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화산'서 마주친 난감한 새벽의 풍경

정수현 입력 2017. 1. 17. 18:2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계일주 인문기행 - 두 번째 편지] 인도네시아 브로모, 이젠 화산탐방

[오마이뉴스 글:정수현, 편집:김대홍]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워보려 합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말

여행의 첫 테마, 인도네시아 브로모화산과 이젠화산의 일출

 구름이 다 걷힌 낮에 바라본 브로모화산의 전경. 왼쪽 분화구에서 하얀 연기가 올라오는 산이 브로모화산.
ⓒ 정수현
"태산 일출을 보지 못하고 험한 얼음길을 내려오면서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산 위에서 떠오르는 해는 진정한 해가 아니다.' 동해의 일출도 태산의 일출도 그것이 그냥 떠오르는 어제 저녁의 해라면 그것은 조금도 새로운 것이 없다는 자위 같은 다짐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 보면 새로운 아침 해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띄워 올리는 태양이라야 할 것입니다. 어둔 밤을 잠자지 않고 모닥불을 지키듯 끊임없이 불을 지펴 키워 낸 태양이 아니라면 그것은 조금도 새로운 것이 못 될 터입니다."

당신이 보낸 마지막 엽서는 태산 일출에 대한 소회였습니다.

나는 본격적인 여행의 첫 테마로 인도네시아 브로모화산과 이젠화산의 일출을 선택했습니다. '처음', '시작', '다짐'.  이러한 낱말과 한짝을 이루는 세트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아마도 빼어난 경관과 함께 하는 일출이 아닐는지요? 여행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2017년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1월의 첫날은 아니었지만 달력의 첫 장이 시작된 신선한 느낌이 남아 있을 때 떠오르는 해를 보고 싶었습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상관 없음을 알아차렸지만, 나는 화산을 향해 가는 내내 분화구 속에서 해가 떠오를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고운 해는 저 깊은 땅 속에서 솟아나야 제격이라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있던 모양입니다. 어둠을 살라먹기 위해서는 마그마 정도의 뜨거움은 당연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로모화산과 이젠화산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입니다.  브로모화산은 6년 전에 마그마가 200m 분출될 정도의 폭발이 있어 인도네시아를 긴장케 했던 곳이고, 이젠화산은 분출하는 가스가 화산 자체의 뜨거운 열을 받아 불이 붙는 일명 '블루파이어'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두 화산을 모두 가는 일정은 보통 2박3일이 소요됩니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중앙쯤에 위치한 요그아카르타에서 동쪽으로 10시간을 넘게 달리면 브로모화산이 위치한 프로볼링고 지역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다시 차로 6~7시간은 이동해야 하는 곳에 이젠화산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1월에도 여지없이 인도네시아는 덥고 습했습니다. 그러나 화산은 해발 2000m가 넘는 고지대이기 때문에 새벽 일출 산행 때는 따뜻한 외투는 필수입니다.  브로모화산의 일출을 보기 위해 어둔 새벽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브로모화산과 주변의 몇몇 화산을 함께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이국땅이라고 해맞이 풍경이 다를 리 없습니다. 쌀쌀한 날씨와 출출한 배를 달래는 따뜻한 음료와 먹거리를 파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스마트폰과 카메라를 손에 든 사람들이 전망 좋은 위치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산행 시작할 때 흩뿌리던 빗줄기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출이 예정된 시간이 지나서도 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짙은 구름에 둘러싸여 사방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애써 위안을 해보지만 여기까지 힘들게 이동하여 올라온 보람을 찾지 못하는 것 같고, 언제 다시 이곳을 또 올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아쉬움은 컸습니다.

짧은 찰나의 빛남, 행복하게 받아들이다

 브로모화산의 일출. 비구름에 싸여 사방이 어둡다가 잠시 구름 너머로 해가 빛을 드러냈습니다.
ⓒ 정수현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고 구름이 걷힐 듯 주변이 밝아지고,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나왔습니다. 구름 너머로 해가 언뜻 보였습니다. '저 구름만 걷히면 해가 보이겠다. 사방이 환히 트이겠다'라는 기대감에 흥분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구름이 몰려들어 어두워졌고 환호성은 탄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순간 전망대에 있던 수백명의 사람들이 한마음이었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반응은 모두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 깊은 장면은 장엄한 해돋이의 장관은 아니었지만, 짧은 찰나의 빛남을 너무나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얼굴들이었습니다. 일출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은 달래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번에는 이젠화산의 블루파이어를 보기 위한 산행을 시작합니다.  블루파이어는 새벽 3~4시 사이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새벽 1시에 산행을 시작하는 힘든 일정입니다. 가파른 산을 올라 분화구가 나오면 다시 비탈진 경사길을 따라 한참 내려가야 합니다. '왜 이런 힘든 선택을 했을까' 하는 후회가 들 때 즈음, 가스레인지 불이 켜지듯 파랗게 일어나는 불꽃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젠화산 분화구의 일명 '블루파이어'
ⓒ 정수현
 분화구에서 유황을 채취하고 있는 모습. 분화구 주변은 독한 유황가스로 방독마스크 없이 서있기가 힘들다.
ⓒ 정수현
우리 같은 여행객들은 분화구에서 나오는 독한 유황가스의 연기를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방독 마스크를 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유황을 채취하는 현지 노동자들은 보호장구 하나 없이 작업을 하고 수십 킬로그램에 이르는 바구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가파른 산을 오르내립니다.

사전에 화산투어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면서 많은 블로거들이 그들의 열악한 노동현장에 대하여 아쉬움을 표현하는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현지 물가를 감안해야겠지만 하루 100kg의 유황을 채취하고 운반하여 얻는 수입이 2만원이 채 안된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나도 이젠화산에서 마주하는 '여행'과 '노동'이 뒤섞인 짙은 새벽의 풍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처음에는 무척 난감했습니다. 한쪽에서는 관광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힘들게 일을 하고 있고.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복잡했던 감정은 다른 차원의 생각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유황바구니를 들다, 허리만큼도 들어올리기 어려울 만큼 무거웠다

 이젠화산 분화구 반대 기슭의 모습. 유황을 담아 나르는 바구니와 녹색의 초목이 보인다.
ⓒ 정수현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 밀기가 미안해서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그리고는 온기가 남아 있는 유황을 보여주며 '이거 오리지날'이라면서 구입을 권했습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거절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바구니에 가득한 유황을 가리키며 몇 킬로그램이냐고 묻자, 나에게 한 번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허리만큼도 들어올리기 어려울 만큼 무거웠습니다. 그는 싱긋 웃고는 무거운 바구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유유히 분화구를 올라갔습니다.

노동여건과 정당한 보상, 더 나아가 사회구조의 문제라면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해야 할 주제일 것입니다. 나는 날이 밝아오는 새벽녘 그 땅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건강한 땀과 삶이 가지는 생명력에 주목하고 싶었습니다.

날이 완전히 밝아 돌아오는 길에 화산 분화구 반대편에 펼쳐진 일꾼들의 바구니와 푸른 빛으로 자라나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화산은 언제든 폭발의 가능성을 증명하듯 가스를 내뿜고 있었지만, 그 반대편 자락에서는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명들이 있었습니다.

화산의 일출은 당초 내가 기대했던 그런 광경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떠오르는 해를 기대하며 함께 긍정의 환호성을 울리는 사람들과 어둔 밤을 지새우며 일하는 사람들의 무심한 미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새날을 다짐하는 일출을 어디에서 기대하고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봅니다.

[지난 기사]신영복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2016년 12월 26일부터 시작하여 약 1년간의 일정으로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