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가 건강 위해 꼭 먹었다는 '이 음식'

박태상 2017. 1. 19.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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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상의 섬 문화탐방8> 14세기 유럽의 상권을 뒤흔들었던 섬-베네치아

[오마이뉴스박태상 기자]

▲ 바다 위의 도시 베네치아 대개 베네치아를 ‘물 위의 도시’로 부르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바다 위의 도시’로 수정하여 불렀다. 그녀가 지은 『바다의 도시 이야기 ?베네치아공화국 1천년의 메시지』 상, 하권을 일독하기를 권한다.
ⓒ 박태상
한국을 벗어나, 섬 문화탐방을 3년만에 다시 유럽으로 떠난다. 유럽 섬 문화 탐방의 출발은 베네치아와 슬로베니아 피란항으로 이어진다. 베네치아는 삼각주와 갯벌 위에 만든 물의 도시다. 유럽 첫 섬 문화탐방지로 베네치아를 선택한 이유는 존경하는 독일의 예술가이자 사상가인 괴테 때문이다.
괴테는 어릴 때부터 이탈리아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에 대한 유혹이 컸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돌아온 부친이 준 '곤돌라 모형' 때문이었다. 괴테는 1786년 9월부터 1788년 4월까지 무려 1년 7개월 동안 이탈리아 곳곳에서 문화탐방을 했다. '바람의 달인(필자 닉네임)'이 세계 문화탐방을 하는 이유도 괴테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리알토 다리 베네치아의 상징물이다. 괴테가 1786년 9월 29일 베네치아에 입도해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바로 리알토 다리이다. 그는 <이탈리아 기행>에서 “도시는 크고 작은 운하들이 이리저리 교차되고 있지만, 그 위로는 또 크고 작은 다리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탄성을 자아냈다.
ⓒ 박태상
괴테는 1786년 9월 29일에 배를 타고 베네치아에 입성했다. 식사를 마치고 도시 전체의 인상을 확실히 포착하기 위해 안내자도 없이 혼자서 동서남북의 방위만을 확인하면서 도시의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제일 처음 발견한 것은 "도시는 크고 작은 운하들이 이리저리 교차되고 있지만, 그 위로는 또 크고 작은 다리들이 연결되어 있다"(괴테, <이탈리아 기행>)는 사실이었다. 괴테는 운하와 그 주교각인 리알토 다리를 쉽게 찾았다.

그 때만 해도 양편의 베네치아의 두 본섬을 단 하나의 리알토 다리만이 연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재미있는 것은 괴테도 남자신사인지라, 아름다운 미녀들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다리를 떠나 선착장으로 내려갔다는 고백이다.

잘 차려입은 여인들이 검은 베일을 쓴 채 '축복의 대천사상 교회'로 가려고 여럿이 떼를 지어 나룻배로 물을 건너는 모습이 아주 장관이었다는 것이다.
▲ 베네치아의 ‘수로’ 베네치아는 118개의 섬과 150개의 운하, 378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한가운데를 흐르는 대운하가 있는 섬이다.
ⓒ 박태상
베네치아는 118개의 섬과 150개의 운하, 378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한가운데를 흐르는 대운하가 있는 섬이다. 대운하의 공공 교통수단은 수상 버스다.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는 끝 지점인 로마 광장의 선착장 산타 키아라를 1번으로 하여 각각의 선착장에 번호가 매겨져 있다.

AD 5세기 경 훈족의 왕 아티라에 쫓겨 바다로 달아나 그대로 섬에 정착하게 된 베네치아족의 후예들, 이들은 9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강력한 왕국을 세웠다. 특히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에 베네치아 상인들은 수송과 병참을 맡아 큰 이익을 얻게 된다.

훈족의 침입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는 <바다의 도시 이야기 ?베네치아공화국 1천년의 메시지> 상권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틸라가 쳐들어온다!"
"훈족이 밀려온다!"
"아퀼레이아도 화공을 당했다. 아녀자들까지 몰살당했다더라."
야만족은 무섭다. 저항한 자도 저항하지 않은 자도 모두 죽여버린다. 금은보화를 내밀어도 용서해주지 않는다.....(중략)....

