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비운의 꽃.. 마르지않는 눈물이 되어 흐른다

이귀전 입력 2016. 12. 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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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애환 사무친 강원 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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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으로 10월 말이니 이맘 때쯤이다. 강원도 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동강은 겨울을 목전에 뒀으니 차디찼을 것이다. 하지만 동강이 얼음장처럼 차다 한들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동강에 몸을 맡긴 채 떠가고 있지만 이미 유명을 달리한 몸이니 이승의 고통이 느껴졌을 리 만무하다. 20년도 채 살지 못한 그는 죽은 후에도 땅 한 평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삶은 권력에 눈이 먼 야욕자들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하지만 가히 외롭지만은 않았으리라 싶다. 목숨을 걸고 그를 기리고 지킨 백성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조선 6대 임금 단종(端宗). 12살에 왕에 오른 그는 숙부인 세조가 일으킨 쿠데타 계유정란으로 3년 만에 물러난다. 이후 그에 대한 복위활동이 펼쳐지지만 실패하고, 그는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서인(평민)으로 강등돼 마지막 삶을 강원 영월에서 보낸다.
강원 영월 서강 절벽에 있는 선돌은 약 70m 정도의 입석으로 마치 큰 칼로 절벽을 쪼갠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한양에서 영월로 유배길에 오른 단종이 영월의 관문인 선돌을 보며 신선같이 생겼다고 해서 신선암으로도 불린다.
서울에서 영월로 유배길에 오른 그는 한강나루에서 남한강 뱃길을 따라 양주, 광주, 양평, 여주, 원주를 거쳐 닷새 만에 영월 땅 주천에 이른다. 주천을 흐르는 강은 서강(西江)으로 불린다. 서강을 건너며 단종은 “저무는 강, 황천을 건너는구나”라며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
서강을 걸으며 그는 영월의 관문인 선돌 아래를 지나다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서강 절벽에 위치한 선돌은 높이 약 70m 정도의 입석으로 거대한 바위가 마치 큰 칼로 절벽을 쪼갠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단종이 선돌을 보고 신선같이 생겼다고 해 신선암으로도 불린다. 죽을 운명이지만 영면 후 삶만은 신선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기대를 선돌을 보며 한 듯싶다.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는 서강이 휘돌아 삼면이 강이고 뒤편으로는 육륙봉으로 막혀 있다. 단종은 청령포를 육지의 섬을 뜻하는 ‘육지고도(陸地孤島)’라 일컬었다.
선돌을 지나 그가 도착한 곳이 유배지인 청령포다. 서강이 휘돌아 삼면이 강이고 뒤편으로는 육륙봉으로 막혀 있어 단종은 청령포를 육지의 섬을 뜻하는 ‘육지고도(陸地孤島)’라 일컬었다. 바다 건너 섬이면 체념이라도 할 터인데, 청령포는 바로 앞이 뭍이지만 갈 수 없는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더 헤집어 놓는 천혜의 유배지인 셈이다.
강원 영월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생활을 한 곳으로,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이곳에서 그를 위로한 것은 소나무였다.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이곳에서 그를 위로한 것은 소나무였다. 청령포의 소나무 중 유독 눈에 띄는 키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나무로 우리나라 소나무 중 가장 키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랫부분에서 두 줄기가 하늘로 높이 뻗어 오른 모습이 품위 있고 자태가 아름답다. 단종이 이곳에 머물 때가 550년 전이니 그의 유배생활을 지켜 본 산증인이다. 단종이 이 나무에 걸터앉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오열을 했다고 한다. 이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 본 이 나무의 이름이 관음(觀音)송이다.
영월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한 단종의 생활을 재현해 놓은 모습.
홍수로 청령포가 잠기자 영월 동헌에 있는 객사인 관풍헌으로 유배지가 옮겨진다. 영월시내에 있는 관풍헌에 들어서면 마당 좌측에 2층 누각인 자규루가 있다. 본래 이름은 매죽루였는데 단종이 이 누각에서 자신의 한을 담은 ‘자규사’라는 시를 짓고 나서 이름이 바뀌었다.
여기서 그는 짧은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권력을 찬탈한 세조가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명을 내렸기에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고 동강에 버려졌다. 동강에서 숨을 거둔 것은 그만이 아니다. 그를 보필했던 시녀들 역시 동강에 몸을 던졌다. 영월 시내 동강 변에 금강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그 부근이 이들이 몸을 던진 낙화암이다.
단종이 죽은 후 시녀들이 동강에 몸을 던진 낙화암. 오른편 전봇대 두 개가 서 있는 곳이 낙화암 자리다.
잘못된 권력에 생을 마감한 그를 보듬은 것은 백성들이었다. 영월 지방의 호장이었던 엄흥도는 그의 아들들과 목숨을 걸고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둬 그의 선산으로 옮긴다. 엄흥도가 지게에 단종의 시신을 싣고 동을지산 능선을 오르던 중 노루가 도망쳤는데, 그 자리만 눈이 쌓여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곳에 시신을 암매장했다. 이후 그는 계룡산 동학사에서 한평생을 숨어지냈다고 한다.
단종의 시신이 매장된 장릉은 조선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수도권을 벗어나 있고,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장릉은 기운이나 세력이 왕성하길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짧은 생을 산 단종에게 긴 삶을 선사하기 위해 이름 붙여진 듯하다.
그의 시신이 매장된 곳이 지금의 장릉(莊陵)이다. 조선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수도권을 벗어나 있고,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장릉은 기운이나 세력이 왕성하길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짧은 생을 산 단종에게 긴 삶을 선사하기 위해 이름 붙여진 듯하다. 장릉엔 다른 왕릉과 다르게 무인석이 없다. 숙부의 칼을 무서워했던 어린 임금 단종이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도록 한 배려일 듯싶다.
단종은 영월 동헌에 있는 객사인 관풍헌에서 생을 마감한다.
단종의 이승에서의 삶은 짧게 끝나지만, 그는 신선이 돼 태백산으로 갔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영월을 들어설 때 선돌을 보면서 신선이 되길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영월에서 태백산 가는 길엔 단종을 모신 사당이 많다고 한다. 영원한 삶을 얻은 그는 자신을 품어줬던 민초들을 보듬어 줄 신선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영월=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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