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유적 밟을 때마다 눈물 흘린 장졸들

정만진 입력 2016. 12. 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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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고소대,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타루비가 있는 임진왜란 군사 유적

[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충무공 이순신과 수군들의 공로를 기리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일명 좌수영대첩비),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세운 과정을 새겨둔 동령소갈비, 이순신의 전사를 슬퍼한 부하 장졸들이 언제나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에서 세운 타루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등 고소대의 전경
ⓒ 정만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고, 가장 비극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랑 이야기는 아마도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두 사람의 실화일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슬픈 사랑을 말해주는 단적인 증거물은 자명고(自鳴鼓)이다. 자명고, 스스로(自) 우는(鳴) 북(鼓)이라는 뜻이다.

여수에는 자명고, 아니 자명산이 있었다.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칠 듯하면 이 산은 자명고처럼 울었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도 이 산의 울음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이순신은 산에 종고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종고산(鍾鼓山), 소리를 내어 국가의 위기를 예고하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그 종고산 아래에 전라좌수영이 있었다. 지금은 흔히 '진남대'라 부르는 곳이 바로 이순신이 장졸들을 지휘하며 전라좌수영을 이끌었던 진해루(鎭海樓) 터이다. 그러나 진해루는 1597년(선조 27) 정유재란 때 왜적들에 의해 불타 없어졌고, 2년 뒤인 1599년 그 자리에 진남관(鎭南館)이 건립되었다. 진남관은 다시 1716년(숙종 42) 화재로 소실되었고, 다시 2년 뒤인 1718년에 재건되었다. 진남관은 1911년 들어 여수공립보통학교 건물로 쓰이기도 한다.

 고소대의 3기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 앞 왼쪽에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의 비문을 한글로 줄여 요약한 내용이 새겨진 빗돌이 있다.
ⓒ 정만진
종고산이 진해루의 뒷산이라면 고소산은 진해루의 앞산이었다. 바다를 턱밑에 둔 고소산에는 대포가 설치되었고, 여수를 지키는 대장은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며 이곳에서 군사 작전을 지휘했다. 그래서 포대가 있고, 장군의 지휘소인 장대(將臺)가 있다고 하여 고소산 정상부에는 고소대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었다.

종고산이라는 이름은 이순신이 붙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소산이라는 이름은 누가 붙였을까? 일제 강점기 때 고소산에 신사(神社)가 설치되었다는 슬픈 역사가 이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해준다.

무엇 때문에 일본인들은 다른 곳 아닌 고소산에 신사를 두었을까? 고소(姑蘇)라는 이름은, 일본인들이 이곳에 신사를 둔 까닭을 암시한다. 고소는 곧 사소(沙蘇)로, 대략 여신(女神)이다. 즉, 일본인들이 신사를 설치하기 전에도 고소산은 이곳 여수 사람들이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제사 장소에 자신들의 신을 모심으로써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려 들었던 것이다.

민속신앙지 고소산에 일본인들은 신사를 세웠다

사소가 등장하는 서정주의 시 '꽃밭의 독백'을 읽어본다. 이 시에는 '사소 단장'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하늘나라, 인간세상의 비루함이 없는 참된 세계로 나아가고 싶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은 신비로운 영험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서정주는 사소를 찾는다.

서정주는 시를 써서 사소를 찾았지만, 일반인들은 사소산에 직접 올라 길흉화복(吉凶禍福)의 길과 복을 빌고 흉과 화가 내쳐지기를 기원했다. 사소산에 사소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사소 대신 천황 앞에 절을 올리라면서 이곳에 신사를 설치했다.

사소가 남아 있는 대표적 지명으로는 경주 선도산 성모사(聖母祠), 경기도 포천과 경남 하동의 고소성(姑蘇城), 경북 문경의 고모산성(姑母山城),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등이 있다. 대전, 경기도 용인, 경북 성주 등지 전국 곳곳 할미산성의 '할미'도 모두 속뜻은 사소와 같다.

衰草斜陽欲暮秋
시든 풀 저녁볕 받아 늦가을빛 뚜렷하니
姑蘇臺上使人愁
고소대 위에서는 사람의 슬픔 짙어지네
前車未必後車戒
앞수레의 가르침을 뒷수레가 못 이으니
今古幾番?鹿遊
예로부터 이곳에는 사슴들이 노닐었구나