때는 로마제국 말기였다. 야만족의 침입이 '로마의 평화'에 친숙해져 있던 유럽 사람들을 공포의 밑바닥으로 처넣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은 그 광포함으로 다른 어떤 야만족보다도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 베네치아 관광통행세 베네치아를 입도하는 모든 차량과 관광객들은 통행세를 내야 한다. 이러한 관광수입은 엄청난데, 이러한 막대한 수입으로 도시 전체가 물에 조금씩 잠기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해소를 위해 우리 돈으로 55조원을 투입한 ‘모세 프로젝트’가 시행중이다. 2016년 현재 공정은 30%에 도달하고 있다고 한다.
ⓒ 박태상
13-14세기까지 융성했던 베네치아는 15세기부터 몰락의 길을 걸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 1810년 베네치아에 도착했을 때, '아드리아 해의 여왕'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도시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시인 바이런은 궁전들이 "물가로 산산이 무너지고 있다"고 묘사했다. 베네치아의 몰락은 15세기에 접어들어 포르투갈이 베네치아의 향료 무역권을 빼앗던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0년이 지나고, 캄브라이 동맹은 본토의 중요 도시에 대한 베네치아의 지배력을 앗아가 버렸다.

베네치아가 500년에 걸쳐 몰락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유럽문화사에서는 여전히 가장 멋진 도시로 설명되고 있다. 수 세기 동안 베네치아는 시인, 화가, 극작가들의 고양된 비전을 높은 경지로 끌어올렸다.

<성스러운 알레고리>(1504년경, 우피치 미술관 소장)의 벨리니, <모세의 시련>(1505년경, 우피치)의 조르지오네, 티티안, <레다와 백조>의 틴토레토, <황제상의 건립>의 티에폴로, <운하 위 다리의 환상>의 과르디와 같은 재능 있는 르네상스기(14 -16세기)의 베네치아파 화가들을 배출한 도시가 바로 베네치아다.
▲ <사계>의 비발디가 세례 받은 성당 문화탐험은 비발디가 유아세례를 받았던 조그만 성당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리니스트를 아버지로 두었던 비발디는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의 초보 교육을 받았고, 레그렌찌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 박태상
베네치아 출신으로 유명한 명사로는 <사계>의 작곡가 비발디, 상인이자 탐험가인 마르코폴로, 그리고 여성들을 유혹하는 데 일인자였던 카사노바 등이 있다. 베네치아 문화탐험은 비발디가 유아세례를 받았던 조그만 성당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리니스트를 아버지로 두었던 비발디는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 초보 교육을 받았고, 레그렌찌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20세 무렵에 성직에 들어갔으나 머리털이 붉었기 때문에 '빨강 머리의 신부'라고 놀림을 받았다.

그는 1703년부터 40년까지의 오랜 기간에 걸쳐 베네치아 자선 병원 부속의 여자 음악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수많은 협주곡 중에서 '사계'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 중 바이올린 협주곡집과 '조화의 영감'이라는 표제가 붙는 작품 3의 12곡이 유명하다. 협주곡만 해도 450곡이나 작곡했다.
▲ 푸근한 인상의 베네치아 일반 주민 할머니와 ‘인증샷’ 여행 중에 베네치아 일반 사람들의 생활상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수로로 연결된 골목길을 통해 이루어진다.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어부도 만날 수 있고, 골목에서 뜨개질을 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도 쉽게 만날 수 있다.
ⓒ 박태상
마르코폴로는 아버지와 삼촌 형제의 동방여행에 17세에 뒤늦게 참여했다. 마르코 폴로는 17년 간 원나라에 머물면서 수도인 대도(大都 베이징)는 물론, 오늘날 중국의 산시(山西), 산시(陝西), 쓰촨(四川), 윈난(雲南),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장쑤(江蘇), 저장(浙江), 푸젠(福建) 지역 등을 여행했다.

