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이슈분석] 최순실에 휘둘렸던 관료들..고위공무원제 바꿔라

조귀동 기자 2017. 3. 27. 11:1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 중앙부처 차관은 “탄핵 가결 이후 부처 직원들이 너무 일을 안해서 문제”라며 “지시한 업무도 제대로 진척되는 게 없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다. 지난해 10월 이후 시작된 실, 국장 이하 관리자급 공무원들의 복지부동(伏地不動)이 이제 업무 추진이 ‘올스톱’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그는 하소연했다. “누가 되었건 박근혜 정부 시절과 완전히 바뀔 것이라는 생각에 누구 하나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웬만한 정책 아이디어들은 ‘빛 볼 날’을 기다리며 서류함에 넣어져 잠자고 있거나, 아니면 대선 캠프에 문건 형태로 전달된 상태라는 게 관가의 정설 아닌 정설이다.

정권 교체기가 되면 고급 관료들은 유력 정치인, 대통령 측근, 선거 캠프 등에 줄을 대기 위해 분주하다. 1030여명에 달하는 고위공무원단에 대한 인사권을 사실상 청와대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4대강 국정감사에서 한 고급 관료가 국회의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 근무 경험이 있는 중앙부처 국장급 공무원 A씨는 최근 사석에서 “차라리 일부 고위공무원을 정치적으로 임명하는 게 낫다”는 요지의 말을 하고 있다. “미국처럼 차관보나 실장급 직위를 청와대가 임명하고, 대신 국장급 이하는 그냥 일만할 수 있게끔 내버려두는 게 낫지 않냐”는 게 핵심 주장이다. “지금처럼 정권교체기만 되면 실, 국장급 이상 공무원들이 줄대기에 열중하는 모습을 어떻게든 바꿔야한다”고 A씨는 말했다.

민주화 이후 세 번째 여야 정권 교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고위공무원 인사 제도를 바꿔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관료 사회에서도 “공무원 제도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고위공무원제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핵심은 ‘정권 교체기에 만연하는 줄대기 문화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이다.

◆ 고급 관료 ‘아노미’, 5년 마다 반복되는 세 가지 이유

관료들의 ‘아노미(무규범상태)’는 그간 여야 정권교체를 경험한 ‘학습효과’ 때문이다. 청와대가 인사권을 쥐고 차관보, 실장, 국장 등 이른바 ‘고위공무원단’을 휘어잡는 다는 것이 핵심이다. 과거 1~3급이었던 고위공무원단 소속 공무원은 2016년 현재 1031명. 이종수 한성대 명예교수는 “실제 정부 부처 운영 실태를 보면 임기가 1~2년에 불과한 장관은 인사권이 없고, 청와대가 고위공무원단 인사권을 무기로 각 부처를 움직이게 된다”고 말했다. 이 명예교수는 “청와대 비서실, 특히 대통령 신임이 두터운 일부 비서진들이 광범위한 인사권을 쥐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2008년 이명박 정부 당시 ‘코드 인사’가 횡행한 것은 정권 교체 이후 부처 장악력을 높이기 위한 정치 권력의 실력행사였던 것이다.

두 번째는 청와대의 관료 인사 시스템이 잘 짜여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고위 공무원 인사 방식은 정권마다 제각각 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1~3급의 고급 관료들을 ‘고위공무원단’으로 합치고, 그 인사권을 중앙인사위원회에 뒀다. 고위공무원단은 부서 경계 없이 단일 그룹으로 관리됐고, 외부 전문가도 임용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대해 정치권의 관료 장악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뒤이어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중앙인사위원회를 없애고, 청와대 내 인사 관련 기능을 크게 축소했다. 하지만 이 때도 청와대발 인사가 계속된 것은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검증되지 않은 인사 때문에 잡음이 많았다. 박근혜 정부는 차관급 부처로 인사혁신처를 설치하면서 어느 정도 참여정부 당시 방식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안에선 이른바 ‘비선실세'가 인사를 장악했다.

