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읽다] (12) 강원도 평창군 봉평 - 다시, 메밀꽃 필 무렵
[경향신문]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은 지금 메밀꽃이 한창이다. 봉평 출신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처럼 소금을 흩뿌려놓은 듯 새하얀 메밀꽃이 팝콘처럼 톡톡 터지고 있다. 초가을 달빛 아래 장돌뱅이 허생원의 애틋한 사랑이 메밀꽃밭을 따라 진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마을. 봉평은 긴 하늘에 점점이 떠 있는 흰 구름조차 메밀꽃을 닮아 있었다.
■ 봉평은 이효석이다
영동고속도로 평창IC(옛 장평IC)에서 매년 9월 초 메밀꽃 축제가 열리는 이효석 문화마을까지는 7㎞. 외마디 탄성이 나온 것은 백옥포 교차로로 진입하면서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1907~1942)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처럼 봉평은 메밀꽃 천국이었다. “이효석은 봉평 사람에게 자부심이자 자긍심의 아이콘입니다. 100년 넘게 메밀꽃 향기를 한아름 안고 살 수 있게 해준 고향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최일선 평창군 문화해설사(51)는 “세계적인 예술가라도 생가를 보존할지 모르지만 소설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감상할 수 있는 마을은 없다”면서 “봉평 하면 이효석이요, 이효석 하면 메밀꽃”이라고 말했다. ‘이효석 생가터, 이효석 생가마을, 이효석 문학관, 이효석 문학비….’ 봉평에 가면 이효석이라는 이름 석 자를 끝없이 만난다.
1991년 전국 1호 문화마을로 지정된 봉평은 이효석이 나고 자란 고향이다. ‘이효석 문학의 숲’부터 찾았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황토길을 밟는데 바위마다 소설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소설 속 주인공 허생원이 청년 동이에게 “아비어미는 있겠지”하며 충주댁을 두고 갈등을 빚다가 나귀로 화해하는 첫 장면을 떠올렸다.
알록달록한 야생화를 보고 있을 때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산마을에 웬 파도 소리? 가만 들어보니 자작나무 잎들이 농 짙은 초록 숲을 흔들어대며 내는 소리다. 강원도 산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작나무는 기둥이 곧고 휘어지지 않아 변치 않는 사랑을 뜻한다.
물레방앗간은 소설 속 허생원이 성서방네 처녀와 평생 잊지 못할 단 한 번의 사랑을 나눈 곳이다. 내려오는 길에는 계곡을 만났다. 폭이 채 1m가 안되는 작은 개울이었지만 두 발을 담그고 있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웠다. 이효석 생가는 소박했다.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가 걸었을 법한 메밀밭에 은빛 가을햇살이 찰랑거렸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 이효석은 메밀꽃이다
봉평은 감자와 옥수수 농사가 전부였던 산골 마을이었다. 수려한 산세에 기암절벽도 없고 딱히 내세울 만한 역사문화유적지도 없다.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이 감싸고 있는 봉평은 그저 강릉 가는 길목으로 여겨졌다.
봉평이 유명해진 것은 1990년대 초 마을 청년들이 뜻을 모으면서다. 1970~1980년대 이웃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자 마을 청년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주목했다. 소설문학도 마을브랜드로 키울 수 있다는 생각에 허허벌판이던 산야 50만평에 메밀씨앗을 뿌렸다. 실제 작품에 나오는 봉평장터, 물레방앗간, 메밀밭 등을 재현하고 이효석 생가터와 문학관도 세웠다. 1997년 시화전과 백일장으로 시작한 마을 행사는 지금 한 해 100만명이 찾는 국내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어릴 때부터 이효석 백일장에 나가 시와 수필을 써서 그런지 마을주민 모두가 작가라고 생각해요. 메밀꽃밭의 순수한 사랑을 그리려면 옛 시골풍경을 간직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지요.”
창동 4리 이병렬 이장(58)은 “처음부터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힘을 모았기에 20년 세월을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다”면서 “귀촌이 늘어나는 것은 마을 주민의 행복지수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봉평은 영월로 흘러드는 흥정천을 끼고 있다. 봉평 출신 형제가 문을 열었다는 2층 카페 ‘메밀 스케치’로 향했다. 카페는 책과 음악은 물론 커피와 막걸리까지 즐길 수 있는 ‘원스톱 메밀백화점’이었다.
“도시에 살던 친구들이 고향으로 내려와 터를 잡고 있어요. 퓨전 막국숫집을 여는가 하면 마을 어르신과 협업으로 신개념 농촌 사업을 벌이고 있지요. 자연스럽게 일자리가 계속 늘어가고 있습니다.”
메밀스케치의 변철규씨(40)는 “한때 1만2000명이던 마을 인구가 4700명까지 줄었지만 지금은 5800명으로 다시 1100명 늘었다”면서 “마을 청년과 어르신들이 호흡을 맞추는 ‘메밀타작 공연단’은 지역에서는 꽤 유명하다”고 말했다.
흥정천으로 내려가니 오동나무로 엮은 뗏목이 보였다. 속이 훤히 비치는 흥정천은 어른 허리춤 깊이였다. 오리들이 한적하게 노는 것을 보는데 문득 동이가 물에 빠진 허생원을 업고 개울을 건너는 장면이 생각났다.
“저 아래 개울입니다. 허생원이 동이의 성장과정을 듣고 평생 가슴에 묻어둔 사랑을 찾을지 모른다고 기대하지요. 왼손잡이인 것을 알고는 동이 어머니가 사는 고향으로 같이 가자고 하는데 설레지 않습니까?” 노를 젓던 강도선씨(64)가 “뗏목을 타고 마을을 보면 ‘아, 이래서 소설을 그렇게 썼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면서 “바로 저기 봉평장터와 물레방앗간도 소설에 나오는 그대로”라고 말했다.
<봉평 | 글·사진 정유미 기자 youm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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