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내 직업은 '휴먼 노마드'.. 아내·아이 둘과 함께 19년째 유랑 중

유소연 기자 2016. 10. 2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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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弗로 떠난 이민, 20년 세계일주가 되다' 펴낸 김현성씨 가족 금융회사 그만두고 멕시코行, 길 위에서 적응한 아이들.. 그래도 내 인생이 좋다

19년째 세계를 떠돌며 사는 가족이 있다. 한 나라에 짧게는 3개월, 길게는 5년 정도 머물다 적응할 만하면 다른 나라로 훌쩍 떠난다. 부부와 남매 네 식구가 새로 가게 된 나라의 언어도 모르고 집도 구하지 않은 채로 간다. 비자, 직업, 학교 어느 하나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 비행기삯과 한두 달 치 방세 정도만 챙긴다. 1998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칠레, 미국, 중국, 뉴질랜드, 일본을 거쳤다. 현재 독일에 4년째 머물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현성(46)씨가 건넨 명함에는 지구본 모양의 로고와 함께 '휴먼 노마드'라고 적혀 있었다. "유목민이 푸른 초지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이들이라면 우리 가족에게 초지는 사람(휴먼)이에요. 이방인으로 도착한 도시에서 적응하고 아는 사람들이 생기면 또 다른 곳에서 이방인의 삶을 시작하는 거죠. 어느 나라든 처음 공항에서 우릴 반기는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떠날 땐 최대한 많은 사람이 우리 가족 배웅하러 나오게 하자고 했어요. 나는 휴먼 노마드족의 족장이에요."

김씨는 옮겨 다닌 가족의 역사를 기록해 '300불로 떠난 이민, 20년 세계일주가 되다(다반 刊)'라는 책을 냈다. 출간 준비를 위해 5개월 전 한국에 홀로 들어왔다. 아내 남혜용(48)씨와 아들 김진(20)군, 딸 김슬(17)양은 독일에 있다. 지난 십여 년을 가족이 똘똘 뭉쳐 다녔으니 아이들이 독립하기 전에 떨어져 있는 연습을 하는 거라고 했다. 김씨는 한국에서 나름대로 잘나가던 대기업 사원이었다. 회사 다닌 지 1년 3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무작정 멕시코행 표를 끊었다. 당시 갓 돌을 넘겼던 진이는 스무 살이 됐다.

대기업 그만두고 떠돌이 장사

―당시로선 괴짜 소리 좀 들으셨겠어요.

"나름 명문대(고려대 서어서문학과) 나와서 연봉 높은 금융회사에 들어갔어요. 결혼하고 애도 생겼으니 착실하게만 살면 될 줄 알았죠. 그런데 전세 대출이자 매달 70만원씩 갚고 이래저래 돈 쓰다 보면 밥 세 끼 먹기도 버거운 거예요. IMF와 맞물린 시기라 다들 회사 안 잘리고 다니는 것만도 고마워하라는데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대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갔던 멕시코가 떠올랐어요. 아내도 스페인어를 전공했으니 말도 그나마 통할 것 같았고요. '내 능력을 회사 말고 나와 가족을 위해 써보자' 결심이 서자마자 사표 냈죠. 젊어서 무모하기도 했고요. 아내에겐 '내가 멕시코 가면 오렌지 주스는 원 없이 먹게 해주겠다' 했어요."

―부인은 뭐라던가요?

"말리진 않더라고요. 훗날 왜 안 말렸냐고 물어보니 '젊을 때 기회를 주는 게 맞지 않나' 싶었대요. 아내에게 자리 잡고 있을 테니 한 달 뒤에 들어오라 하고 먼저 비행기를 탔어요. 비행기표 끊고 나니 300달러 남더라고요. 관광비자 3개월짜리 받아서 멕시코 과달라하라에 있는 대학 동기 집에 얹혀 살았어요."

―300달러라니 믿기지 않는데요.

"그때는 가족들 오기 전에 집도 구하고 일거리도 금방 얻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대학시절 교환학생으로 과달라하라에 있을 때 한인들 보며 '저렇게 장사해서도 잘 사네' 하고 치기 어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3년 뒤 회사 그만두고 다시 찾아가니 태도가 달라요. 아무런 이해관계 없는 유학생 대할 때와 이제 생업하려고 찾아온 사람은 다른 거죠. 한국 양말이 잘 팔린다길래 빚내서 양말 떼다가 인디언 마을들을 돌아다녔어요. 우리나라로 치면 남원 춘향제, 진해 군항제처럼 매년 일정 기간 각 도시에서 열리는 축제에 가서 노점상을 하는 거예요.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살던 시절이었죠."

