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발발 직후 이순신이 분노한 곳

정만진 2016. 12. 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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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 진남관, 현존 가장 큰 단층 목조 건물로 국보 304호

[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진남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규모가 큰 단층 목조 건물이다. 국보 304호인데,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군대를 지휘했던 진해루 터에 세워졌다.
ⓒ 정만진
흔히 '진남관(鎭南館)'으로 알려져 있는 여수의 조선 시대 역사유적을 찾아간다. 그런데 여수시 동문로 11번지의 정문 앞에 세워져 있는 현지 안내판을 보니 '전라좌수영·삼도수군통제영·진남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진남관만이 아니라 이름 셋이 한꺼번에 적혀 있는 것이다. 이 셋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안내문을 읽어본다.

'전라좌수영 : 조선 시대에 남해안 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여수에 자리잡고 있던 수군영이다. 479년(성종 10)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1895년(고종 32)에 없앴다. 현재 그 모습을 거의 잃은 채 성곽의 극히 일부와 진남관만 남아 있다. 조선 후기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라좌수영 성 안에는 건물 80여 동, 민가 2,024호, 우물 9곳, 연못 1곳 등이 있었다고 한다. 봄이면 주변에 매화가 만발하여 매영성(梅營城)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삼도수군통제영 :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의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 해전에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두어 1593년(선조 26)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을 다스리는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함으로써 전라좌수영이 1601년(선조 34)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 되었다.

진남관 :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수군의 중심 기지였다. 여수 지역에서 목재를 조달하여 건축했으며,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단층 목조 건물 중 가장 크다. 국보 304호이다.'

종합해서 요약하면, '이곳에는 본래 전라좌수사가 근무하는 전라좌수영이 있었는데,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됨으로써 한동안 통제사가 집무를 보는 삼도수군통제영의 역할까지 겸하게 되었다. 성곽 등 당시의 자취는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이순신의 지휘소였던 진해루 터에 다시 세운 진남관은 지금도 남아 있다. 진남관은 현존 단층 목조 건물 중 가장 크며, 국보 304호이다' 정도이다.

대략 짐작이 되지만, 진남관은 처음 건립되던 1598년(선조 31) 당시에는 수군 본부가 아니라 전라좌수영의 객사(손님 숙소)로 세워졌다. 지금 보는 68개 기둥의 거대하고 웅장한 진남관은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1718년(숙종 44)에 중창한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여수에 부임한 이순신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여수 석인'은 진남관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에 있다.
ⓒ 정만진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 따라서 이순신은 여수의 선소(사적 392호)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물 위에 처음 띄운 곳도 여수 앞바다였다. 이순신을 기려 나라 안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사당 충민사(사적 381호)도 여수에 있다. 임진왜란 전투가 없었던 목포와 달리, 이곳 여수는 이순신 및 수군 관련 역사유적이 말 그대로 즐비하다.   
안내판 왼쪽의 망해루 아래를 지나 계단을 오른다. 진남관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통제문이 활짝 웃으면서 나그네를 맞이한다. 삼문이 웃고 있는 듯 느껴진 것은 아마도 유형문화재 33호인 석인(石人)이 통제문 안 바로 오른쪽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인은 돌로 만든 사람이다. 진남관의 석인 역시 여수가 보여주는 임진왜란 유적 중 한 가지이다. 석인 앞 안내판에는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순신이 거북선을 제조하느라 한창 바쁠 때에 왜적들이 쳐들어 왔다. 이순신은 돌사람 7개를 만들어 사람처럼 세워 놓았는데, 이로써 적의 눈을 속여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민중들의 이순신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석인 전설

물론 이순신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이긴 것이 석인을 세운 덕분이라는 설명은 아니다. 이순신의 연이은 승전 덕분에 생명과 생활을 지키게 된 이곳 주민들의 마음이 만들어낸 전설을, 지난날 할머니들이 무릎 위에 손자손녀를 눕혀놓고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듯, 안내판은 답사자들에게 속삭이고 있다.

석인은 본래 7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손은 팔짱을 꼈다. 도포자락은 늘어져 있고, 시선은 유유히 적을 바라보는 듯 그윽하다. 석인 옆에 서서 전라좌수영성 담장 너머로 저 아래 시가지를 바라본다. 중앙동네거리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망해루 지붕 위로 우뚝 솟아올라 문득 나를 돌아볼 것만 같다.

