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장화'의 50년 미술 인생

정유진 기자 2017. 3. 28.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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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공예가 송번수 전시.. 대표작 '공습경보' 등 100여점

"태피스트리를 배우러 무작정 파리로 갔어요. 주변에선 다들 미쳤다고 했지요. 잠시 한국에 들어왔더니 아내가 김치 장사를 하더군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그 자리에서 여권을 찢고 한국에 눌러앉았습니다."

섬유공예가 송번수(74)의 삶은 그의 작업 방식을 닮았다. 손으로 실 한 올 한 올을 일일이 짜야만 완성되는 태피스트리처럼 그의 50년 화업도 고뇌와 인내의 연속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6월 18일까지 열리는 '송번수 50년의 무언극'은 노장이 일궈온 그간의 결실을 보여준다. 1990년대 판화 작품부터 최근 작까지 100여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는 대표작 '공습경보' 연작과 '미완의 면류관'이 포함된다.

홍익대 공예학과를 졸업한 그가 태피스트리에 매료된 건 70년대 파리 유학 시절이다. "창문을 가릴 만큼 거대한 크기에 놀랐죠. 일주일이면 완성되는 유화와 달리 한 올씩 쌓아올려야 하는 정직함, 그리고 유화에 없는 특유의 광채가 좋았어요." 5㎜ 실을 일일이 손으로 짜는 작업. 실과 실이 이어지는 이음매에 십여 가지 색깔이 만나 그러데이션을 만든다. 한 번 어긋나면 돌이킬 수 없는 작업이라 실수하면 칼로 자르고 새로 시작한다. 한 작품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약 1년. 50년 작업에 태피스트리 작품이 70여점밖에 안 되는 이유다.

작품은 전쟁, 재난, 독재 같은 사회 부조리를 다룬다. 앤디 워홀에 영감을 받은 판화 '공습경보'는 방독면을 쓴 사람의 얼굴을 다섯 단계의 원색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사회 전체가 공습'이란 메시지를 던진다. "70년대만 해도 엄혹한 시절이라 내 생각을 은유적으로 조심스럽게 표현했지요." 이라크 전쟁의 자살 폭탄 테러를 은유한 '이라크에서 온 편지'도 눈길을 끈다. 대표작 '미완의 면류관'은 경기도 광주시 능평성당 제단에 십자고상을 대신해 설치된 작품으로 유명하다. 면류관이 붉은색이 아니라 푸른색이다. "불광동 어느 정원에서 푸른 장미를 본 적이 있어요. 섬뜩하도록 차가웠지만 강렬했지요." 그는 2001년 '헝가리 개국 1000년 기념' 태피스트리 전시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왕신연 학예연구사는 "송번수는 회화적 기법으로 태피스트리의 극사실 묘사를 표현하는 동시에 종교·정치 등의 주제를 두루 다루는 섬유 분야의 독보적인 작가"라고 평했다.

송번수의 별명은 '홍대 장화'였다. 집에 물이 없어 대학 4년 내내 장화를 신고 집 밖으로 물을 길으러 다녀서다. 지금도 자기 모습을 그릴 땐 장화 신고 물통 나르는 사람을 그린다. "작업은 여전히 '전쟁'처럼 힘들지만, 장화를 신고 다녔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위로가 되지요. 몸이 받쳐줄 때까진 해보려고요(웃음)." (02)2188-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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