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기의 꽃산 꽃글]빌레나무
[경향신문]
사전투표를 할까 하다가 뒤로 미루고 제주도 고유의 원시림인 곶자왈에 들어가 귀한 나무를 만났다. 2003년 최초로 발견된, 오로지 제주에서만 사는 빌레나무였다. 이 나무하고는 얽힌 사연이 있다.
2012년 겨울 투표를 하고 친구집에 모였다. 오후 6시, 출구조사가 발표되었다. 화성에서 한 투표, 금성에서 본 개표. 이제껏 겨우겨우 견뎌왔는데 또 5년이라니, 그 어떤 너덜겅에 패대기쳐지는 기분이었다. 졸지에 흥이 파하고 뿔뿔이 흩어져 귀가하는데 새로운 사실이 떠올라 기분을 더욱 잡치게 했다. 당선인의 임기가 끝날 때면 어느덧 나도 환갑이겠구나. 이른바 지천명(知天命)의 시기를 삽질과 불통으로 얼룩지게 할 형편이 아닌가. 그래서 더욱 바깥으로 돌아다녔던가 보다. 소태 같은 심사를 달래려 대마도 식물 탐사에까지 따라나섰다가 이런 산행기를 작성하였다. “(…) 빌레나무는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부엽층 형성이 양호한 곶자왈 내 함몰된 지형에서 무리지어 자란다(김진석·김태영). 나는 아직 우리나라의 빌레나무를 본 적은 없다. 언젠가 곶자왈에 가서 간신히 제주도에 한 발을 걸친 기특한 빌레나무를 오래 바라보겠다.”
화산 폭발이 만든 요철 지형의 신비한 곶자왈. 이곳에 오면 나 따위란 그저 하나의 떨림, 지나가는 미풍, 있으나 마나 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숲에 앉아 덤불 속의 빌레나무를 바라본다. 다소 꺼칠한 잎을 들추면 겨드랑이마다 꿀단지 같은 하얀 꽃들이 송송송 달려 있다. 이 작은 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생태계가 얼마나 허전했을꼬. 빌레나무와의 관계를 곰곰 짚어보자니 지금 이곳은 내 개인적 소망이 실현되는 순간의 현장이 아닌가!
태블릿PC-촛불-장미로 상징되는 일련의 흐름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다. 혹 한 송이 꽃을 피우고 지게 하는 것과 동일한 힘이 기획한 건 아니었을까. 전혀 다른 기분으로 환갑을 맞이하게 되어 다행이다. 나의 지난 시절을 요약하면 ‘20-시, 30-책, 40-산, 50-꽃’이다. 이순(耳順)에는 어떤 한 글자가 찾아올까. 조금은 건방진 궁리도 해보게 되는 새 공화국 치하에서의 즐거운 하루. 빌레나무, 자금우과의 상록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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