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구의 길
드라마 <불야성>으로 돌아오는 진구를 만났다. 밤에도 불이 훤해 대낮같이 밝은 불야성처럼 진구는 <태양의 후예>로 지난 봄과 여름 가장 뜨겁고 요란스러운 길을 통과했다. 진구는 이제 그 길을 쉬엄쉬엄 걷고 있다고 말한다.
가벼운 농담을 하다가도 카메라 앞에 서자 돌변하며 이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재킷 89만원 준지. 니트 톱 가격미정 조르지오 아르마니. 진구 씨를 만난 모든 기자가 당신에 대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더군요. 겨우 4시간 남짓한 화보 촬영과 인터뷰를 하는 동안 모두에게 동일한 인상을 남겼네요. 그 시간 안에 ‘저 새끼 별로다’라는 인상을 남기는 게 사실 더 어려운 일이죠. 인상 쓰지 않는 건 너무 쉽잖아요.
그런가요?돈을 받거나 나를 알리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고맙죠. 그런데도 힘들다고 징징대거나 인상 쓰는 건 비양심적이에요. 아유, 신인 때를 생각해야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데뷔한 이래 <태양의 후예>를 기점으로 진구란 배우를 수식하는 단어가 좀 더 화려해졌죠. 한류 배우, 시청률 40%의 주인공, 심지어 아재 파탈까지. 배우로서의 삶이 그 전과 달라졌다고 생각하나요?그렇지 않아요. 변한 건 팬층이 좀 더 넓어지고 인지도와 대중성이 높아졌다는 정도? 솔직하게 말하면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워졌죠. 그럼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배우로서의 태도예요. 연기자로서의 신념이나 나아갈 방향, 연기에 임하는 자세는 여전히 같아요. 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인지도와 대중성을 확보했죠. 유아적인 질문이지만, 유명해지면 삶의 질이 더 높아지는 걸까요?아뇨. 그건 삶의 질에 대한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죠. 전 유명해지는 게 목표인 사람이 아니거든요. 저는 예전에도 제가 충분히 유명하다고 생각했어요. 으하하. 남들이 보면 웃을지 몰라도 전 그래요. 그러니까 지금 각국의 팬이 늘었다고 해서 삶의 질이 더 높아졌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아요.
그럼 본인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건 무엇인가요?너무 바른 생활 사나이처럼 보이는 대답일지도 모르는데, 양심이오. 어릴 적 누구나 한두 번쯤은 부모님에게 받은 교재비를 슬쩍하거나 가격을 부풀려 이야기해 더 많이 받아낸 적이 있을 거예요. 그렇게 얻은 돈으로 내가 좋아하는 걸 했다고 해도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았을걸요? ‘엄마한테 언제 걸릴까?’라는 불안감과 죄책감 때문에요. 양질의 삶은 불안함이 덜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군요. 하지만 양심과 상관없이 불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너무 많죠.일을 하거나 나이가 들고 가정을 꾸리면 양심과 상관없는 불안함이나 고민거리 같은 게 생기죠. 그럴 때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잘 기대는 편이에요. 힘들다는 이야기와 도와달라는 말도 잘하고.
잘 기댄다라….“혼자 버텨야지 뭘 징징대?” 혹은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거 알아요. 저만 해도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누구한테 빚지고 살지 말라”였어요. 그런데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갚을 수 있다면 돈이든 뭐든 적당히 빚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혼자 세상 사는 것처럼 다 떠안고 사는 것보단.
뭘 빚져봤나요? 돈을 빌린 적도 있나요? 물론이죠. 빌려준 적도 있고. 저는 후배들한테 “대출 한번 받아봐라”라고 권하기도 해요. 젊을 땐 사실 하루 벌어 하루 살잖아요. 맘껏 써보지도 못했는데 그렇다고 돈이 모이지도 않고. 그런 친구들에게 딱 3백만원 대출받아 1백50만원 정도 마음껏 써보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왕창 돈을 써보면 덜 영근 시기에 돈에 대한 무서움도 알고 뭔가 깨닫게 돼요.
본인이 해본 방법인가요? 저도 돈을 맘껏 써본 기억이 있죠.