 충남 아산 현충사 충무문 앞에도 타루비가 서 있다. 물론 안내판에는 이 타루비가 '복제품'이라는 사실을 밝혀 두었다. 안내판에는 타루비 비문의 원문과 번역문이 게재되어 있어 답사들에게 좋은 길잡이 노릇을 한다. 이 복제품 바로 옆에는 '사적 155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라는 작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자칫 답사자 중에는 이 복제품 빗돌이 사적 155호 이충무공유허인 줄로 착각하는 이도 있을 듯하다.
ⓒ 정만진
정몽주도 고소대를 소재로 시를 남겼다. 정몽주는 중국 오나라의 옛일을 말했다. 오왕 합려는 봄, 가을로 고소대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오자서는 오나라가 머지않아 멸망할 것을 내다보며 '고소대에 사슴들이 노는 것을 보게 되리라' 하고 한탄했다. 정몽주가 이 고사에 빗대어 고려 멸망의 예감을 애잔하게 노래한 것이 바로 앞의 한시이다.결론은, 중국에서도 고대 이래 제사를 지내는 곳을 고소대라 했고, 그 이름이 우리나라로 옮겨왔다는 말이다. 자신이 '만력 30년(1603)'에 세워졌다고 소개하는 타루비의 비문도 마찬가지 인식이 낳은 결과물이다. '선조 36년(1603)'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의 연호를 기준으로 건립 시기를 말할 만큼 지난 시대는 중국을 기준으로 생각했던 사대주의의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빗돌의 이름 타루비도 마찬가지이다. 비문은 이 이름을 중국 진나라 양호의 옛일에서 따왔다고 밝히고 있다. '이순신의 휘하에 있었던 수군 병사들이 그를 생각하여 세운 작은 비석(營下水卒爲統制使 李公舜臣立短碣)'인 타루비의 몸돌에는 '중국 양양 사람들은 양호(221∽278)를 생각하면서 그의 비석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옛일에서 이름을 따왔다(蓋取襄陽人思羊祜而望其碑則淚必墮者也)'라고 새겨져 있다.

양호는 동오와의 국경 지대를 다스렸는데, 이른바 덕치(德治)를 하여 동오 백성들까지 그를 존경했다. 뒷날 양호의 후임 두예가 동오 사람들이 양호의 비석 앞에서 눈물(淚)을 흘리는(墮) 것을 보고 그 빗돌에 '타루비(墮淚碑)'라는 이름을 붙였다. 타루비 역시 고소대처럼 중국의 것을 이 땅에 옮겨 심은 이름인 것이다.

그래도 고소대의 주인공은 보물 1288호 타루비가 아니라 보물 571호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이다. 그 옆의 동령소갈비(東嶺小喝碑)는 1698년(숙종 24)에 세워졌는데, 대첩비 건립에 참여한 인물들과 그 경위, 건립하기까지의 어려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진안현감 심인조(沈仁祚)가 썼다.

 왼쪽부터, 타루비,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 동령소갈비
ⓒ 정만진
안내판은 '좌수영대첩비라고도 부르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수군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비석으로, (문화재로 지정된) 국내 비석 중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하다'라고 소개한다. 이 대첩비는 높이 305cm, 너비 124cm, 두께 24cm를 뽐낸다. 그 후 1956년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가 진도에 세워졌는데 높이 380cm, 너비 120cm, 두께 58cm로 여수 대첩비보다 조금 더 크다. 그러나 벽파진 전첩비는 건립 연대가 일천하기 때문에 문화재는 아니다.

안내판은 '(좌수영대첩비는) 1615년(광해군 7) 이순신의 부하였던 유형이 황해도 병마사가 되어 그곳에서 보내온 가장 좋은 석질의 빗돌로 세웠다. 비의 이름은 김상용의 글씨이며, 비문은 오성대감 이항복이 짓고, 명필 김현성이 글씨를 썼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타루비와 좌수영대첩비를 땅에 묻어버리는 일제

고소대에 신사를 설치하는 만행을 자행했던 일제가 이 대첩비를 고이 놓아둘 리는 없는 일, 1942년 여수경찰서장 마쓰키(松木)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족정기를 말살할 속셈으로 비각을 헐고 이 비석과 타루비를 감추어 버린다. 세월이 흘러 1946년, 대첩비와 타루비는 경복궁 뜰 땅속에서 발견된다. 그 이듬해인 1947년, 여수 사람들은 충무공비각복구기성회를 조직, 열성을 바쳐 활동한 끝에 두 비를 제자리에 복원하였다.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는 일명 좌수영대첩비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비문을 한글로 요약해서 번역해둔 비각 앞 왼쪽의 빗돌은 '좌수영대첩비'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빗돌 오른쪽 아래의 빨간 딱지에는 그와 관련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문화재청이 201년 12월 7일 날짜로 '좌수영대첩비'라는 이름을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로 공식 개명했다는 것이다.
ⓒ 정만진
이제 비각 왼쪽 앞에 세워져 있는 작은 표지석의 동판을 읽는다. 대첩비의 비문을 한글로 번역, 축약하여 새겨둔 글이다. 분량상 원문 전체를 이 작은 빗돌에 모두 담을 수는 없으므로 줄여서 보여주는 것을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전문의 내용을 가늠할 수 있는 표지석이 서 있는 것은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임진년에 왜적이 함대를 몰고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몰려 들어올 때에 가로막힌 곳은 한산도요, 경계점은 노량이요, 가장 험한 곳은 명량이었다.  한산도를 빼앗기면 노량을 지키지 못할 것이요, 명량이 적의 손에 들어간다면 서울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당시에 이 세 군데의 요지를 막아낸 사람이 누구였는가? 그는 곧 통제사 이공(李公, 이순신)이었다.

