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밥사주세요" 옛말..'밥약' 두려운 대학가

이슈팀 이재은 기자 2017. 3. 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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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 대학가]<2>선후배 온정문화 '밥약', 불황·취업난에 부담.."차라리 안먹고 안사"

[머니투데이 이슈팀 이재은 기자] [편집자주] 새학기를 맞는 봄이 성큼 다가왔다. 하지만 달콤한 봄바람에 설레며 캠퍼스에서 청춘을 예찬하던 대학가는 옛말이다. 불황과 취업한파로 학생들의 표정은 더없이 어둡다. 비싼 등록금에 월세, 학기 초 지출해야하는 각종 비용들 탓에 학생·학부모 허리는 휘어간다. "밥 사달라"는 후배가 부담스러워 선배가 후배를 피해다니는 촌극이 벌어지는가 하면 이 모든 것을 등지고 '아웃사이더(나홀로 생활)'를 자처하는 이도 있다. 새학기 힘겨운 청춘을 보낼 대학생들의 현실을 3회에 걸쳐 짚어봤다.

[['춘래불사춘' 대학가]<2>선후배 온정문화 '밥약', 불황·취업난에 부담…"차라리 안먹고 안사"]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새내기들이 교정을 거니는 모습(사진은 기사내용과 무관)/사진= 뉴스1

#대학생 박소연(21)는 지난해 이맘때를 생각하면 악몽 같다. 선배가 된다는 생각에 설레며 신학기를 맞았지만 "선배님, 밥사주세요"라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다가와 휴대전화 번호를 묻는 후배를 볼 때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박씨는 "아르바이트로 벌어 둔 생활비는 바닥이 나는데 밥 사달라는 후배들은 많고,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하나 진땀을 뺐다"며 "동기 중 몇몇은 이런 '밥약(밥 사주는 약속)'이 부담돼 과나 동아리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배가 후배를 챙기는 온정 문화로 여겨졌던 '밥약'이 선후배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부담으로 변하고 있다. 새학기 신입생이 들어오면 1년 먼저 입학한 선배들은 새내기들에게 밥을 사주며 캠퍼스 생활에 대해 조언하며 서로 자연스레 친분을 쌓았다. 하지만 경기불황과 취업난에 제 앞길도 막막한 대학생들은 더이상 후배를 챙길 경제적·심리적 여유가 없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등록금과 학원비, 월세, 생활비를 대기에도 턱없이 부족해 밥값은 늘 뒤로 밀리기 일쑤다.

알바몬이 4년제 대학생 3605명을 대상으로 '빚(부채)'을 조사한 결과 대학생 3명 중 1명이 평균 2580만원의 빚이 있었다. 빚을 진 이유(복수응답)로는 '학비(등록금) 마련'이 82.3%로 1위를, '개인생활비'가 34.0%로 2위를 차지했다. 또 대학생 포함 20대 4명 중 1명은 현재 2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최저시급은 6470원에 불과하지만 대학가 밥값은 이를 훌쩍 넘는다. 그렇다고 후배들을 가격이 저렴한 학식(학교 구내식당)에 데려가자니 선배 체면이 안선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국어교육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김모씨(22)는 "밥약 문화가 불편해 처음부터 선배한테 얻어먹지도 않았고 후배들도 안사줬다"며 "사실 대학생들끼리 서로 돈 없는 것 뻔히 알지 않냐"고 반문했다.

이번에 서울의 한 사립대학교를 졸업한 박모씨(25)는 학생회 활동을 했던 대학 2학년 때를 떠올리며 "밥을 사달라는 새내기들에게 다 사주다보니 한달 200만원 넘는 돈을 밥약에 썼다"고 밝혔다. 그는 "1시간여 되는 점심시간에 후배 10여명씩을 사줬다”며 "사실 내가 밥을 사줬던 후배들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박씨는 "주변에 밥약을 위해 적금을 드는 친구도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고려대 대나무숲 페이스북 캡처.

상황이 이렇다보니 좋아하는 후배만 골라 밥을 사주는 편애를 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후배와 밥약을 하지 않기 위해 일종의 '갑질'을 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달 22일 고려대 대나무숲에는 "선배도 번호 주기 싫은 후배가 있다. 굳이 선배가 맘에 안들고 별로인 후배들한테까지 힘을 써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면서 "번호 주기 싫은 후배에겐 내 전화번호 맞히기 게임(업다운)을 해서 맞히지 못하면 술을 먹이는 식으로 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밥을 사달라는 후배를 두고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순 없지 않냐"며 반문했지만, 이 글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널리 퍼져 논란이 일었다.

/사진=서울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밥을 얻어먹는 신입생들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밥약이라는 관습은 알지만 같은 대학생 처지에 선배한테 밥 사달라고 하는 게 정말 맞는지 고민스럽다.

최근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17학번 새내기들은 각 대학 온라인 게시판에 "밥약 잡았는데 진짜 선배한테 연락해도 되나요?", "선배가 화났네요. 연락 안한다고. 다짜고짜 밥 사달라고 하기 그래서 연락안했던 건데" 등의 글을 올리며 혼란스러움을 토로하고 있다.

'밥약'은 90년대 들어 생긴 일종의 대학생활 의례다. 당시 학생운동이 희미해지고 학과 생활을 벗어나는 개인이 늘어나면서, 밥 사주기 문화는 약해진 대학 공동체 의식을 유지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경기불황과 취업난에 대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이 팍팍해지자 '밥약'은 이제 선·후배 모두에게 부담스런 대상이 됐다.

졸업을 1학기 남겨두고 취업준비를 위해 휴학 중인 대학생 최모씨(26)는 "신입생 때 선배들과 밥 먹으면서 들었던 조언도 많았고 실제 대학생활에 도움도 많이 받았다"며 "예전엔 밥사달라는 후배들이 예뻐보였다고 하지만 선배가 된 지금은 정작 후배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 미안하고 씁쓸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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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팀 이재은 기자 jennylee1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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