정치권이 관료들을 장악하고, 정치적 필요에 맞춰 행정 기구를 움직일 테크노크라트들도 없다. 장·차관으로 임명되는 연구소, 대학 등 학계 출신들은 조직 장악력이 떨어진다. 국장이나 과장 정도를 마지막으로 관가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차관보 이하 공무원으로 임명되는 경우도 없다. 대통령이 정무적으로 임명할 수 있는 몫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각 부처 핵심 직위는 관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남은 선택지는 코드에 맞는 고위 관료들을 선별해 고위직에 임명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치권 스스로 관료와 짬짜미를 택한 결과로 본다. 이 명예교수는 “정부 부처가 장관을 제외하고 관료들로만 채워진 것은 민주화 이후”라며 “청와대 등이 통제가 어려운 정치인 출신을 각 부처에 내려 보내기 보다 말 잘 듣는 관료를 찾아 나서면서 행정 부처 내 관료 순혈주의가 심화됐다”고 분석했다.

◆ 고위직 정치적 임명 양성화가 차악일까

다수 전문가들과 전현직 고위 관료들은 “정치적 임명 자체를 양성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근세 성균관대 교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 권력이 행정 부처와 공무원을 통제하고 움직이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다만 그 과정이 제도화, 양성화돼 있어야 하는 데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정치’와 ‘행정’의 경계선을 명확히 나눌 필요가 있다는 논리다.

’최순실 사태'의 한 가운데 있었던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공무원들이 지난 1월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련된 긴급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른바 ‘1급’이라 불리는 고위공무원 가급에 해당하는 고급 관료들은 청와대에 의해 임명되는 사실상 반(半) 정무직이다. 고위공무원 가급은 차관보 내지는 실장 직책으로 장·차관을 보좌하면서 조직을 운영한다. 청와대 비서실, 국회의원 등 정치권과의 교섭이나 다른 부서와의 업무 협조도 이들의 몫이다. 기획재정부의 경우 1급 자리는 8개 정도에 불과하다. 지난해 말 현재 1031명인 고위공무원단 가운데 200여명 정도가 1급에 해당된다. 차관도 직업공무원 출신이지만 실제 업무는 정무적인 성격이 많다. 자연스럽게 이들 자리에 정치적인 고려는 불가피하다. 김병섭 서울대 행정학과 교수(국가리더십센터장·참여정부 당시 정부혁신위원장)는 “1급 이상 직위의 경우 정권과 소신, 비전이 일치하는 이들이 자리에 임명돼야 한다”며 “그렇다면 미국 등의 나라처럼 차관보 정도 직위에 정치적 임명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도 검토해 볼만 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차관보(Assistant Secretary)까지 대통령이 임명하되 상원의 인준을 받도록 하고 있다. 또 각 부처별로 일부 소수 인원을 의회 인준 없이 백악관이 임명할 수 있도록 했다. 대신 이들은 의회 및 민간에서 발행하는 고위직 임명록 등을 통해 정보가 투명하게 드러난다. 백악관 내 대통령인사실(OPP·The Office of Presidential Personnel)을 정권 교체에 상관없이 100명 정도 규모로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인사검증도 안정적으로 제도화돼있다. 대통령의 공직 임명권이 크다는 것을 감안해 그에 대한 견제 장치도 달아둔 것이다. 내각제 국가인 영국은 장·차관 뿐만 아니라 정치권 인물들이 특별고문 등으로 부처에 임용된다. 하원과 정부 부처 운영과의 관계가 밀접하다. 대신 사무차관 이하 직업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은 엄격히 보장된다. 공공기관장의 경우 독립된 위원회가 인사권을 쥐는 데, 이 위원회는 외부 전문가들이 위원으로 참여한다.

전문가들은 정치적 임명이 가능한 범위를 넓히는 대신, 나머지 직위에는 정치권의 입김을 차단하자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김근세 교수는 “직업공무원 제도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서는 정치 권력에 의해 인사권이 침해당하지 않는 범위를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며 “이 범위 내에서 공무원들 안정적으로 경력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장급까지 청와대의 인사권이 미치는 모습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한 중앙부처 국장급 관료도 “정무적인 기능이 있는 자리라면 관료들이 커리어를 끝내고 정치권이나 민간에서 경험을 쌓다가 발탁되는 방식으로 임명하면 된다”며 “나머지 자리는 내부에서 인사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Copyrights ⓒ 조선비즈 & ChosunBiz.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