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라마단 시기에 반가운 영화, <자백>

백철 기자 입력 2016. 10. 22.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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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백>이 드디어 몇 년 전 개봉했던 <두개의 문>의 기록을 넘겼다. 1000만 영화가 많은 때라 관객 숫자가 적어 보일 순 있지만, 독립영화가 관객이 7만명이 넘었다는 것은 파장이 굉장히 큰 것이다.”

10월 20일 저녁 서울 동작구의 한 영화관에서 <자백>이 상영됐다. 영화가 끝나고 <자백>을 후원했던 1만7000여명의 이름이 스크린에 흐르는 동안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기다렸다. 영화가 완전히 끝나고 영화관에 불이 들어왔다. 무대에는 최승호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GV)를 진행할 변영주 감독이 앉아 있었다. 관객들은 두 사람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사회를 맡은 변영주 감독은 “지금은 언론의 라마단 같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밤에 저널리즘 폭식을 한 느낌이라 즐거웠다”고 감상평을 밝혔다. 이어 변 감독은 “<자백>이 드디어 몇 년 전 개봉했던 <두개의 문>의 기록을 넘겼다. 1000만 영화가 많은 때라 관객 숫자가 적어 보일 순 있지만, 독립영화가 관객이 7만명이 넘었다는 것은 파장이 굉장히 큰 것”이라며 <자백>의 의의를 말했다. 이에 최 감독은 “<두개의 문>은 20여개 상영관에서 시작했지만 우리는 개봉 당시 120개 이상 스크린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며 겸손해 했다.

영화 <자백>의 한 장면. 최승호 감독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인터뷰를 시도하고 있다.

스토리펀딩 통해 1만7000명 후원자 모아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로 흔히 꼽히는 것은 2009년 개봉한 <워낭소리>와 2014년 개봉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다. 두 작품 모두 세간의 폭발적인 주목을 받아 각각 293만명, 480만명의 관객 기록을 남겼다. 그 다음으로 많이 본 독립 다큐영화로는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울지마 톤즈>다. 관객 기록은 44만명이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인간의 삶을 소재로 한 휴먼 감성 다큐멘터리라는 점이다.

반면 시사 현안을 고발하는 시사 다큐멘터리도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트루맛쇼>(2011), <두개의 문>, <MB의 추억>, <유신의 추억>(이상 2012년 개봉)이 주목을 받았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서도 <천안함 프로젝트>(2013), <다이빙벨>(2014) 등이 개봉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1만~2만명의 관객 수를 기록했다. 진보·개혁 성향의 시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선을 넘지 못한 작품이 많았다.

10월 20일 기준으로 <자백>은 7만5000명을 기록했다. 위에 언급된 시사 다큐멘터리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 수를 기록한 <두개의 문>의 관객 기록(7만3000명)을 넘어선 것이다. 흥행의 이유로 개봉 전부터 스토리펀딩을 통해 후원자들을 모으고, 언론 인터뷰 등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펼친 것이 꼽히지만, 기존 독립다큐 영화에도 후원자들은 있었다. 특히 <자백>의 성공에는 영화 자체의 짜임새가 주효했다는 분석이 있다.