뭘 했나요? 시시하지만 술 마시고 놀았어요. 신기하게 소주값으로도 그 큰 돈이 나가더라고요. 으하하. 비싼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듣던 대로 대단한 술꾼이네요. 새 드라마 이야기를 해보죠.11월 방영되는 MBC 드라마 <불야성>에서 남자 주인공 ‘건우’ 역을 맡았어요. <태양의 후예> 후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시기에 택한 작품이에요.저는 뭔가 대단히 계산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냥 타이밍이 잘 맞았고, 대본이 좋아 출연을 결정했어요.
가벼운 작품은 아닌 것 같더군요. 맞아요. 이요원·유이 씨와 함께 주연을 맡았는데, 얽히고설키는 인간의 탐욕을 그린 작품이에요.
<불야성>이 어떤 반응을 얻기를 바라나요? “역시 진구다”라는 연기력에 대한 호평을 원하나요, 아니면 높은 시청률인가요?솔직히 말하면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죠. 당연한 욕심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힘든 건 그 욕심을 지우는 과정이죠. 스스로에게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에요.
자신에게 기대를 하면 안 되나요?부담스럽잖아요. 그리고 혹시나 잘못되면 제 탓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요. 스스로를 탓하기 시작하면 다음 작품을 할 때나 앞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들어요.
스스로 균형을 잘 잡는군요.최대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해요. 주위에서 “잘될 거야. 대박이야!” 하면 “꺼져. 부담스러우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라고 말해요. 하하. 내 편이니까 칭찬만 해주잖아요.
스포츠를 좋아한다고 알려졌어요. 농구는 거의 마니아 수준이라는데, 최근에 새로 시작한 스포츠가 있나요?클라이밍을 시작했어요. 최근 새로운 것에 도전해 만족스럽고 신났던 유일한 일이에요. 클라이밍은 짧은 시간에 모든 게 정리돼요. 우선 오를 곳이 보여요. 오늘은 여기서 출발해 저기까지만 오르면 되는 거죠. 그러다가 물론 떨어지기도 하고요. 그렇게 끝까지 오르고 나면 성취감이 대단해요. 바쁜 사람들에겐 굉장히 좋은 스포츠예요. 짧은 시간 안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생각해보면 살면서 성취감을 느낄 일이 그리 많지 않단 생각도 들어요.그렇죠. <태양의 후예> 시청률이 40%가 넘었는데, 만약 우리가 목표를 40%로 잡았다면 성취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목표는 아니었거든요. 그건 그냥 깜짝 선물을 받은 거죠. 저는 작품을 할 때 시청률을 목표로 하진 않아요. 그러니까 작품이 잘됐다고 해서 성취감을 느끼지 않죠.
영화제 시상식에서 수상자들 지정석인 1층 10열에 앉는 것이 목표라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지금은 무엇이 목표인가요? 잘 살자, 잘 죽자!
에이, 재미없는데요. 하하. 진짜예요. 이미 저는 결승선을 통과했거든요. 목표를 이뤘어요.
어느 시점에요? 아마 영화 <마더> 이후가 아닐까요? 왜냐하면 그 작품을 한 뒤 저에 대한 이미지나 기대치가 달라졌거든요. 거슬러 올라가면 드라마 <올인>으로 데뷔했을 때 이미 꿈을 이룬 셈이에요. 그 후 좀 더 안정적이고 앞날에 대한 걱정 없이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마더> 출연을 계기로 이루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 쉬엄쉬엄 걷고 있어요.
배우는 불안정한 직업이잖아요. 이번 작품이 잘돼도 다음은 또 모르는 거고. 그럼에도 걱정 없이 쉬엄쉬엄 걸을 수 있는 건가요? 네. 전력 질주를 하지 않으면, 항상 에너지가 남아 있어요. 그래서 언젠가 무너져도 다시 올라갈 수 있죠. 그럴 힘이 아직 있으니까. 그러니까 쉬엄쉬엄 걷는 것도 괜찮아요.
Feature Editor 김소희 Photographs by Choi Seung Kwang Stylist 김은진 Makeup 오윤희 Hair 고훈 Assistant 이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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