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감옥서 예수 만난 나이 쉰셋 '초심자' 교회 세우다

2017. 3. 1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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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 종지교회와 크리스천 독립운동가 이상재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의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 월남 선생에 의해 시작된 종지교회 모습이 집 뒤로 보인다. 1800년쯤 세워진 생가는 1955년 유실됐다. 이어 1972년과 80년 두 차례 복원됐다. 이후 2007∼2011년 유물전시관 건립 등과 함께 큰 규모로 조성됐다.
1960년대 말 철거된 종지교회 ㄱ자 예배당 앞에서 교인들이 기념촬영한 자료 사진.
이상재는 한성감옥에서 예수를 영접했다. 독립협회 운동으로 수감 중 동지들과 찍은 사진. 아래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김정식. 뒷줄 왼쪽부터 이승만 안명선(동지 안경수 아들) 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 아들) 그리고 아버지 대신 복역 중인 소년. 아래 사진은 지금의 옛 서대문형무소. 도서출판 범우사 제공·강민석 선임기자
2002년 부임한 종지교회 이학준 목사가 이상재 선생 생가를 배경으로 교회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지난 3일 충남 서천군 마산면 벽오리 물버들방문자센터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613번 지방도 옆에 위치한 이 센터는 서천 제일의 봉선저수지 생태를 지킨다. 물속에서 자라는 버드나무와 물안개로 창조의 신비를 보여주는 곳이 봉선저수지다.

613번길. 크리스천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1850∼1927)가 큰 뜻을 펼치기 위해 출향(出鄕)한 길이었으며, 또한 망국의 슬픔을 달래며 낙향(落鄕)한 길이기도 했다.

그 길을 따라 방문자센터에서 3㎞쯤 남쪽으로 향하면 마산면사무소가 나온다. 한때 우시장이 설 정도로 활기찼던 면 소재지는 이제 200∼300m 상가에 불과한 한적한 읍내가 됐다. 우체국, 농협마트, 보건지소, 복지회관…. 생활에 꼭 필요한 것만 있다.

이 한적한 동네 초등학교 옆에 3·1운동 기념탑이 우뚝하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려 천부의 자유를 외치는 남녀동상. 삼일절을 전후해 이 탑 앞에서 만세 재연 행사가 펼쳐진다. 이곳 사람들은 ‘새장터 만세운동’이라 부른다.

새장터 만세운동은 이상재 선생이 1904년 태동시킨 인근 종지교회 교인이 이끌었다. 1919년 3월 29일 종지교회 초대 장로 유성열은 교인들과 밤새 만든 태극기를 신장리 장터에서 군중에게 나눠주고 만세 삼창을 했다. 태극기는 이렇게 민족을 위해 나부꼈다.

새장터 기념탑을 거쳐 2.5㎞쯤 또 남하하자 왼쪽으로 ‘이상재 생가’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으로 바라보니 종지리 들판과 자연부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락 한가운데 교회 첨탑이 종지교회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들판 오른쪽은 ‘한산 모시’로 유명한 한산 읍내다. 한산은 조선 말까지만 해도 4대문 성곽을 갖춘 관아가 있는 큰 고을이었다. 조선 양반들은 대개 읍치(邑治) 수령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성 밖에서 향촌을 이루고 살았다. 종지리가 바로 향촌으로 한산 이씨 집성촌이었다.

아들과 감옥서 복음 받아들여

이상재는 가세가 기우는 양반집의 자제였다. 초가 생가가 이를 말해준다. 그는 철종 1년에 태어났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삼정문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웠고 13세 무렵엔 진주민란이 일어났다. 그해 이상재는 중국 고대 영웅전 ‘춘추좌전’을 읽었고 이듬해 한산읍성이 내려다보이는 봉서암(현 봉서사)에 들어가 유숙하며 공부했다. 한산 출신 고려 문신 목은 이색(1328∼96)이 재현했다고 할 만큼 이상재는 총명했다.

그는 18세 되던 해 종지리를 떠나 500리길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떠났다. 하지만 문필을 빌려 쓴 자가 급제하는 과장(科場)이었으니 붙을 리 없었다. 문헌 등에 따르면 이상재는 “낙방한 것이 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라가 걱정된다”고 개탄하며 “향리로 내려가 농사나 짓겠다”고 했다. 이런 그를 일가 되는 명사 이장직이 죽천 박정양(1841∼1904)에게 소개했다. 박정양은 김홍집 내각 붕괴 후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한 진보적 정객이었다.

1903년 이상재는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악정을 탄핵한 탓으로 조정대신들의 미움을 사 국체개혁 음모 죄목으로 차남 승인과 함께 한성감옥(옛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선교사들은 그를 위해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넣었고 이를 탐독한 그는 심령의 변화를 입어 예수를 영접했다. 나이 53세였다. 그와 함께 옥중에서 예수 앞에 자복한 이들은 이원긍 유성준 김정식 이승인 홍재기 안국선 김린 등으로 이들은 석방된 후 서울 연동교회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함께 투옥됐던 크리스천 이승만(훗날 대통령)은 선교사와 그들 사이에서 전도를 위해 애썼다. 그들은 “지옥과 같이 비참했던 감옥이 천국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이상재는 자신의 생애에 아주 낯선 체험을 했다고 한다. … 그는 주님을 믿게 되었고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이상재의 영접을 기록한 YMCA 선교사 브로크만의 글이다.

