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탁금지법 한달, 달라진 풍경

2016. 10. 27.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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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탁금지법 시행 한달]쪼개고 나누고.. 저녁이 있는 삶3만원 미만 결제 늘고 퇴근후 술잔 대신 악기작년-올해 추석연휴 열흘뒤 '신용카드 데이터' 분석

[동아일보]
《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이 27일로 시행 한 달을 맞는다. 우려와 환호가 엇갈린 채 시작된 ‘청탁금지법 시대’는 우리 사회를 빠른 속도로 바꾸고 있다. 법인카드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유흥주점과 골프장 등에서는 결제 금액이 눈에 띄게 줄었고 나눠 내는 ‘N분의 1’ 계산이 크게 늘어났다. “저녁이 있는 삶을 되찾았다”는 중년의 직장인도 나타나고 있다. 차분히 법에 적응하고 있는 분위기다. 하지만 아직도 모호한 법 조항 탓에 법 적용 대상자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청탁금지법이 바꿔 놓은 대한민국을 살펴봤다. 》

24일 점심 무렵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식점 ‘두레’. 이 식당의 점심 메뉴는 1인당 2만7500원에서 5만5000원 선이다. 이날 손님은 1팀밖에 없었다. 손님이 앉을 수 있는 나머지 방 7개는 텅 비어 있었다. 7만 원 이상의 메뉴를 내놓는 저녁시간은 더 힘들다. 이 식당은 지난달 28일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주방과 홀 직원을 절반 가까이 줄였다.

 금융 공공기관 간부 S 씨(52)의 저녁 일정은 이달 들어 확 줄었다. 정부 부처 공무원, 금융회사 직원 등과의 술자리로 빼곡했던 일정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는 가족과 친구, 동료 직원과의 만남으로 차곡차곡 채워졌다. S 씨는 “이전에는 퇴근 후에도 업무와 관계된 술자리가 많아 주중에 가족과 저녁시간을 보내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고 말했다.

 400여만 명이 직접 대상자인 청탁금지법이 시행 한 달 만에 한국인의 일상을 상당 부분 바꾸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쪼개고 나누고 줄여’ 긁은 카드

 26일 동아일보가 입수한 국내 A신용카드사의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신용카드 결제 건수 및 금액 분석’ 결과에 따르면 골프장과 유흥주점, 노래방 등의 업종에서 법인카드 이용이 지난해에 비해 눈에 띄게 줄었다. 이 보고서는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20일간(9월 28일∼10월 17일)의 신용카드 결제 데이터를 지난해 10월 9∼28일과 비교해 분석한 것이다. 추석 연휴 효과를 배제하기 위해 비교 시점을 지난해와 올해 추석 연휴 열흘 뒤 20일간으로 잡았다.

 이 조사에 따르면 분석 대상 기간 유흥주점과 골프장 법인카드 결제금액은 지난해보다 각각 29%, 28% 줄었다. 노래방 결제금액도 11% 감소했다. 기업들이 접대를 위한 법인카드 사용을 대폭 줄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3만 원 미만 금액에 대한 결제 건수가 대폭 늘어난 점이다. 청탁금지법의 한도(3만 원)를 넘지 않기 위해 ‘쪼개고 나눠’ 결제하는 일이 증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유흥주점의 법인카드 결제금액은 줄었지만 3만 원 미만으로 결제한 건수는 지난해보다 25% 늘었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유흥주점을 운영하는 L 씨(58·여)는 “이달 들어 카드를 여러 장 갖고 와 3만 원 미만으로 나눠 긁어 달라거나 비용을 나눠 각각 결제하는 손님들이 확실히 늘었다”고 말했다.

 이승신 건국대 소비자정보학과 교수는 “청탁금지법이 그늘 속에 감춰져 있던 불합리한 접대문화를 없애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꿔 가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공무원 등을 상대하는 직장인들도 달라진 세태를 실감한다. 한 기업체에서 대관 업무를 담당하는 C 씨(31)는 최근 대학 때 취미 삼아 했던 ‘플라모델 조립’을 다시 시작했다. 입사 이후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가 이어져 엄두도 내지 못했던 취미다. 그는 “앞으로 건강을 위해 규칙적인 운동을 시작할 계획”이라며 “시간이 지나 청탁금지법이 유야무야돼 예전 생활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분석 대상 기간에 개인카드의 관람(뮤지컬 박물관 등) 및 취미(레저용품 악기 완구 등) 관련 업종 결제금액은 각각 51%, 18% 증가했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관람 취미 업종의 소비 증가는 여가활동의 변화를 뜻한다”고 말했다.

○ 한식, 일식 울고 중식은 그나마 선방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법인카드로 30만 원 이상 결제하는 ‘큰손’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도 확인됐다. 음식점에서 30만 원 이상의 법인카드 결제 건수는 지난해보다 최대 40%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00만 원 이상 결제는 일식집에서 40% 줄었다. 이어 한식집(―30%) 양식집(―20%) 순으로 감소했다. 다만 중식집은 변화가 없었다.

 이에 따라 음식점 등 일부 업종의 피해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한식집과 일식집의 법인카드 결제금액은 지난해에 비해 각각 11%, 21% 줄었다. 양식집도 4% 감소했다. 하지만 중식집은 오히려 6% 증가해 청탁금지법의 수혜 업종으로 나타났다. 한식점 두레의 이숙희 대표는 “장사가 안 돼 서울시내 점포 5곳 중 일부를 매물로 내놨는데, 사겠다는 사람이 나서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상가정보업체 ‘점포라인’이 보유한 수도권 상가 매물의 권리금과 보증금을 업종별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한식집 평균 권리금은 8월 말 9283만 원에서 이달 17일 7140만 원으로 23% 하락했다. 이달 17일까지 시장에 나온 매물도 1872건으로 지난해 전체 매물(1530건)보다 많았다. 권강수 한국창업부동산정보원 이사는 “비싼 메뉴를 파는 업종이 그렇지 않은 곳보다 타격이 커 부동산 시장에서도 명암이 갈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화훼농가 등 농축산업에도 영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10월 1∼25일 거래된 난(蘭)류의 물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 가격은 30% 떨어졌다. 이동범 한국화훼유통연합협동조합 이사장은 “공직자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에서도 수취거부(반송)를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며 “배송 물량 자체도 하루 800여 개에서 400여 개로 확 줄었다”고 말했다.

박희창 ramblas@donga.com·강성휘·주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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