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있다'는 조건, 남녀에 다르게 적용?

심혜진 2017. 1. 16.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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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내가뭄> / 애너벨 크랩

[오마이뉴스 글:심혜진, 편집:김대홍]

엄마가 없으면 밥 못 먹니? 열불이 난다

 "엄마가 이렇게 퇴근을 늦게 하면 식사를 어떻게 하세요?"라니, 엄마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걸까.
ⓒ pixabay
'한끼줍쇼'는 연예인들이 평범한 이들의 집에 찾아가 저녁 한 끼를 함께 먹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지난 방송 중 한 장면. 저녁 8시가 다 된 시각, 강호동과 이경규가 찾아간 집엔 아빠와 어린 아들만 있었다. 엄마는 야근 중이라고 했다. 그러자 강호동이 "엄마가 이렇게 퇴근을 늦게 하면 식사를 어떻게 하세요?"라고 물었다.

그 순간 내 입에선 "엄마 야근한다잖아~. 엄마 없으면 밥 못 먹어? 엄마가 밥 차려주는 사람이냐"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열을 올리는 나와 달리 남편은 별 일 아니란 듯 텔레비전에서 눈을 못 뗀다. 그랬다. 같은 상황에서 남편은 괜찮고, 나만 기분이 나빴다. 하긴, 남편만이 아니라 프로그램 속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편집자는 친절히 자막까지 달아주었다. 웃자고 보는 예능에 나는 마냥 웃을 수가 없다.

텔레비전이야 안 보면 그만이라지만, 문제는 이런 일이 일상에서도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쩌다 약속이라도 잡을라치면 친구들은 서로 "남편 밥은? 애들은?" 하는 질문을 주고받는다. 여행은 더 힘들다. 날을 정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이지만, 막상 여행을 가더라도 순탄치 않다.

여행지에서도 원격으로 남편과 아이들 밥과 일상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아, 일일이 이야기하려니 벌써 머리가 아프다. 한마디로, 밥을 안치는 남편은 있어도 그날그날의 식단을 고민하는 남편은 드물고, 청소기 '돌려주는' 남편은 있어도 집안 위생을 책임지는 남편은 드물다. 직장이 있든 없든 마찬가지다.

은근히 느껴지는 답답함과 억울함을 말로 설명하자니 똑 부러진 논리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불쾌한 감정만 내뱉자니 '투덜이'가 되는 것 같아 그냥 속으로 삼키고 만다. 이래서 '아내'들은 힘들다.

그러다 이 책 <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지음, 동양북스 펴냄)을 만났다. 신이시여! 왜 이제야 이 책을 내리셨나요! 책 제목은 '가뭄'이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 없어 답답했던 내겐 그야말로 단비 같이 반가운 책이었다.

평화학자이자 작가인 정희진은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책의 요지는 호주 중산층 가족의 가사 노동을 둘러싼 남성과 여성의 전쟁(gender war)과 그 전황 보고서다. 저자는 이를 단순한 '여성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폭주와 노동 시장 저변의 근본적 변화로 분석한다. 우리는 이미 망했는지 모르지만, 위기에 직면한 인류가 '살아남기(staying alive)' 위한 노동과 가정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한다.'

역시, 작가는 다르다. 내 방식으로 편하게 표현하자면, 가사 노동에 대한 편견과 그로 인해 생겨난 문제점들을 유쾌하게 풀어낸 책이다.

한쪽 성별에만 '아내가 없는 상황, 많은 문제가 생긴다

 애너벨 크랩, <아내가뭄>
ⓒ 동양북스
책에서 말하는 '아내'란 이런 것이다.
'청소, 세탁, 학습지도, 가벼운 유지보수에서 어려운 유지보수까지, 온갖 조달 업무, 안전과 보건, 작업 치료, 영양, 도덕적 지침과 상담, 교통 편의 제공, 기술 교육, 팀(가정) 내 인적 자원 관리, 아웃소싱, 멘토링, 중재, 교육과 위생을 책임져야 합니다. 탁월한 운동 조절 능력과 침착한 성격이 필수 조건입니다. 창의적인 경험과 실제 사용 가능한 획기적인 기법, 예를 들면 뭔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으면 좋습니다. 왜냐하면 기초적인 가정용품으로 10분 안에 그럴듯한 배트맨 의상을 만들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은 반복해서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월급은 이름뿐일 것입니다.' (44쪽)

'아내'는 남성일 수도 있고 여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내'라면 위에서 제시한 역할을 거뜬히 떠맡아야만 한다. 그런데 남성에게는 '아내'가 있는 경우가 많은 반면, 여성에게는 '아내'가 없다. 한쪽 성별에만 '아내'가 없는 이 상황! 이것을 두고 작가는 '아내 가뭄'이라 표현한다.