이상재가 고백한 신앙 체험은 그가 주미공사 하급관리로 워싱턴에 갔을 때와 독립협회에 있을 때 주어졌다. 이상재는 “위대한 왕의 사자가 기회를 주었지만 거절했고 그래서 옥에 가두어 신앙의 기회를 다시 한번 준 것”이라고 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는 이전보다 더욱 클 것”이라는 주의 사자 음성에 회심했음을 간증했던 것이다.

한데 1904년 3월 석방된 이상재는 이유 없이 재차 투옥됐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러던 중 감방 멍석 밑에 한문 ‘요한복음’이 눈에 띄었다. 그는 모두 읽고 하나님께 자기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다.

1928년 게일 선교사가 ‘미셔너리 리뷰 오브 더 월드’에 쓴 재수감 후 이상재의 영적 체험담. ‘믿을 수 있겠는가.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예수께서 내 앞에 서셨다. 거룩하고 위대한 구세주였다. 나는 지금까지 완전히 그를 잘못 알고 있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이셨다….’

이상재가 감옥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삶은 이랬다. 과거 낙방 후 박정양의 문하생으로 정계 입문을 했다. 그는 신사유람단 일행으로 일본에 가 개화사상을 갖게 됐으며, 인천우정총국 주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자진 사퇴하고 낙향과 상경을 거듭하며 전환국 위원, 승정원 우부승지, 학부 학무국장, 법무 참사관, 중추원 일등의관 등을 역임했다.

강직한 성품의 그는 중추원에서 일하며 부정부패와 싸웠고 동시에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해 백성의 소리를 전했다.

생가 마을 종지교회는 토착교회

다시 이상재 생가 마을. 생가는 서천군이 독립운동가 유적지로 잘 관리해 반듯했다. 이른 아침 종지교회 이학준 목사를 만났다.

“당시 월남은 이곳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원로였어요. 월남은 영접 후 홍산(현 부여군 홍산면) 현감으로 있던 아들 승인에게 고향에 교회를 세우라고 명했죠. 그래서 유지들과 마을 독지가 김영성씨가 힘을 합해 자생교회를 세웠습니다. 미국 남장로교 군산본부 선교사들이 금강줄기 따라 교회를 세워나갔던 양상이었죠.”

이후 종지교회는 유성열 장로를 중심으로 임시 당회장 불(한국명 부위렴), 매커첸(매요한) 등이 순회설교 하면서 조직교회로 성장한다.

“종지교회 교인 등이 한산 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첩보에 일경이 마산면에서 읍내로 진입하는 길에 바리케이드를 쳤어요. 만세운동 가려던 사람들이 종지교회로 몰렸고 이어 전열을 가다듬어 신장리 장터로 간 거죠.”

이 목사가 일경의 만세운동 저지 능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만세운동 후 교회는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무엇보다 일경이 교인 뒷조사 등을 통해 교회를 분열시켰다. 1929년 전북노회록은 종지교회가 폐당회됐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폐당회를 딛고 이내 일어섰다.

1919년 이상재는 3·1운동 배후 인물로 왜경에 검거됐다가 6개월 만에 석방됐다. 그리고 이듬해 3·1운동 직후 일제 탄압상을 조사하러 온 미국 국회의원조사단을 맞이하여 대규모 시위를 단행한다. 또 기독교 지도자로서 YMCA 연합회장에 당선된다.

그리하여 월남은 죽기 전까지 YMCA 운동과 신간회 등을 통해 항일 투쟁을 벌이다 1927년 4월 서울 재동에서 생을 마감한다. 20만 인파가 몰린 사회장을 마친 운구는 한산 선영에 모셔진다. 고향에 복음의 씨를 뿌린 그의 생은 죽어서도 전도로 살아있다.

종지교회 이학준 목사 “113년 역사 토착교회 자부심… ㄱ자 예배당 못살려 아쉬워”

“아쉽죠. 다들 먹고살기 바쁠 때여서 미처 보존까지 생각을 못했을 겁니다.”

종지교회 이학준(48) 목사는 1960년대 말 철거된 ‘ㄱ(기역)’자형 종지교회 예배당이 헐린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 예배당은 1904년 교회 설립 직후 강경읍의 한옥 해체 목재를 금강과 금강 지류를 통해 마을 앞까지 배로 실어와 건축했다. 남녀 구분을 위한 기역자 한옥 교회였다. 지금도 금강 건너 익산시 금산교회와 두동교회에 기역자 교회가 기독교 역사유물로 남아 있다.

“60년대 지역교회, 지역사회, 정계를 중심으로 ‘월남 이상재 기념교회’를 헌당하자는 모금운동이 일었어요. 박정희 대통령도 금일봉을 하사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념교회’ 명칭 문제를 놓고 초기 교인 후손 간에 의견 조율이 안 됐답니다. 결국 ‘종지교회 성전건축’으로 마무리됐어요. 그런 과정에서 초가 기역자 예배당을 살리지 못한 거죠.”

종지교회는 113년 역사만큼이나 교인이 노령화됐다. 한때 500여명 이상이 북적대던 마을은 100명 남짓하고 교인 또한 30∼40명으로 줄었다. 2002년 부임한 이 목사는 “시골교회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고령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작년에 일곱 분, 지난주 두 분이 운명을 달리하셨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우리는 크리스천 독립운동가 이상재 선생이 태어난 곳의 토착교회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죽어 사는 생명이 복음이잖습니까.”

서천=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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