마르코 폴로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쿠빌라이칸의 깊은 신임을 받아 양저우(揚州)에서 관리로 일하기도 했다. 마르코 폴로 일행은 페르시아의 몽골 왕조 일한국으로 시집가는 원나라 공주의 호송단에 참가하여 수마트라, 말레이, 스리랑카, 인도 서남부 말라바르를 거쳐 페르시아의 호르무즈에 도착했고 1295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이들이 베네치아로 돌아오고 4년 뒤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동방무역로의 지배권을 둘러 싼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포로가 된 마르코 폴로는 제노바의 감옥에 갇혀 피사 출신 작가 루스티첼로에게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루스티첼로는 그것을 받아 적었다. 

약간 과장되었지만 이렇게 해서 출간된 것이 세계적인 명저 <동방견문록>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마르코폴로를 기념해서 베네치아 국제공항의 이름을 '마르코폴로 국제공항'으로 명명했다.
▲ 카사노바가 갇혀있던 감옥 원래 카사노바는 신부로 부임했으나 추문으로 인해 투옥되었다. 1756년 탈옥한 그는 생애의 2/3를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다.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12권으로 된 방대한 『회상록』을 펴내기도 했다. 일설에는 그가 파리에서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았다는 루머도 있다.
ⓒ 박태상
▲ 플로리안(Florian) 카페 산마르코 광장에 1720년에 문을 연 카페로 괴테, 바이런, 토마스 만이 커피를 마셨다고 해서 명성을 얻은 카페라서 값이 매우 비싸다. 에스프레소 한잔이 7유로에 밴드가 연주를 한다고 해서 자릿세 6유로를 따로 받는다. 카사노바가 근처에 있는 감옥을 탈옥해서 커피를 마셨다고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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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카사노바가 잡혀있었던 감옥과 그가 사교계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수많은 여성들을 유혹하고 농락했던 건물이다. 카사노바는 1725년 4월에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흔히 4월을 가장 잔인한 달(T. S. 엘리어트)이라고 해서 그런지 4월에 태어난 카사노바는 귀족, 하녀, 수녀 등 100여 명의 많은 여성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다.

원래 카사노바는 신부로 부임했으나 추문으로 인해 투옥되었다. 1756년 탈옥한 그는 생애의 2/3를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다.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12권으로 된 방대한 <회상록>을 펴내기도 했다.

일설에는 그가 파리에서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았다는 루머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산마르코광장에서 가까운 곳에 3성급인 카사노바 호텔(Hotel Casanova Venezia)이 있다는 사실이다.
▲ ‘굴 순두부’ 카사노바가 굴을 즐겨 먹은 사실이 인구에 회자된다. 굴은 통영에서 가장 많이 채취된다. 굴에는 단백질, 철분, 비타민B군이 풍부하지만 대부분 굴하면 정력에 좋은 대표 식품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아연' 이 풍부하게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연은 정력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당뇨, 고혈압, 면역관리에 도움이 된다. 굴 100g에 아연 16mg이 함유 되어있어 굴 두 알이면 하루 아연 필요량 섭취가 가능하다고 의사들은 추천한다.
ⓒ 박태상
▲ 싱싱한 회집의 필수 한국에서 회가 싱싱하다고 소문난 집에는 반드시 산낙지, 굴, 조갯살 등이 필수적으로 뒤따라 나온다. 굴에는 '아연' 이 풍부해 남성의 정력 증진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 박태상
카사노바가 인기가 있었던 이유로는 깔끔한 외모, 뛰어난 언변에다 시인, 바이올리니스트, 엔지니어, 마술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친 탁월한 능력, 수학과 화학에 일가견을 가진 명석한 두뇌(로또를 세계 최초로 창안했다고 함), 패션 감각(버버리 목도리 디자인을 그가 처음으로 디자인했다고 함) 등이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카사노바는 '아름다움과 자유'에 대해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만나는 여성마다 미모를 칭찬해주고 매너 있게 대한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다고 한다. 카사노바가 건강을 유지하려고 '굴 음식'을 즐겼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피임을 잘해 관계를 맺은 단 한명의 여성도 피임시키지 않았다는 전설을 남겼다. 우리나라에서도 1950년대에 카사노바를 모방한 '박인수 사건'이 일어났다.