'전일제 근무를 하는 아빠들 중 76퍼센트가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전일제 근무를 하는 엄마들에게 아내가 있는 비율은 그보다 훨씬, 아주 낮았다. 겨우 15퍼센트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꽤 심각하고 끝도 보이지 않는, 고질적으로 축소 보고되는 아내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다. 비가 내릴 기미는 전혀 없었다.' (35쪽)

'아내 가뭄' 때문에 현실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감정 소모가 큰 집안일에 신경을 쓰느라 정신과 육체가 소진되고, 육아 때문에 직장을 잃거나 근무 패턴을 바꿔야 한다. 아이가 있는 '아내'가 되는 순간, '아이가 있는 남편'과의 월급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남편과 아내의 권력관계를 비대칭으로 만든다. 상황 자체가 인권유린이다. 이런 폐해를 해결하기 위해선 '아내 가뭄'의 원인부터 짚어나가야 한다. 책에선 성별에 대한 문화적인 성향과 무의식적 편향으로 인한 차별, 그리고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구조를 원인으로 짚었다. 이 중 무의식적 편향이란 이런 것이다.

예일대학교에서 이력서만으로 경찰서장을 뽑는 실험을 진행했다. 학생들에게 두 후보 중 경찰서장으로 적합한 인물을 선택하고 그 이유를 묻는 실험이었다. A후보는 교육 수준이 높고, 행정 능력도 뛰어나지만 다른 경찰관들과 친밀하지 못하고 세상 물정에도 어두웠다. 결혼해서 아이가 한 명 있었다. B후보는 이 후보와 모든 조건이 정반대였다. 교육수준과 행정 능력은 부족하지만 경찰관 사이에서 인기가 많고, 혼자 살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성별을 뒤섞었다. 교육수준이 높은 A후보를 남성으로, 세상물정에 밝은 B후보를 여성으로 설정했을 때, 참가자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부풀리는 경향이 있었다. 반대로 A후보를 여성으로, B후보를 남성으로 했을 때는 책으로 배우는 지식보다 경험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눈여겨 볼 차이는 여기에 있다. '아이가 있다'는 조건이 남성 후보에게는 '가족적 가치'를 근거로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데 도움이 됐지만, 여성 후보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 건 남성 후보는 변함없이 득을 보았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점은 이것이다. 자신이 편향적이지 않다고 단언하던 참가자들이 가장 심한 편향성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80쪽)

남자보다 집안일 두 배하는 호주, 우리나라는 무려 다섯 배

이외에도 작가는 당연하다고 여겨온 수많은 상황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독자를 멈칫하게 한다. '가사노동이 본능적으로 여성에게 적합한가?'라고 질문하며 '육아 전문가도 나머지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다를 게 없다. 하다 보면 '느는 것''이라고 스스로 답한다. '일하는 엄마는 '워킹맘'인데 왜 일하는 아빠는 그냥 보통 남자일까.' '한 가족의 안녕에 대단히 중요한 아내 노동이 국가 경제에는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질문이 곧 깨우침이 되는, 이것이야 말로 진정 '사이다' 발언이다.

이렇게 많은 이득과 편의를 누리는 남성들이 원수처럼 느껴질 무렵, 작가는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일터에서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에만 관심을 가질 뿐, 가정과 일터를 연결시키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만 패자라고 가정해버리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모두가 패자이기 때문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여자들, 일터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남자들, 아버지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는 아이들...'

호주가 아니라 마치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는 호주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 남자에 비해 여자가 집안일에 소비하는 시간이 호주는 두 배 많은 데 비해, 우리나라는 무려 다섯 배 이상이나 많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의 큰 줄기는 그리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살아가는 건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단순히, '남성 아내'를 늘리는 것은 결코 해답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아내'라는 존재에 대해 이대로 묵과해도 괜찮은지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내 가뭄>의 작가 애너벨 크랩은 1973년생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평론가이자 작가이다. 다른 여성주의 책들이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이 흠인 것에 비해, 이 책은 첫 장을 여는 순간, 무리 없이 끝까지 읽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 기대는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아마 당신도 그럴 것이다.

왜, 주위에 대단히 에너지 넘치고 수다스럽고 유머까지 풍부한 사람들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뭔가에 홀린 듯, 중간에 말을 끊기는커녕 '맞아, 맞아'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 않던가? 여기에 핵심을 콕콕 찌르는 말솜씨와 폭넓은 식견에 정확한 해석까지 더해진다면?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작가가 딱 그런 사람일 것 같다. <아내가뭄>은 이해하기 쉽고, 생생하고, 시원시원하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정희진이 '내가 평생 동안 단 한 권의 책을 쓴다면, 바로 이런 책을 내고 싶었다'고 고백할 만하다.

사실, 이 책을 소개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책 맨 앞에 나온 정희진의 해제이다. 툭툭 끊어내듯 내뱉는 문장들과 한 줄로 많은 이야기를 압축하는 정희진 특유의 문체로 책 전체를 아우르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시각과 의견도 제시한다. 단편 영화 같은 예고편이다. 그리고 책 본문은 예고편과 완벽한 콜라보를 이룬다.

정희진은 말한다. '여성주의는 남녀 모두에게 자신과 사회를 아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제 '남자들이 달라져야 할 차례'라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면, 바로 그들이 변화의 선봉장이 될 것이라고. 책 속에 평화와 상생의 길이 있다면, 그 책을 읽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만일 당신이 남성이라면, 그리고 이 글을 중간에 자르지 않고 여기까지 읽었다면, (일단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도 이 책이 당신을 더 나은 길로 안내할 거라는 데에 500원을 건다. 기꺼이 변화의 선봉장에 나서 깃발을 높이 드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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