닌데. 당신들 너무 막 나가지마'라며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만화 속 두 기관은 일본 경찰을 무시하고 왕성한 첩보활동을 벌이는데도 별다른 제약이 없다.

CIA 미화에 앞장서는 코난

▲ 검은 조직 검은 조직 일당
ⓒ 유튜브 화면 캡처
미국의 정보기관이 한국에 들어와서는 경찰, 검찰, 군대, 국정원(지난 정권 때의 적폐가 양파껍질 벗겨지듯 쏟아져 나와 전혀 신뢰가 가는 조직은 아니지만)의 견제를 전혀 받지 않은 채 범인을 잡겠다며 룰루랄라 활개 치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우왕좌왕하고 실속 없는 경찰이 FBI와 CIA가 검은 조직과 대결을 벌인 뒤의 현장을 뒤처리하는 하청업체로 전락했다고 생각해보라.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닌가.

이 만화는 일본이 미국에 의해 심각한 사법주권침해를 당하는 상황을 가볍게 바라본다. 경찰도 아닌 추리력이 뛰어난 꼬마 탈을 쓴 고등학생인 코난의 추리력이 미국에 도움이 되니 무척 든든하다며 아낌없이 선전하는 듯하다. 만화 속에서 FBI 요원과 함께 검은 조직을 도·감청한 코난 스스로는 이런 상황을 '공조'니 '연계'니 여기며 미국과 자신이 동등한 파트너라고 못 박는 것 같은데 진짜 그럴까?

FBI는 일본인 남자아이(코난)와 함께 검은 조직을 뒤쫓는다. 한국으로 치자면 박근혜 청와대와 최순실 일당의 끈끈한 뒷거래를 포착한 FBI가, 한국 경찰이 모르게 은밀히 수사하는 꼴이다. 그러나 만화에서는 비판은커녕 '오 미국이여 도와줘서 살겠다. 땡큐'라는 인식이 그득하다. 실제로 코난은 검은 조직과 관련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아카이 슈이치, 조디 샌티밀리온 등 우수한 FBI 요원들과 현장으로 출동, 실마리를 잡기 위해 분투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FBI의 요원들은 검은 조직과의 일전이 없어 한가할 때면, 코난과 추리대결을 펼쳐 미궁에 빠진 살인현장의 진범을 잡아내기도 한다. 능수능란하게 일본의 사건을 해결해주는 그야말로 '그림자 영웅'인 셈. FBI의 개입을 알고 있는 인물은 코난과 몇몇 극소수의 주변 인물들, 그리고 일본 경찰청 경비국 공안과의 일부 요원에 불과하다. 코난과 주변인들 모두 미국의 개입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아니 오히려 활짝 반긴다고 해야 맞을까.

최우선 목표인 '보스 색출'에 방점을 찍고 전개되는 검은 조직 소탕작전은 코난의 추리에 힘입어 FBI 요원들이 지원을 퍼붓는 방식. 그 과정을 검은 조직에 잠입해있던 CIA 요원인 '이중 첩자' 미즈나시 레나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무대가 꾸려진다. 가족 살해, 연인 살해 등 검은 조직과 엮인 끔찍한 악연을 품고 조직원들을 각개격파 해나가던 사람들이 드디어 코난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짙은 안개 속에 빠져들어 도통 앞을 볼 수 없던 검은 조직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난다. 불로불사 실험에 막대한 투자와 공을 들이는 것으로 짐작되는 '검은 조직 일망타진'을 향한 초침이 비로소 째깍째깍 돌아가게 된다.

일본 경찰들에게 휴식 차 연인과 여행 왔다는 핑계를 대는 등 비교적 친근하게 느껴지는 FBI 요원들. 그와 달리 CIA 요원의 활동은 더욱 비밀스러우며 수면 위로 거의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된다. 코난에게 우호적 감정을 품고 있다는 점만큼은 마찬가지이지만. 할리우드영화 속 요원들은 정원이 딸린 주택에 거주하는 사이좋은 가족, 억압받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 등 이른바 미국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자신을 희생한다. 하지만 <명탐정 코난>의 요원들은 검은 조직의 마수에서 일본을 수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한 가운데 딱 버티고 서 FBI와 CIA와 일본을 하나로 이어주는 길라잡이, 코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미국의 정보기관이 무턱대고 일본에 들어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좋을까? 이제 본격적으로 그 얘기를 풀어보자.

왜 자국 경찰의 무능을 조성하는가

생각해보자. 미국 경찰이 한국에 제멋대로 들어와서 범인을 색출해 검거 또는 사살하려 든다면? 2015년에 FBI를 둘러싸고 사법 주권 침해 논란이 크게 일었다.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국대사가 한 남성에게 피습을 받아 얼굴을 다쳤다. 이에 FBI는 한국의 모든 경찰을 지휘하는 최고 조직인 경찰청 6층에 머물렀다. 경찰청이 FBI에 수사상황을 보고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장이 거셌다.

