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의 따뜻한 축구] 접어 두고 주저앉아있었던 그 꿈을 다시 꺼냈다

조회수 2017. 7. 18. 21:2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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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찾아가는 축구교실 그리고 차붐 원정대 이야기

따뜻한 축구를 다시 쓴다. 참 좋다. 거창하고 큰 것보다 작고 소소한 얘기들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내 그릇이 그만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큰 일을 하셔야죠!" 자주 듣는 얘기다. 얼마 전에는 할 말이 없어서  "아내에게 쫓겨난다" 며 손사래를 쳤다. 곤란할 때마다 아내를 앞세우는 것은 나의 오래된 '전통'이다. 하하하. 나의 그릇보다 더 큰일을 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는 것이고 나는 그럴만한 그릇이 못된다.

그래서 나는 삼 년 전부터 나의 그릇에 맞는 꿈을 꾸고 있었다.

'차범근의 찾아가는 축구교실'

귀농하는 젊은 부부들과 아이들을 찾아가 함께 축구를 하는 꿈.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아내와 두리는 적극 찬성하고 지지했다. 두리는 심지어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아내는 사전 실습이 필요하다며 'Daum'에 부탁해서 몇몇 학교를 소개받았다. 학생수가 열명 남짓인 시골 분교들이 그 대상이었다. 태안 홍천 연천.. 차 뒷트렁크에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유니폼과 축구화 음료수 거기에 두리가 실어주는 과일까지 싣고 집을 나설 때의 설렘은 어릴 때 동네 앞산으로 소풍 가던 추억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고문초등학교에 갈 때는 마침 두리가 경기가 없는 휴가 때여서 따라나섰다. 끝나고 오면서 마을 느티나무 아래서 파는 옥수수를 사가 지고 먹으면서 돌아왔으니까 이 년 전 이맘 때 쯤이었나보다. 날은 뜨겁고 아이들은 힘들었겠지만 나는 즐거웠다.

"아빠는 말을 너무 길게 하고 심각하게 하세요. 애들이 집중하기 힘들어요!"

돌아와서 두리가 지적질을 했지만이건 어디까지나 차범근 축구교실이고, 지가 '차두리의 찾아가는 축구교실'을 할 때 그렇게 하면 될 일이다!!

홍천에 갔을 때는 너무 신나서 아이들에게 소고기를 쐈다. 말하자면 내가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동안 대한민국 축구를 위해 애썼으니까 너희들이 나하고 좀 놀아주면 안 되겠니?' 하는 억지였다. 사실 그 아이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세대야 나나 두리땜에 즐거운 일이 많았을 터이니 내가 그런 보상을 요구해도 되겠지만 아이들은 땡볕에 알지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와서 놀자고 하니 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메르스 때문에 축구여행을 중단할 때까지 나의 꿈은 마구마구 부풀어 올랐다. KTX가 여수 순천까지 이어지자 나는 겨울이 따뜻하고 아무거나 먹어도 맛있는 그곳에 아예 본부[?]를 정해놓고 한 달에 일주일 정도는 눌러있으면서 주변 아이들에게 놀러 다닐 계획도 세웠다. 서둘러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도 하고 놀러 오라는 공수표까지 남발을 해댔다. 그러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서 세상이 무섭고 사람은 더 무서운 패닉 상태에 빠져버렸다. 결벽증이 심한 우리 가족에게는 쉽지 않은 상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동안 접어 두고 주저앉아있었던 그 꿈을 다시 꺼냈다. 내가 나에게 상주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독일 여행에서 돌아오면 '차범근의 찾아가는 축구교실'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내일은 차붐 원정대가 독일로 떠난다. 30년 전 내가 독일에서 선수생활을 할 때부터 그 해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축구선수들을 대상으로 '차범근 축구상'을 주어왔다. 박지성 어린이기성용 어린이도 모두 차범근 축구상을 받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내년이면 그 상이 30주년이고 내가 분데스리가에 첫발을 디딘 40년이 된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좀 더 규모를 키워서 해마다 11명 한 팀을 선발해 독일로 친선경기여행을 가기로 한 것이다.

그 첫 경기는  내가 분데스리가 선수로 데뷔를 했던  다름슈타트의 유소년 팀이다. 40년 전, 그러니까 1978년 12월 내가 첫 경기를 뛰었던 바로 그 메인 경기장에서 나의 첫 번째 원정대가 경기를 한다. 다름슈타트에서는 차붐이 그 자리에 꼭 참석했으면 한다며 프로팀의 오픈데이이기도 해서 만 명정도의 관중이 올 거라고 했단다. 대단한 일이고 아이들에게는 틀림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다.

제29회 차범근 축구상 수상자들과 함께

그리고 26일에는 프랑크푸르트, 28일에는 구자철과 지동원이 있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경기를 할 것이다. 아이들은 구자철, 지동원 선수를 만날 꿈에 부풀어 있다.

원래 두리가 같이 가기로 하고 많은 준비를 도와줬는데 대표팀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아쉽게 됐다. 아이들은 차두리 아빠보다는 차두리를 더 좋아한다.

언젠가 따뜻한 축구에서 얘기했던 프랑크푸르트 구단의 장비 담당 토니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본인이 "장례식은 크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겨서 굉장히 크게 했다며 친구들은 시장님 장례식[Buergermeister] 같았다며 웃었다. 본인이 그렇게 유언을 남겼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모이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고 기억할 만큼 팀이나 선수들을 위해 열심히 일을 했던 이유가 그 첫 번째이겠지만, 팀의 허드렛일이라고 할 수 있는 장비 담당을 추모하기 위해 지나간 회장단이 모이고 프랑크푸르트팀이 그를 기억하는 일은 독일사회의 성숙함과 따뜻함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부러운 일이다. 토니의 거창한 장례식 얘기를 전해 들으면서 작은 일 시시한 일 보잘것 없는 일... 이런 것들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어서 독일이라는 나라는 그 위에 큰집을 지을 수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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