1954년 4월부터 1년여 동안 해군 헌병 대위를 사칭한 박인수가 이화여대생을 비롯해 70여명의 여인과 간음한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은 희대의 사건이 바로 박인수 간음사건이다.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외모를 가졌지만 중학교 중퇴 학력의 박인수는 헌병 부사관으로 근무하던 중에 익힌 사교춤의 실력으로 국회의원과 고위관료들의 딸 등 수많은 여성들을 유혹했다.

법정에서 검사가 혼인빙자 간음을 주장하자, 이를 부인하고 박인수는 '자신은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고, 여성들이 스스로 몸을 제공했다'고 하고 그 많은 여대생은 대부분 처녀가 아니었다고 당당하게 진술하여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 산마르코대성당과 산마르코광장 다섯 개의 거대한 돔과 입구 정면의 화려한 모자이크, 여러 가지 색상의 기둥과 대리석 조각상은 콘스탄티노플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건축 기법과 재료를 이용한 것이다. 산마르코광장에서 약속장소로 유명한 곳은 종탑과 시계탑이다.
ⓒ 박태상
베네치아 관광을 하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바로 산마르코 광장과 두칼레 궁전이다. 산마르코 대성당은 서기 828년, 성인 마르코의 유골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와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한 건축물이다.

산마르코 대성당은 중세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는데, 건물이 웅장하고 뛰어난 예술품으로 장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 건축의 장점을 조화롭게 구성하여 베네치아 양식이란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섯 개의 거대한 돔과 입구 정면의 화려한 모자이크, 여러 가지 색상의 기둥과 대리석 조각상은 콘스탄티노플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건축 기법과 재료를 이용한 것이다. 산마르코광장에서 약속장소로 유명한 곳은 종탑과 시계탑이다.
▲ 두칼레궁전 현재 박물관으로 개방되고 있는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반복적인 아치와 회랑이 베네치아 고딕 양식의 간결미를 잘 보여 준다. 소장품으로 르네상스 화가 틴토레토의 〈천국〉, 산소비노의 조각 〈마르스〉 상과 〈넵투누스〉 상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 박태상
현재 박물관으로 개방되고 있는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반복적인 아치와 회랑이 베네치아 고딕 양식의 간결미를 잘 보여 준다. 한 때,물의 도시를 지배했던 권력자들이 살았던 곳인데, 지금은 수많은 그림과 유물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소장품으로 틴토레토의 <천국>, 산소비노의 조각 <마르스> 상과 <넵투누스> 상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두칼레 궁전과 감옥 사이에는 운하를 연결해 주는 다리가 있는데, 죄인들이 감옥에 갈 때 이 다리를 건너며 탄식했다고 해서 '탄식의 다리'라고 이름 지어졌다.
▲ 탄식의 다리 두칼레 궁전과 감옥 사이에는 운하를 연결해 주는 다리가 있는데, 죄인들이 감옥에 갈 때 이 다리를 건너며 탄식했다고 해서 ‘탄식의 다리’라고 이름 지어졌다. 탄식의 다리 아래로 관광객을 태운 곤돌라가 수없이 지나가고 있다.
ⓒ 박태상
여행 중에 베네치아 일반 사람들의 생활상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수로로 연결된 골목길을 통해 이루어진다.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어부도 만날 수 있고, 골목에서 뜨개질을 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좁은 수로에서 관광객들을 태우고 뱀장어처럼 미끈한 자태로 빠져나가는 곤돌라의 풍경은 아늑한 느낌을 준다.
▲ 액세서리 목걸이와 귀걸이 산마르코광장은 회랑으로 연결된 상가 건물로 둘러싸여있다. 웬만한 유럽 건물에서 화장실은 0.5유로의 돈을 받는다. 그런데 물건을 사면 화장실은 공짜다. 여성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앙증맞은 작은 가면과 싼 액세서리 보석을 파는 소품가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점이 특징이다.
ⓒ 박태상
산마르코광장은 회랑으로 연결된 상가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이스크림을 사먹어야 공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앙증맞은 작은 가면과 싼 액세서리 보석을 파는 소품가게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점이다.
