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쓰리고]한겨울, 차가운 마음 달래줄 평양냉면집 '필동면옥'

변재현 기자 2017. 1. 14. 10: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냉면은 본디 겨울 음식이다. 냉면 육수를 차갑게 식히려면 필요한 얼음을 그 옛날에 쉽게 구할 수 있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여름철 임금이 신하에게 빙고(氷庫)에 있는 얼음을 상으로 내렸다는 기록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조선 시대 사대부도 소중히 여겼을 얼음을 서민들이 숭덩숭덩 넣어 냉면을 만들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얼음 타는 유나킴은 마치 상상속의 유니콘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인지 고시(古詩)에서는 뜨끈한 아랫목에서 냉면을 들이키는 장면들이 종종 나오기도 한다. 조선 후기 문인이었던 장유는 자신의 문집 ‘계곡집’에서 냉면 맛을 이렇게 설명했다. “자줏빛 육수는 노을빛처럼 비치고, 옥색의 가루가 눈꽃처럼 흩어진다. 젓가락을 입에 넣으니 그 맛이 입속에서 살아나고, 옷을 더 입어야 할 듯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뚫는다.”
마치 이 춤처럼 평양냉면의 느낌을 적절히 표현한 시다.
겨울에 냉면을 먹는 습관은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균형을 중시하는 한의학에서는 날씨가 추워 너무 뜨거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이를 중화시켜줄 차가운 음식을 권한다. 몸에 열이 승하면 온갖 병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겨울 냉면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이왕 겨울 냉면을 찾을 거라면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함흥냉면보다는 맛을 더 깊숙이 즐길 수 있는 평양냉면이 낫겠다 싶었다. 오늘은 서울 ‘필동면옥’을 택해봤다.

One go! 일단 씹고!

서울에는 평양냉면 4대천왕이 있다. 평양냉면 매니아(혹은 덕후)들이 “이 집은 꼭 가봐야 돼!”라며 꼽는 집이다. 하나, 둘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마포 을밀대, 을지로 을지면옥·우래옥, 충무로 필동면옥을 꼽는다.

이 네 집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비싸다. 도대체 함흥냉면은 7,000원이 정가인데 평양냉면은 1만원에서 1만1,000원은 내야 하니 이유가 뭘까?

필동면옥 메뉴. 냉면은 1만원입니다.
재료의 차이? 육수의 맛 차이는 식초가 많이 들어간 함흥냉면이 시다는 것뿐이고 고기 육수에 동치미를 섞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은데. 그렇다고 함흥의 감자·고구마 전분과 평양의 메밀 가격이 차이가 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나? 먹을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려도 알 수 없는 신비의 세계다.
‘흐음... 이 구역의 돼지로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사실 냉면뿐 아니라 곁들여 먹는 수육 가격도 차이가 나니 주문할 때 조심하기를 바란다. 위 4대 천왕의 모 집에서는 수육이 5만 원이다. 평양냉면 심심하게 먹은 후 영수증 보고 화끈하게 놀라지 말기를 바란다.

항상 주변의 평양냉면 덕후들과 이 이야기를 나누면 결론은 ‘이름값’으로 나고는 한다. “이 집은 주변 집보다 육수가 맑아서 메밀 향이 사는데 어떻게 하신 거예요?”라는 말에 “비법이라 알려드릴 수 없어요.”라는 공통적인 대답을 내놓는 모습을 보면 ‘이 정도 노력에 이 가격은 적당하다’는 자존심이 아닌가 싶다.

Two go! 화끈하게 빨고!

사실 평양냉면은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 “도대체 왜 이런 닝닝하고 맛도 안 나는 걸 먹는 걸까?”라는 질문을 평양냉면 집에서는 쉽게 들을 수 있다. 여러 답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이유 만한 것을 듣지 못했다.

“정신을 집중해야 맛을 찾을 수 있어요. 그게 참 재미있거든요.”

똑같은 냉면이지만 집마다 맛이 다르다. 을밀대 육수 맛은 동치미 맛이 좀 더 강하고, 을지면옥의 맛은 육수 맛이 좀 더 깊게 퍼진다. 경지에 오른 사람은 이 집은 양지, 이 집은 사골 등 육수를 어떻게 냈는지도 알 수 있다니 산삼 찾는 심마니처럼 ‘맛마니’가 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필동면옥은 평양냉면에서 중간급 정도라고 하면 될 듯하다. 이 집의 육수 맛은 다른 집보다 맑다. 들이키면 마치 산에서 뜬 약수를 먹는 듯한 느낌도 난다. 그 밍숭맹숭함을 메워 주는 것이 고춧가루다.

필동면옥의 평양냉면. 다른 집에서 볼 수 없는 고춧가루가 눈에 띈다.
은혜롭다.
평양냉면의 맛은 주마등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들이키면 상큼한 동치미 맛이 나고 그다음 육수 향이 뭉근하게 퍼지는 식이다. 필동면옥은 고춧가루 맛이 매콤하게 입안을 정리해 줘서 한 단계가 더 있다는 느낌이 있다. 마지막에는 파가 아삭하게 씹혀 파 향이 감돈다. 다른 집에서 맛의 층이 두 겹이라면 여기는 세 겹, 네 겹인 셈이다.

