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은 왜 '김밥'이 됐을까

이돈삼 2017. 1. 1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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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양식 처음 했던 '김시식지'.. 전라도 광양 김시식지 역사관

[오마이뉴스이돈삼 기자]

 김은 겨울에 더 맛있다. 김을 넣는 음식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떡국에 넣어서 먹는 김맛도 일품이다.
ⓒ 이돈삼
김이 맛있는 겨울이다. 바삭바삭한 김은 겨울에 더 맛있다. 제 철이어서다.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 잔불에 살짝 구워낸 김 맛은 별났다. 옛날엔 더 맛있었다. 설날이나 제삿날에 먹을 수 있었다.

김이 밥상에 오르는 날은 행복했다. 하지만 김으로 밥을 싸먹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한 장의 김을 여러 장으로 찢고 찢어서 밥숟가락에 올려서 먹었다. 밥으로 김을 싸먹다시피 했다. 다른 반찬 없이 김 한 조각만으로도 충분히 맛있었다.

김으로 싼 김밥도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다. 흰밥을 김으로 싸는 것만으로도 맛있었다. 김과 밥은 찰떡궁합이다. 단백질과 탄수화물, 칼슘, 인, 철, 비타민이 많이 들어 있는 김은 쌀밥에서 부족하기 쉬운 영양소를 보완해준다.

김을 이용한 요리도 다양해지고 있다. 김부각, 김국에서부터 김장아찌, 김냉국, 물김전골로 발전했다. 물김볶음, 생김비빔밥, 마른김구이 쌈밥, 마른김무침도 선보이고 있다. 김을 넣은 스낵도 보인다.

 개펄에 대나무를 세워서 김을 키우는 지주식 김양식장 풍경. 바닷물이 들고 나면서 김이 맛을 더하고 있다.
ⓒ 이돈삼
 광양 김시식지 역사관에서 본 김틀. 김의 물기를 빼는데 쓰인 도구다.
ⓒ 이돈삼
김의 명칭 유래도 재밌다. 370여 년 전, 조선 인조 때 얘기다. 임금의 밥상에 까만 종잇장처럼 생긴 음식이 처음 올랐다. 겉보기와 달리 맛이 좋았다. 향도 바다내음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음식의 이름이 궁금해 신하에게 물었다.

"이것의 이름이 무엇이냐?"
"바다에서 건진 해조인데,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사옵니다."

"그래? 누가 가져왔느냐?"
"전라도 광양에 사는 김여익이 올렸사옵니다."

그날부터 '김'이 됐다는 얘기다. 김여익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지만, 그래도 상상을 해본다. 임금한테 진상했던 사람이 김여익이 아니고 이씨나 정씨, 박씨였다면…. 지금 우리가 먹는 김밥도 이밥, 정밥, 박밥이 되지 않았을까.

 광양 김시식지 역사관 전경. 영모재를 중심으로 김역사관과 유물전시관, 인호사가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김유물전시관 모습. 오래 전 김을 양식하고 가공하는데 쓰인 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 이돈삼
김여익(1606∼1660)은 전라도 영암군 서호면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1636년)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다. 청주로 가던 길에, 임금이 청 태종한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통탄을 했다. 더 이상 조상을 뵐 면목이 없다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몇 년 동안 배회하다 광양현 인호도에 둥지를 틀었다. 지금 광양제철소가 들어서 있는 태인도다. 김여익은 인호도 앞바다에서 김을 발견했다.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에 해의(海衣)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음식으로 활용했다. 개펄에 밤나무와 소나무 가지를 꽂아 양식까지 했다. 바닷가 개펄에 대나무를 꽂아서 하는 지주식 양식의 시초다.

김여익은 해의를 건조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짚을 엮어 만든 김발에 해의를 고루 펴셔 말린 다음 떼어내는 건조법을 개발한 이도 그였다. 자연스레 김이 광양의 특산물로 자리잡고 진상품이 됐다.

이 기록이 비문으로 남아있다. 1714년 광양현감 허심이 김여익의 업적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지금은 비문만 전해지고 있다. 묘비에 시식해의(始殖海衣) 우발해의(又發海衣)가 새겨져 있다. 김을 처음 양식하고, 김양식법을 창안했다는 의미다.

 산죽을 섶으로 이용한 김양식장 풍경. 지금은 뭍으로 변한 가야산 아래 바닷가 풍경이다. 1949년 찍은 사진이다. 김역사관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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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지마을에 세워진 김시식지 유래비. 김을 김이라 부르게 된 내역 등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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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문이 김을 처음 양식했던 김시식지의 영모재에 보관돼 있다. 영모재는 김시식지 역사관에 있다. 당시 김양식장이 즐비했던 바닷가 궁기마을이다. 인호사, 유물전시관, 영모재 등과 함께 있다. 인호사는 김여익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김을 생산하는데 쓰였던 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역사관에서는 광양제철소가 들어서기 전, 광양의 김 생산 모습을 사진으로 만난다. 조선 말기에 밤나무 가지를 섶으로 이용한 김양식 모습도 있다. 주민들이 김을 수확하고, 말리는 모습도 보인다. 역사관에서 가까운 용지마을에 김시식지 유래비도 세워져 있다.

김시식지 역사관은 광양시 태인동(궁기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남해고속국도 진월나들목에서 광양제철소 방면, 오른편이다. 명당산업단지 맞은편이다. 궁기(宮基)마을은 도술가 전우치가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마을이다.

 망덕포구에 떠 있는 섬 배알도. 섬진강을 경계로 행정구역이 전라도와 경상도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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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름한 함석지붕의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광양 망덕포구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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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기마을에서 가까운 망덕포구에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도 있다. 생전 윤동주 시인의 친필원고가 보관됐던 곳이다. 올해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의미가 더 깊다.

생전 윤동주는 자신이 쓴 19편의 시를 골라 책으로 펴내려 했다. 1941년 일본으로 유학가기 전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이고, 책머리에 넣는 서문도 적어뒀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로 시작되는 서시가 서문이다. 그러나 시대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윤동주에게서 원고를 받은 이가 이곳 출신 정병욱(1922∼1982)이다. 서울대 교수를 지낸 정병욱은 어머니한테 원고의 보관을 당부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이곳 망덕포구에 있는 집 마룻장 아래에다 원고를 숨겨뒀다.

이 시집이 광복 이후 1948년 빛을 보게 된다. 여기에 보관돼 있던 시 19편에다 윤동주가 생전에 써둔 다른 원고와 함께 묶었다. 윤동주의 유일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망덕포구에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진 것도 이런 연유다.

망덕포구에 떠있는 섬, 배알도 너머 광양제철소에서는 용광로에서 나온 쇳물이 철로 변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포스코 누리집 '홍보채널' 배너의 '견학'란에 미리 신청하면 된다. 광양과 여수를 잇는 이순신대교의 위용도 멋스럽다. 광양컨테이너부두와 여수·남해 앞바다까지 내려다볼 수 있는 구봉산 전망대도 들러볼 만하다.

 광양과 여수를 잇는 이순신대교 풍경. 광양의 여러 관광지 가운데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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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봉산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광양항 전경. 컨테이너부두와 이순신대교가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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