 진남관 통제문에서 바라본 망해루
ⓒ 정만진
진남관을 둘러보며 정말 기둥이 68개 맞나 세어보다가, 문득 이곳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하던 때의 이순신을 떠올린다. <난중일기>를 따라 그의 흔적을 더듬어보자. 1592년(선조 25) 4월 15일 '해질 무렵',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이 보낸 통첩을 받는다. 왜선 90여 척이 절영도(영도)에 정박했다는 내용이다.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도 동시에 왔는데, 왜적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즉각 왜적이 침입했다는 장계를 써서 서울로 올리고, 순찰사 이광과 병마사 최원,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낸다. 이때 경상도관찰사 김수의 공문도 왔다. 같은 내용이다.

다음날인 4월 16일,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의 거진(巨鎭, 지휘 본부)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순신은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없다'고 일기에 기록한다. 다시 서울로 장계를 올리고,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낸다. 이때 도는 관찰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17일, 경상우병사 김성일이 공문을 보냈는데 왜적이 부산을 점령한 뒤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했다. 늦은 오후 들어 이순신은 활 50순을 쏜다. 순(巡)은 사람마다 순서대로 활을 다섯 대씩 쏘고 다시 자기 차례가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일기의 기록은 이순신 본인이 이날 화살 250대를 쏘았다는 뜻이다. 이제 전쟁이다. 게다가 부산이 이미 적의 손에 들어갔다. 이순신은 분통이 머리끝까지 터졌을 것이고, 그래서 각오와 의기를 다지고 돋우면서 격렬하게 활을 날렸을 터이다.

부산이 적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에 분노하는 이순신

18일, 오후 2시 무렵에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가 함락되었고, 양산과 울산의 두 수령 조영규와 이언함이 조방장으로서 동래성에 갔다가 모두 패했다는 소식이다. 이순신은 '분하고 원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라고 일기에 심정을 남겼다.

원균의 공문에는 경상좌병사 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이 군사를 이끌고 동래성 뒤까지 갔다가 그냥 군사를 물렸다는 소식도 들어 있다. 이순신은 그것이 '더욱 원통'하다. 군수들이 주장(主將, 동래부사 송상현)을 돕기 위해 조방장(助防將)으로 전투에 가담했다가 패배한 것도 분하고 원통했지만, 나라의 최고위급 대장군들인 좌병사와 좌수사가 싸우지도 않고 후퇴했다니 한층 더 화가 난 것이다. 여수 석보창(石堡倉)에 있으면서 순천 군사를 인도하지 않은 병방(兵房, 군사 업무 담당 관리)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여수 석창성의 흔적. <난중일기> 1592년 4월 18일자에는, 군사 업무를 맡은 관리가 이곳에 머물면서 태만하자 이순신이 그를 체포하여 가두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 정만진
19일, 군관을 시켜 좌수영 동문 가까이에 있는 품방(品防, 品자 모양의 구덩이)에 해자(垓字, 적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조성한 물길)를 파게 했다. 이순신은 아침을 일찍 먹은 다음 성문 위로 올라가 공사를 직접 감독했다. 이날 입대하러 온 군사 7백 명을 점검했다.

20일, 경상도관찰사 김수의 공문이 왔는데 대규모의 적들이 맹렬한 기세로 몰려와 대적할 수가 없으며, 적들은 이긴 기세를 타고 전진하는데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는 것 같다고 했다. 김수는 이순신이 전선을 정비하여 경상도로 구원 출병을 하도록 해달라고 조정에 장계를 보냈다고 했다.

21일, 성벽 위에 군사들을 줄지어 배치하도록 명령했다. 오후에 순천부사 권준이 달려와 전투 준비에 관한 지시를 받고 돌아갔다(4월 23일부터 30일까지는 일기가 남아 있지 않다).

이순신 휘하 장수들은 모두 의사(義士)

 진남관 앞 중앙로네거리의 이순신 동상
ⓒ 정만진
5월 1일, 전라좌수영 수군들이 모두 여수 앞바다에 모였다. 방답첨사 이순신, 홍양현감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진해루(鎭海樓)에  불러들였다. 모두들 격분하여 제 한 몸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순신을 장수들을 '실로 의사(義士)들이라 할 만하다'라고 칭찬했다.     

5월 2일, 삼도순변사 이일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지원 요청 공문이 왔다. 송한련이 남해에서 와서 남해현령, 미조항첨사, 상주포만호, 곡포만호, 평산포만호 등이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듣고 곧장 달아나버렸고, 무기 등은 모두 흩어져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전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정오 무렵,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진을 쳤다. 여러 장수들이 한결같이 강력히 싸울 뜻을 나타내었다. 다만 낙안군수만 회피하려는 기색이 엿보여 한심했다. '하지만 군법이 엄연한데 피하려 한다고 그게 어디 될 법한 일인가!'

