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이원근

박민 2017. 2. 2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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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첫 영화 <여교사> 와 <그물> 이 공개됐고, 영화 <환절기> 와 <괴물들> 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원근은 지금 배우로서 많은 걸 배워가며 후회 없을 20대를 치열하게 지나고 있다.
안에 입은 화이트 셔츠와 베이지 톱 모두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블루종 닐 바렛(Neil Barrett).

이원근이 입을 열면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말이 느리고 크진 않지만 묵직한 목소리 때문에 자연스레 집중하게 된다. 키 크고 얼굴 작은 전형적인 요즘 남자의 모습에 느릿한 말투로 혼자 극장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꽃꽂이를 배우고 연극을 보러 다니며, 빠르게 달리기보다는 천천히 생각하며 걷는 걸 더 좋아한다고 자신의 취향을 이야기한다. 겉모습을 보고는 좀처럼 짐작할 수 없는 취향들. <여교사>의 김태용 감독은 이원근을 캐스팅한 이유 중 하나로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을 들었다.

그렇게 그는 진심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영화 데뷔작에서 두 여교사의 팽팽한 심리 싸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언제고 끊어질 것 같은 불안감은 아마도 그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데뷔작부터 제 몫을 너끈히 해낸 이원근은 자신을 달리는 토끼를 쫓아가는 거북이에 비유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꽤 빠르다. 지난해 김기덕 감독의 <그물>에 이어 올해에는 <환절기>와 <괴물들>, <그대 이름은 장미>가 연이어 개봉하고 조만간 새로운 드라마도 시작할 참이다. 지금껏 연기한 작품과 앞으로 보여줄 작품에서는 배우는 배우로, 자신이 선택한 길이 옳다는 믿음을 가지고 후회 없을 20대를 그렇게 살아가는 중이다.


스트라이프 셔츠 J.W. 앤더슨(J.W. Anderson), 네이비 팬츠 웨일스 보너(Wales Bonner), 구두 닥터마틴(Dr. Martens).

인스타그램 포스트의 대부분이 영화에 관한 얘기다. 오래전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성격이 차분한 편이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무언가 하는 걸 좋아한다. 드라마 보는 것도 좋아하고. 학창 시절부터 극장에 가는 걸 좋아 했는데 그래서 연기를 시작한 건 아니다. 영화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 재미있다, 재미없다, 좋다, 나쁘다 정도만 생각했지. 이제야 좀 다른 관점으로 영화를 보고 있기는 하다. 나라면 저런 상황에서 이렇게 해봐야지, 이런 식으로.

영화를 보는 것만큼 연기하는 것도 즐거운가? 어렵다. 배우는 다른 사람을 연기한다는 면에서 일종의 특권을 누리는 것 같다. 내가 나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다른 인물을 보여주니 말이다. 모든 사람이 각자 고유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 성격을 감춘 채 다른 인물의 감정을 채워가며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이 힘들긴 하다. 뭐든지 배우는 건 쉽지 않으니까. 어떤 직업을 가졌건 배움을 멈추면 성장할 수 없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늘 배우는 배우이고 싶다. 경험 많은 선배뿐 아니라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것은 늘 있다. 여전히 배울 것이 많은 연기가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즐겁다. 재미를 느끼는 것과는 좀 다른 의미인 것 같다. 그러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다. 다만 또 다른 나를 하나씩 알아가는 것에 만족한다.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기는 아직이르다.

배우가 되고 나서 영화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겠다. 전에는 캐릭터들의 연기가 보였다면 이제는 주변 요소가 조금씩 보인다. 미술 소품도 보이고 촬영감독은 왜 저 장면을 저렇게 찍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왜 저 인물은 저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는지 알고 싶을 때도 있고 조명에도 관심이 생긴다. 다른 배우의 연기를 눈여겨보기도 한다. 어떤 배우가 영화에서 어떤 감정일 때 눈을 만지면, 비슷한 감도의 감정 연기를 할 때 그 배우의 연기를 참고하는 거다.

최근에 좋게 본 영화는? <녹터널 애니멀스>. 세 번 봤다. 너무 좋았다. 영화 자체도 좋고 배우의 연기는 말할 필요도 없고. 궁금한 게 많아 GV(관객과의 대화)에도 갔다. 영화를 보면 강조되는 색이 있는데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긴장감 넘치면서도 왠지 모르게 외로운 음악도 좋았다. 언젠가 내가 연기하고 싶은 정서와 닮은 지점이 있는 영화다.


셔츠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구두 알도(Aldo),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배우가 아닌 오롯이 관객으로서 영화의 매력이 뭔가? 친구들과 시끌벅적 놀다가도 영화 보러 가자고 한다. 술 마시다가도 술 마셨으니 영화 보러 가자고 한다. 상영 전에 나오는 광고도 없앴으면 좋겠다. 너무 산만하지 않나. 예술영화 전용관에 가면 광고 없이 고요히 있다가 암전이 된 후 영화가 시작되어 좋다. 불이 꺼졌다가 영화가 시작되는 그 순간이 참 좋다. 떨리고 설레고.