<천안함 프로젝트>의 제작자였던 정지영 감독은 한국 언론의 현실과 최 감독의 치밀한 취재가 결합해 좋은 작품이 나왔다고 봤다. 그는 “국정원 간첩조작을 <뉴스타파>(최승호 감독이 앵커로 있는 인터넷 매체)에서 많이 다뤘다고는 하나 주류 언론에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정권에 장악당한 방송사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소재가 영화화되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관심을 더 많이 받은 것”이라며 “한편으로는 참담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천안함 프로젝트>를 제작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시사 다큐영화 제작의 어려움을 말했다. 그는 “영화 연출자라고 해도 개인일 뿐이고, 개인이 인터뷰이를 상대하는 게 쉽지 않다. 기자가 접근할 때와 영화감독이 접근할 때 상대방의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 감독은 20년 이상을 MBC에서 PD로 일해온 전문 언론인이다. 영화에는 최 감독의 전문성이 힘을 발휘한 장면이 여럿 등장한다.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서 의문사한 탈북자 한준식씨의 신원을 밝히고 지인들을 만나는 과정이나 경찰 관계자와 중국 공안으로부터 답변을 이끌어내는 모습은 숙달된 저널리스트의 역량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치밀한 취재로 영화 짜임새 뛰어나 최 감독이 시종일관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자백>의 장점으로 꼽힌다. 이는 <자백>과 더불어 많은 관객의 찾은 <두개의 문>에서도 보여지는 특징이다. 용산참사를 소재로 한 <두개의 문>은 재판 기록과 참사 당시 현장 기록을 통해 용산참사를 재구성했다. 용산참사 당사자들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내용도 빼지 않고 그대로 담았다. <자백>에서도 최 감독은 간첩조작 피해자 유우성씨의 동생이 눈물을 흘려도, 과거 재일교포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해도 평상심을 유지했다. 이런 태도를 두고 GV에서 변영주 감독은 최 감독과 미국의 다큐 감독 마이클 무어를 비교했다. 변 감독은 “최승호와 마이클 무어를 비교하는 말들이 많지만 둘의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마이클 무어의 영화는 ‘좌파깡패 마이클 무어’라는 캐릭터가 영화를 끌어가지만, 최승호 감독은 언론인의 태도로 접근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의 작업물이 나왔다”고 말했다. 최 감독도 “되도록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사실로 승부를 걸기 위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톤을 유지하려 애썼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객관성이 흔들린 부분은 조연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최 감독이 원 전 원장에게 간첩조작 피해자 유우성씨에 대해 질문하자 원 전 원장은 “내가 그만둔 지 얼마나 됐는데”라며 입을 닫는다. 최 감독을 피해다니는 과정에서 원 전 원장이 ‘썩은 미소’를 짓는 장면도 나온다.

정지영 감독은 사회적인 문제가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TV 프로그램보다 관객들 머릿속에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다고 말했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 1시간30분 이상 볼 수밖에 없는 영화와 언제든 시청자가 채널을 돌릴 수 있는 TV 프로그램의 차이를 말한 것이다. 정 감독은 “관객들이 집중력 있게 작품을 보기 때문에 그 사안에 깊이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영화의 강점이다.

정 감독은 만약 최승호 감독이 영화의 연출기법 등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한다면 <자백>보다 더 설득력 있는 좋은 작품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정 감독은 <자백>이 화제를 얻는 현실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솔직히 최 감독이 다큐영화를 계속 만드는 모습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파급력만 놓고 봤을 때 영화는 TV 프로그램보다 못하다. 시사 다큐를 만든다고 해도 방송국에 소속되어 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주류 언론이 제자리를 찾게 되면 최 감독이 방송국 PD로 복귀해서 <자백>과 같은 내용으로 영화가 아니라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여럿 만들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시사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정지영 감독은 잘 만든 시사 다큐멘터리로 <인사이드 잡>(2010)과 <다음 침공은 어디>(2015)를 추천했다. 2008년 금융위기의 내막을 파헤친 <인사이드 잡>은 2011년 아카데미 영화제 다큐멘터리 작품상을 수상했다. <인사이드 잡>은 금융위기를 초래한 당사자들을 찾아가 직접 질문을 던진다. 영화에 등장한 신용평가사 무디스의 전직 임원은 금융위기 직전까지 여러 부실기업들을 ‘투자적격’ 등급으로 평가했다는 점을 떠올린다. 영화가 ‘왜 그랬느냐’고 질문하자 이 전직 임원은 실소만 풍길 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한다. <다음 침공은 어디>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최신 영화다. 이 영화는 마이클 무어가 미국 국방부의 전사가 되어 세계 각국을 ‘침공’하는 이야기다. 이탈리아를 침공한 무어는 1년 유급휴가가 8주나 된다는 사실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프랑스를 침공한 무어는 가난한 동네의 작은 학교에서도 학생들의 밥은 꼬박꼬박 챙겨주는 모습에 놀란다. 꼭 ‘비판’을 하지 않더라도 시사 다큐메터리의 맛을 잘 살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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