베네치아를 거론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가면축제이다. 베네치아 카니발은 약 800년 전 베네치아 공화국과 아퀼레이아 대주교의 관할국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축제였다. 처음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였지만 점차 민속공연과 전야제 등 밤새 카니발을 여는 흥겨운 잔치마당으로 자리잡아 나갔다.
▲ 베네치아의 마스코트, ‘가면’ 처음 카니발이 열릴 당시에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축제가 열리는 기간만큼은 신분의 차이 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축제를 즐기게 하려고 가면을 쓰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 박태상
처음 카니발이 열릴 당시에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축제가 열리는 기간만큼은 신분의 차이 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축제를 즐기게 하려고 가면을 쓰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한편 이탈리아를 상징하고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문화상품은 바로 유리공예이다.
1291년까지만 해도 유리 공예는 산마르코 대성당이 있는 본섬에서 크게 번성하였지만, 베네치아 왕실에서 작업장을 무라노 섬으로 옮기도록 명령을 내렸다. 공해 발생을 핑계로 댔지만, 사실은 유리 공예로 많은 돈을 벌게 되자 유리 공예 기술이 다른 지역이나 나라로 빠져나가는  유출을 막기 위해서였다. 장인들이 이주한 13세기 후반 이후 무라노 섬은 명실상부한 유리 공예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일본 '오타루'의 유리공방 일본이 이탈리아와 13 ~ 14세기 국제무역을 하면서 장인들을 초빙해 전수받은 대표적인 상품이 유리공예이다. 삿포로에 가면, 유리공방이 많다. 오타루의 유리공방은 일본을 상징하는 영화인 <러브레타>에도 등장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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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타루 유리공예박물관 전시작품 일본의 유리공예 제조기술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미 13 ~ 14세기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유리공예공방의 장인들을 초빙해 기술을 전수 받았기 때문이다.
ⓒ 박태상
유리 공예의 대표 기법은 모래와 자갈에서 얻은 규사라는 원료에 안료를 넣고 열로 가열한 후 긴 빨대를 이용하여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가정에서 사용하는 꽃병에서부터 여성들의 액세서리와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이 상점에 진열되어 관광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일본이 이탈리아와 무역을 하면서 장인들을 초빙해 전수받은 대표적인 것이 유리공예이다. 삿포로에 가면, 유리공방이 많다. 오타루의 유리공방은 일본을 상징하는 영화인 <러브레타>(이와이 순지감독,나카야마 미호주연, 1999년 한국 개봉)에도 등장할 정도다. 또 하나 베네치아의 명성은 '베니스국제영화제' 때문에 얻어진다.

베네치아영화제는 리도 섬에서 매년 개최된다. 우리나라의 강수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아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2016년에 열린 제7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은 미국 뮤지컬영화 <라라랜드>(다미엔 차젤레 감독, 74회 골든글로브 7개부문 수상작)의 엠마스톤이 수상했다.

해가 기울어지자 버스에 탑승해서 베네치아를 벗어나 발칸반도로 넘어갔다. 저녁식사는 <꽃보다 누나>로 인해 유명한 관광지로 떠오른 슬로베니아의 '피란'에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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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13 ~ 4세기 유럽 상권을 장악했던 베네치아를 2016년 8월 22일 유럽문화탐방단 40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네 번째로 들어갔다. 여전히 아름다운 바다위에 떠있는 환상의 섬이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강수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추억의 도시이자, 비발디, 카사노바, 마르코폴로(미드로 2016년 인기 짱)가 출생했던 섬이다. 곤돌라, 수상택시, 산마르코광장,두칼레궁전도 멋지지만, 유리공예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일본에까지 전수한 창조의 도시이자 르네상스기 미술가 '베네치아파'를 탄생시킨 예술의 섬이란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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