충격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수사상황 공유는 그동안 미국 대사관 연락원의 역할이었는데 전례 없는 일'이라는 당혹감도 터져 나왔다. 당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신경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아마도 미국 쪽에서 굉장히 세게 요구를 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에서의 범죄수사는 당연히 한국경찰의 몫이다. FBI가 한국경찰의 보고를 받는 방식은 과거 일제가 외교권을 앗아간 을사늑약의 통탄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명탐정 코난>은 만화적 재미라고 보고 넘어가기엔 도를 넘은 장면들로 물들어 있다. 작가도 그를 인식하고 있다. 만화에서도 미 정보기관의 과도한 개입을 뒷받침하는 대사가 나온다. '일본 경찰에 말해두지 않았으니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가야'라는 취지. 다만 그걸로 끝. 미국의 요원들은 인적 뜸한 컨테이너 부두에서 산탄총을 발사하고, 아래가 잘 내려다보이는 높은 건물 옥상에 저격수를 배치한다. 코난이 알고 지내는 일본경찰들에게 미 요원들의 무기사용을 살짝 귀띔한다는 언급이 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사후약방문도 분수가 있지.

뒤늦게 출동한 일본의 강력계 형사는 멀뚱멀뚱, 내막을 모르고 그저 어지럽혀진 현장을 뒷수습하는 별 볼일 없는 단역에 머무른다. 자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미국과 그 협력자인 코난(과 장비를 지원해주는 아가사 히로시 박사와 검은 조직에서 탈출해 코난에 합류한 하이바라 아이)만이 꿰고 있다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나. 미국 미화에 빠져든 일본인 작가 스스로 일본 정보기관의 무능을 부채질하는 꼬락서니가 아닌가 말이다.

'만화니까 그럴 수도 있지'라는 반문이 있으리라. 이에 대한 답변은 거짓을 섞어 꾸며낸 만화 속 세상이 현실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면 마땅히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것. 무척 과도한 미국(또는 영국)사랑, 미국의 정보기관이 일본의 문제를 알아서 깨끗하게 해결해줄 것이니 가만히 있어도 좋다는 인식이 <명탐정 코난>의 흐름을 일관되게 좌우하고 있다.

▲ CIA 꿈나무 혼도 에이스케(한국명, 문재수)
ⓒ 유튜브 화면 캡처
생사불명인 친누나(미즈나시 레나)의 흔적을 쫓아 일본에 왔지만 CIA 요원이 되겠다며 훌쩍 미국으로 떠난 혼도 에이스케의 사례도 주목해야 한다. 일본의 남자 고등학생이 CIA를 선망하며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는 묘사가 심상치 않다. 모국을 뒤로 하고 미국의 이익에만 전념하는 분위기로 똘똘 뭉친 세상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것. '일본의 완전한 미국화'를 선언하는 굉장히 상징적인 장면이다(그런 점에서 '협력'에 머무는 신이치와도 다르다).

비록 에이스케의 아버지와 누나가 CIA 요원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에이스케에게 일본은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추억이 깃든 기분 좋은 곳이었다. 충분히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일본에도 한국으로 치면 국정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경찰청 경비국 공안과라는 정보기관이 있으니까.

에이스케가 미국을 위해 정보공작을 벌이는 충실한 미국 시민이 될 수밖에 없다는 뻔한 귀결. 일본에서 교활한 범죄를 이어나가는 검은 조직 카르텔을 무너뜨리는 데 왜 절대적으로 미국에게 의존해야하는 걸까. 저자인 아오야마 고쇼가 현실에서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며 세계경찰을 자임하는 미국 중심주의에 물들었다는 비판이 충분히 제기될 만하다.

우리에게 추리만화로 여겨지는 <명탐정 코난>을 재해석한다면 이 만화가 지니는 한계, 위험성을 비로소 깨닫게 되리라. 그동안 한국에선 사건을 해결하려 분주하게 사건현장을 오가는 코난과 소년탐정단의 활약만 조명해 왔으니 완전히 다른 해석도 필요한 법이다. 원래 글을 쓰기 전에는 초점을 등장인물이 아닌 만화 속 굴절된 요지경에 맞추려 했다. 그렇지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주인공인 에도가와 코난=쿠도 신이치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났다.

영국의 셜록 홈즈를 선망하며 유복하게 자라난 일본인 남자 고등학생의 삶(1기)이 검은 조직에 의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순간, 미국의 FBI 및 CIA와 협력하는 일상(2기)으로 전환된다는 아찔한 풍경. 무척이나 눈에 밟힌다. '꼭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가야만 했나'란 궁금증이 인다.

만화란 허구를 실제처럼 매끄럽게 가공한 꿈의 세상이다. <명탐정 코난>은 유명 추리소설가인 아버지(쿠도 유사쿠)와는 다른 길을 걸어 스타 명탐정으로 우뚝 서려는 자신만만한 아들(쿠도 신이치)의 무대다. 동시에 일본 국내에서 허가 없이 첩보활동을 벌이는 미 정보기관을 미화하는 분위기가 흠뻑 서린 위험한 시공간이다. 이왕 즐길 거라면 자각 없이 '남의 꿈'에 무턱대고 빠져들다가는 정말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교훈도 굳게 새겨 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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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주권방송>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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