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 1호 재판' 불명예..떡집 골목의 눈물
예전 같으면 떡 예약이 줄을 이어 거의 쉬는 날이 없었다. 특히 학교 운동회나 소풍을 비롯해 한가위와 관공서 기념일 등이 몰린 가을 시즌은 '대목 중 대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 등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 1호 재판 대상이 나왔다는 뉴스를 보고 제발 '떡'은 아니길 바랐다고 이씨는 하소연했다.
이씨는 "2~3년 전엔 낙원상가 한쪽 골목 전체가 떡집이었는데 최근 경기 불황으로 이미 절반 이상이 문을 닫았다"며 "그래도 대를 이은 '업'이라 자식에게 물려줄까 생각했는데 이젠 그만 접을 때가 된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백일 첫돌 칠순 결혼식 장례식 설날 추석 이사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빠지지 않는 터줏대감이자 이웃 간 정(情)을 나누는 상징이 바로 '떡'이었다.
명절 때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나눠주던 특별수당을 '떡값'이라 부른 것도 "아무리 생활이 팍팍해도 명절 때 차례상에 '떡'은 꼭 챙기라"는 국민 정서가 담겨 있었다. 떡값은 이처럼 좋은 뜻에서 출발했지만 어느 순간 '정치인 등 권력자 뇌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부정한 돈을 수수한 고위층이 하나같이 "떡값으로 받았다"는 궁색한 변명을 내놨기 때문이다. 2007~2008년 삼성특검 때 소위 '떡검(떡값을 받은 검사)' 사태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떡값은 최근 다시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떡 시장은 지난달 28일부터 시행된 청탁금지법에 직격탄을 받았다.
특히 최근 강원도에서 발생한 '청탁금지법 1호 재판' 회부 사례가 결정적이었다. 조 모씨가 자신의 고소사건을 맡은 춘천경찰서 수사관에게 시가 4만5000원 상당의 떡 한 상자를 보냈는데 이게 문제가 됐다. 조씨는 경찰서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영업 종료 시간 이후인 밤으로 조사 시간을 조정해 준 것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 직원들과 나눠 먹으라고 보냈다"고 진술했다.
문제는 이 사건이 여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떡이 '청탁금지법에서 금하는 금품의 대명사'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됐다는 점이다.
은평구 불광동에서 수년째 떡집을 운영하는 진 모씨(45)는 "한 단골 고객은 학부모 시험 감독을 가면서 늘 선물용 떡을 사가곤 했는데 갑자기 '환불해줄 수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며 "추석 이후엔 미리 예약했던 선물용 떡까지 줄줄이 취소하면서 주문이 거의 반 토막이 났다"고 하소연했다.
한국떡류식품가공협회 한 관계자는 "법 시행 이후 협회 차원에서도 간간이 유관기관에 돌리던 떡 선물을 일절 하지 않고 있다"며 "아직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라서 지켜보고만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 육아 커뮤니티에도 불만이 늘어가고 있다. 'anglcrxxx'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한 교사는 "딸아이가 곧 백일인데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백일떡을 돌리려다 권익위에 10여 분을 기다린 끝에 겨우 통화했는데 '백일떡은 모르겠다'는 애매한 답변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낙원동의 한 떡집 주인은 "절구로 수십 번 치고 '편'을 만들어 찌는 수없는 정성이 들어간 그런 몇 천원짜리 '떡'을 뇌물이라 하면 만든 사람 심정이 어떻겠느냐"며 "황소 같은 거악을 잡으려는 '칼'이 오히려 서민들만 잡는 것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울 도심에서 빵 하나에 몇 만원씩 하는 최고급 호텔 '부티크 베이커리'는 법 시행 이후에도 여전히 무풍지대라는 점이다. 서울시내 S호텔 1층에 있는 베이커리에선 샌드위치 하나가 2만1000원, 생일 케이크는 6만5000원에 달한다. 이날 방문한 매장은 테이블마다 손님으로 가득차 있고 상품도 나오기가 무섭게 팔려갔다. 한 직원은 "고급 호텔 베이커리는 오래된 VVIP들이 주 고객이므로 청탁금지법 영향이 별로 없는 편"이라고 말했다.
[유준호 기자 / 임형준 기자 / 박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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