3일, 장수들이 한결같이 왜적에게 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분노를 나타냈다. 녹도만호 정운은 특히 "왜적들이 점점 서울에 다가가고 있으니 통분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다. 지금 곧장 출정하지 않아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중위장 이순신을 불러 내일 새벽에 출정할 테니 준비하라고 말한 후 장계를 써서 서울로 보냈다.  

출정에 앞서 탈영병의 목을 효수하는 이순신

이날, 이순신은 이틀 전(5월 1일)에 집으로 도망간 수군 황옥천(黃玉千)을 잡아 와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벤 다음 효시했다. 황옥천의 목이 달아나 허공에 걸렸던 곳은 진남관에서 마주 보이는 고소대라고 전해진다.

고소대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수군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 일명 좌수영대첩비), 통제이공수군대첩비의 건립 경위를 기록한 동령소갈비(東嶺小喝碑),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그 부하들이 공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세운 타루비(墮淚碑)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고소대 전경. 비각 안에 타루비 등 세 기의 비석이 들어 있다. 안내판과 좌수영대칩비 비문 축약 한글판 빗돌은 비각 왼쪽 앞에 있다.
ⓒ 정만진
통제문을 나온다.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이순신의 5대손 이봉상(李鳳祥)이 빈민들을 구제한 업적을 기려 세워진 선정비 등 모두 14기로 이루어진 전라좌수영비군(全羅左水營碑群)과 이량장군방왜축제비(李良將軍防倭築提碑)가 있다. 이량은 임진왜란 당시의 장수는 아니지만, 그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둑을 쌓았다니 저절로 호기심이 일어난다.

'1497년(연산군 3)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온 이량이 돌산도 북쪽과 장군도 동쪽 사이 해협에 수중(水中, 물속) 제방을 쌓아 왜구들의 침입을 막은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다. 원래 1643년(인조 21) 그의 5세손 이배원(李培元)이 글을 짓고 6세손 이필(李泌)이 글씨를 써 장군도에 세웠으나, 비석이 훼손되자 1710년(숙종 36) 8세손 이삼(李森)이 좌수영성 서문 밖(충무동)에 다시 세웠던 것을 1984년 이곳으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이량 장군의 행적 및 수중성(水中城) 축조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비문은 왜구들의 침략과 수중성의 전술적 가치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이량의 수중성 축성에 관한 기사는 여수시 발간 <내 고장 여수>에도 실려 있다. 이 책은 '영호남의 목구멍에 해당되는 전라좌수영 본영의 축성과 함께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현 여수와 돌산도 사이에 있는 장군도와 그 왼쪽에 있는 방왜축제(防倭築提)'라면서, 전라좌수영 본영이 축성된 1490년보다 7년 뒤인 1497년(연산군 3)에 전라좌수사 이량이 장군도와 돌산도 사이에 큰 돌을 날라 집어던져 약 100m의 물속 성제(城提, 성둑)를 쌓았다고 설명한다.

이후 왜구들은 드나드는 통로가 차단되어 감히 여수를 넘볼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량의 공적을 기려 섬에 '장군성(將軍城)'이라는 작은 비석을 세웠고, 섬에도 장군도라는 이름을 붙였다(흔히 장군도라는 이름이 이순신과 관련하여 작명된 것으로 짐작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돌산공원에서 바라본 이량 장군 유적지 장군도
ⓒ 정만진
다시 1516년, 이량이 타계하고 5년이 지난 때에 전라좌수사 여윤철(呂允哲)과 보성군수 송흠선(宋欽善)이 다시 비를 세웠고, 127년 뒤인 1643년에 황해감사 이배원(李培元)이 글을 짓고 함릉부원군 이해(李?)가 글씨를 써서 또 세웠고, 67년 후인 1710년에 전라좌수사 이삼(李森)과 정1품 지사 이경설(李景說)이 또 세웠다. 그 후에도 일제 강점기 시절에 시민들이 철비(鐵碑)를 세웠고, 보학자 이재기(李載驥)와 여수청년회의소가 또 세웠다. 이 중 1710년에 건립된 비석이 지금 진남관 통제문 옆에 옮겨져 자리잡고 있다.   

이량의 수중성 축성에 관한 글을 읽으니 명량대첩 때 울돌목 물속에 쇠사슬을 설치하여 왜선들을 격파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량보다 약 100년 뒤의 일이다. 수중성이 쇠사슬 설치의 원형(原型)이었을까? 그런 상상을 하면서,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장졸들을 지휘했던 고소대, 탈영병의 목을 쳐서 하늘에 내걸었던 고소대를 향하여 발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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