활동적인 취미는 없나? 음… 없는 것 같다. 눈으로 자연과 교감하는 것도 좋아한다. ‘너의 앙상한 나뭇가지는 어쩌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감정 기복이 별로 없어 화를 잘 내지 않는데 남들이 보기엔 재미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정작 나는 재미있다. 조용한 시간을 좋아해서 대본도 이른 새벽에 보는 편이다. 새벽 서너 시의 기운이 마음에 든다. 너무 조용하면 이명이 느껴져서 음악을 작게 틀어 놓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꽃꽂이 학원에 다녔다. 부산에서 영화 촬영을 끝내고 돌아와 한 달 정도 다녔는데 봄이 오면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화사한 색깔의 꽃을 만지고 싶었는데 겨울이어서 원하는 색감의 꽃이 없었다. 뭐든지 혼자 하는 데 거부감이 없다. 혼자 영화 보는 건 물론이고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뭔가를 배우거나, 혼자 잘한다. 연기를 시작하고 내 기운이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꿈이 특별히 없었을 때에는 그냥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배우가 되고 나니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해보고 싶은 게 생겼을 때 느껴지는 기운이 좋은 것 같다. 물을 무서워해서 수영을 할 줄 모르는데 올여름에는 스킨스쿠버도 배워볼 작정이다.

얼마 전에 <환절기>에 함께 출연한 배종옥 선배의 연극을 보러 갔던데, 작품을 하면서 만난 배우들과 인연이 이어지는 편인가? 늘 인간관계에 고민이 많다. 배종옥 선배님은 주말 드라마에 이어 <환절기>에서 한 번 더 함께 연기했다. 연기뿐 아니라 삶 자체와 나의 길에 대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신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에 치우친 얘기를 하시는 건 아니다. 선배가 내 나이일 때 느꼈던 것들, 내가 지금 느낄 만한 것들을 하나하나 말씀해주신다. 길을 알려주기보다 늘 편히 생각하라고 하신다. 배종옥 선배님은 참 편하고 좋으신 분이다. 선생님이 출연한 연극 <꽃의 비밀>을 혼자 보러 갔다.

많은 이야기 중에 유독 마음에 와 닿는 조언이 있었겠지. 처음 모습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연기하며 많은 배우를 보셨을 테고 그중에는 좋은 배우도 있지만 아쉬운 배우도 있었을 것이다. 연기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나 본래 심성이 변하면 변화를 인지한 나 자신도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이 안타깝지 않겠나.

이원근은 어떤 심성을 지닌 사람인가?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하지도 않고 잘 못 한다. 작은 말에 상처받고 상처를 훌훌 털어 내지도 못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시끄러운 것보다 조용한 걸 더 좋아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보다 편한 장소에 머무는 게 좋다. 누군가에게 선뜻 먼저 다가가지도 못한다. 내가 다가가면 괜히 상대방이 불편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면 좋을 텐데 그러질 못하니 답답할 때도 있다.


니트 스웨터 발렌시아가(Balenciaga)

요즘 가장 큰 고민이 뭔가? 내가 말을 잘 안 한다. 이상하게 말하는 게 어색하다. 말을 하지 않으니 생각이 많아지고 더 차분해지면서 더 말을 안 하게 된다. 아마 혼자 다니기 좋아하고 집에서도 혼자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나도 전처럼 막 반가워하질 못하겠다. 곧 드라마를 시작해 대본 연습도 해야 하는데 걱정이다. 그간 너무 우울한 영화만 해서 그런 걸까?

연기를 시작하고 가장 신난 때는 언제인가? 내가 나온 영화를 처음으로 볼 때. 엄청 떨리는데 자꾸 웃음이 나오고 좋다. 만감이 교차한달까.

아직은 서툰 모습이 많이 보일 때다. 서툰 자신을 보기 두려울 수도 있겠다. 사람이 매번 옳은 길로 갈 수 없다. 지름길인 줄 알고 갔는데 그 길 끝에 도착했을 때 다시 양 갈래 길이 나올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잘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된다. ‘토끼와 거북이’를 보더라도 그렇다. 토끼가 매우 빠르고 유능하지만 저 멀리서 거북이가 기어오는 모습을 보고 방심하면 어느 순간 거북이가 그 대단한 토끼를 앞지르는 거다.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꾸준히 걸으면 되는 거다. 나도 마찬가지다. 옳은 길로 가는 나를 발견 할 수 있다면, 길을 잃지 않으면 만족할 거다.

이 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배우로서 불안한 시기일 것 같다. 고민이 없을 순 없다. 하지만 하지 않으려고 한다. 고민의 근원이 열등감이든 아니든 편히 생각하는 중이다. 다른 배우를 질투하고 시기하고 비교하는 건 의미 없다. 나보다 더 좋은 에너지를 갖췄기에 잘되는 것 아니겠나. 삶을 대하는 지금의 태도를 잃지 않으면 나도 가질 수 있는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슬로 스타터라는 말도 있지 않나.

20대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나? 후회 없이 살고 싶다. 언제고 뒤돌아 보더라도 나의 20대는 후회 없이 살았노라, 최선을 다했노라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있는 힘을 다해 20대를 치열하게 보낸다면 30대의 시작이 좋지 않겠나. 지금 충분히 치열한가? 당연하다. 치열하지 않으면 안 되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재능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계속 뭔가를 해야 한다. 생각하며 느끼고 배우고. 그래야 한다.


라이더 재킷과 안에 입은 티셔츠, 팬츠 모두 문수권(Munsoo kwon), 블랙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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