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곧 적과의 결전을 개시하여 옥포, 노량, 당포, 율포, 한산도, 안골포 등 여러 곳에서 크게 승리하여 이백이십여 척의 적선을 불태우고, 오백구십여 명의 적병을 죽이는 등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이로부터 적들은 감히 공의 진영 부근을 접근하지 못하였다. 공은 한산도에 주둔하여 적이 나아갈 길을 막았다.

1597년 공이 모함을 당하여 이곳을 떠나자 바로 한산도는 적에게 함락되었다. 이에 황급한 정부는 다시 공을 기용하여 통제사의 직에 재임시켰다. 단신으로 부임한 공은 병졸을 모아 명량에 주둔했다가 갑자기 습격해 오는 많은 적군을 적은 군대로 대항하여 새로 모은 십삼 척의 배로 수 만에 이르는 적군을 쳐부수고 적선 삼십 척을 격파하고 계속해서 다그쳐 공격하니 적들은 마침내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이때 중국에서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원군하러 왔는데, 수군제독 진린이 공과 합세하게 되었다. 진린은 공의 인품에 경복하여 "이공(李公)"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해 겨울에 적군은 다시 모든 세력을 연합하여 노량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공은 직접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선두에서 지휘하였고, 중국군과 협공의 태세를 갖추어 전진하였다. 새벽에 이르러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니 적군은 산산이 부서져 달아날 길을 찾기에 바빴다. 그러나 전투가 미처 끝나기 전에 공은 적탄에 맞아 쓰러지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이순신은) "내가 죽은 것을 비밀에 부치고 그대로 전투를 강행하라"는 주의를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진린은 배 위에서 세 번이나 쓰러지면서 "이제는 함께 싸울 사람이 없어졌다"고 하며 애통하였고, 중국군들도 고기를 먹지 않고 슬퍼하였으며, 남방 사람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통곡하며 곳곳에서 길을 가로막고 음식을 차려 놓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

선조는 체찰사 이항복에게 명하여 이곳에 공의 사당을 지으라고 하였다. 항복이 현지에 오니 당시의 통제사인 이시언이 감격한 마음으로 이를 주관하고, 공의 부하였던 장졸들이 기꺼이 앞을 다투어 공사에 참가하여 짧은 기간에 사당이 준공되었다.

15년 후인 1614년에 통제사 유형이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일을 추진하다가 황해도 관찰사로 전임하였는데, 강음에서 석재를 구하여 해로로 서울을 경유하여 현지에까지 운반하였고, 몇 해가 지난 뒤에 절도사 안륵이 새로 부임하여 충무공의 아들인 전 현감 이회 공의 부하였던 전 현감 임영, 전 판관 정원명鄭元溟 등과 함께 석공을 모집하여 작업을 시작하고, 호조참의 이창정, 순천부사 강복성이 경비를 조달하고, 이웃 고을의 수령들도 물자를 보조하여 반 년 만에 공사를 완성하였다.

충무공이 통제사로 있을 때에 유형은 해남현감으로 보좌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관계는 비를 세우기 위하여 앞장서게 된 중요한 인연이었다. 1620년 비가 완성되었고 앞서 충무공의 부하들이 세운 타루비(墮淚碑)도 이곳에 옮겨 한자리에 세웠다. 타루비는 이 지역 장졸들이 충무공의 유적을 밟을 적마다 눈물을 흘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원비는 유형의 부탁으로 오성부원군 이항복이 짓고, 비가 준공된 뒤에 다시 작은 돌을 다듬어 비를 건립한 전후 내력을 새겼는데, 시일이 경과되는 동안 글씨가 망그러진 부분이 많았다.  1728년 유형의 증손 유성채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비각을 중수하고, 작은 비석을 갈고, 영중추부사事 남구만에게 부탁하여 추가로 그 후 사실을 새겼다.

1980년 9월

문화재위원 임창순 역술하고

김병남 쓰다.'

1980년 9월?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702번지, 보석사 일주문 바로 뒤에 있는 영규대사의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앞 표지석에서도 보았던 연월이다. 역술(번역하여 적음)한 사람도 같다. 군사반란으로 나라의 권력을 강탈한 전두환 정권이 마치 자기들이 나라와 민족의 역사 발전에 큰 관심이 있는 양 국민들을 속이려고 나라 곳곳의 임진왜란 유적지에 해설 표지석을 세웠구나!

군사반란 군인들, 역사유적지에 비석 세우는 정치적 상징조작에 열심 

이순신은 충심으로 국가와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전투에 나아가고, 목숨까지 바쳤건만, 그 후배인 대한민국의 정치 장군들은 어찌 이토록 철면피(鐵面皮, 쇠로 만든 듯 창피를 모르는 두꺼운 얼굴)란 말인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들의 진면목(眞面目, 진짜 모습)을 역사에 기록하기 위해 이런 곳마다 낱낱이 빗돌에 세워 그 죄를 새겨 두어야 하리라.

고소대를 둘러본 뒤 자산공원으로 이동한다. '임진란 호국 수군 위령탑'과 '성웅 이순신 상'이 있는 곳이다.  자산공원에는 정치 군인들의 낯 뜨거운 설치물이 없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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