메밀면은 다른 집보다 가늘다. 약간 씹히는 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쉬울 만 하겠다. 메밀로만 반죽하면 면이 툭툭 끊겨서 반드시 밀가루 등 다른 전분과 혼합해야 하는데, 이 집은 메밀의 함량이 조금 낮은 듯한 느낌이 있다. 가는 면이지만 차지고 쫄깃쫄깃하다.

평양냉면 면. 보다시피 다른 집 보다 훨씬 얇아 ‘후루룩’ 들어간다.
필동면옥의 재미는 냉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곁들임 음식이다. 보통 냉면에는 육수를 낼 때 썼던 양지머리를 숭덩숭덩 썰어 먹기 마련인데, 이 집에서는 특이하게 돼지고기를 뜻하는 ‘제육’이 있다. 삼겹살 수육인데 삶을 때 이것저것 많은 것을 넣지 않은 듯해 맛이 삼삼하다. 양념장은 달큰한 맛이 강하니 푹 찍어 먹으면 맛이 그만이다. 부드럽게 차져 냉면과도 합이 좋으니 꼭 시켜먹자.
곁들임 음식 등장이요!
삼겹살 제육. 투박하게 숭덩숭덩 썰어져 나온다.
이북식으로 담근 김치와 싸먹어도 그만.
달큰하게 만든 양념장과 찰떡궁합으로 어울린다.
결들임 음식은 제육으로 끝나지 않는다. 필동면옥의 쌍두마차는 냉면과 이북식 만두다. 마늘을 넣지 않아 맛이 깨끗한데 식감이 부드러우면서도 아삭아삭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가 나온다.
이유는 속을 갈라보면 알 수 있다. 만두와 고기는 잘게 다져져 있어 맛 바탕을 잡아주고 숙주와 파는 크게 썰어 아삭하게 씹는 재미가 있다. 소가 안에 꽉꽉 차 있어서 포만감도 그만. 차가운 평양냉면과 정말 잘 어울린다.
속을 가르면 이유가 보인다. 숙주와 파가 크게 크게 썰려 있어 재미를 책임진다.
만두 소가 그득그득 들어가 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Three go! ‘짜릿함’을 맛보고!

냉면을 참 좋아한다. 기억을 더듬어 언제부터 자주 가는 냉면집을 추리게 됐을까 생각해보니 스무 살 초입이었던 듯하다.

스무 살, 답답했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겠다고 아등바등했던 시절이 가여웠다. “대학에 들어가 봐야 네가 생각하는 만큼의 이상적인 공간은 아닐 거야”라는 훈계 반, 자조 반의 말은 참이었다. 자유가 생기면 책임도 따라온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이제는 정해진 길이 아니라 내가 정한 길을 밟아나가야 한다는 엄중한 현실을 알게 되니 대학 입학 때의 차가운 자유의 공기도, 봄날 캠퍼스의 온화함도 그저 무늬 없는 배경에 불과했다.

냉면을 먹으면 그 답답함이 조금이라도 해소되는 것 같았다. 내 대학 시절은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무언가를 가르치는 일로 점철됐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한 건, 그래도 그나마 가만히 있지 않을 때는 머릿속에 생각이 들어차지 않아 답답함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르치는 일을 마치고 고등학교 교정을 나왔을 때 스스로 길을 잘 만들어 나가고 있는지, 나는 괜찮은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물밀 듯이 밀려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소소한 자유가 냉면이었다. 냉면 집에 들어와 잔에 담긴 육수를 먹으면 따뜻하게 나를 위로해주는 듯했고, 찬 국물을 들이키면 가슴 속 응어리가 풀리는 듯했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냉면집을 들락거렸다.
이런 짜릿함을 위해서 말이지!
마치 ‘나는 흔들리고 있다’는 걸 증명하듯 찾은 냉면을 멀리하게 됐을 때는 무언가 하나에 집중하면서부터였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고 내 생각과 시간을 쏟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답답함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는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가 아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절박한 감정이 생겼지만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도 무언가를 위해 달려나간다는 느낌은 있었기 때문이다.

냉면은 졸업했지만, 여전히 가끔은 찾고는 한다. 그래도 오랜 벗이었음에. 그때는 잡생각이 참 많았더랬다. 흔들리고 고뇌하며 나를 잡았던 그 시간을, 면수를 마시며 곱씹게 됐다. ‘그래도 냉면이 있음에 지금의 내가 있구나’ 하고.

/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

** 위치: 충무로역 1번 출구에서 주택가로 큰 길을 따라 주택가로 들어가면 된다. 대한극장 왼쪽 행복웨딩홀 끼고 우측으로 100m 직진후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50m.

어렵다면 서울경제신문의 경쟁사 반대쪽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바람에 나부끼는 경쟁사의 깃발... (너무 많은 걸 보여드릴 수 없음에 죄송합니다)

**가격: 평양냉면 한 그릇 1만원. 만두도 한 접시 1만원.

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