―계속 양말 장사하면서 산 건가요?

"그렇게 몇 개월 다니니까 요령이 생겼어요. 어느 축제에 어떤 자리에 가야 장사가 잘되는지 알게 됐죠. 멕시코 보부상들 보며 '바라 바라 바라토(쌉니다, 싸요)' 같은 말도 익히고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떠돌이 장사에 청춘을 걸기가 싫더라고요. 한국에서 넥타이 떼다가 납품하는 일을 시작했어요. 밤에 과달라하라에서 멕시코시티 가는 버스를 타면 아침에 도착하거든요. 터미널 화장실에서 씻고 멕시코시티 가게들에 거래처 뚫으러 다녔어요. 한 6개월 얼굴 비치니까 일흔 넘은 노인이 문을 열어줬어요. 500달러를 첫 계약금으로 받았죠. 그분이 다른 업체도 소개해줘서 거래처를 늘려갔어요. 그렇게 사업을 키워 사업비자도 얻었는데 욕심 부리다 망했어요. 전 재산을 투자해 사업을 키우려다 크게 덴 거죠."

―도와줄 사람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했나요?

"그 사이 둘째도 태어났고 정말 빈손으로 한국에 들어왔어요. 친척들이 '한 사람 더 늘었으니 부자 됐다고 생각하라'고 위로해 주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대학 나와 떠돌이 장사하면 손가락질해요. 그런데 외국에서 그런 일 하면 실패해도 '고생하는구나' 합니다. 9개월을 기 죽어 지내니 보다 못한 아내가 먼저 미국으로 가서 살아보자고 했어요."

길 위의 학교 다니는 아이들

계획한 대로 멕시코에 정착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김씨는 삶의 방향을 조금 틀어보기로 했다. 잉여 소득을 위한 노동은 하지 않고 생활이 가능하고 비행기 값을 벌 수 있을 정도로만 일하기로 했다. 2001년 미국에 도착해 일급 50달러짜리 컨테이너 잡부 일부터 시작했다.

―아이들이 적응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겠어요.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과정이죠. 아이들은 나름대로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요. 부모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요. 새로 도착한 도시가 우리 가족에겐 하나의 정글과도 같아요. 말도 안 통하고 비자 문제도 해결해야 하니 처음부터 밑바닥에서 헤쳐나가야 해요. 새로운 땅에 도착한 날이면 아내는 항상 흰 쌀밥에 김치와 김을 저녁 반찬으로 내와요. 이 밤이 지나면 가족 모두 내일부터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식인 거죠."

―그래도 학교 정도는 미리 알아봐야 할 텐데요.

"학교 문제가 해결 안 돼서 길게는 반 년까지도 쉬어본 적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애들이 친구들 못 사귀는 방학을 가장 싫어해요. 진이는 지금 또래 학생들보다 나이가 두 살 많아요. 학교는 국제학교 말고 현지 학교로 보내왔어요. 그 나라 말을 몰라도 일단 떨궈 놓는 거죠. 슬이는 어렸을 때 미국 학교 다녔으니 어른들이 체벌하면 당연히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줄 알아요. 그런데 중국 살 때 학교에서 단체 기합도 주고 체벌하는 선생님도 있으니까 애한테 엄청난 충격이었죠. 그렇게 온몸으로 '나라마다 사람들 사는 게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는 걸 받아들이면서 자라게 됐어요."

―생활 환경이 좋은 미국이나 뉴질랜드에 정착할 생각 안 하셨나요?

"그런 고민 했죠. 미국에서 아내가 5년 동안 직장 다니니까 회사에서 영주권 신청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했어요. 처음엔 신이 났죠. 더 이상 1년씩 비자 갱신을 안 해도 되고 신분도 확실해질 테니 아메리칸 드림이 눈앞에 온 듯했어요. 아내가 넓은 집도 사고 차도 좋은 걸로 바꾸자고 하더라고요. 불현듯 '내가 넓은 집 살고 좋은 차 끌게 되면 우리 가족 인생은 다시 은행 소유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내와 나는 더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야겠죠. 1년 가까이 고민하다가 결국 5년 넘게 쌓아온 모든 것을 버리고 중국 대련으로 떠났어요. 그 후에 뉴질랜드에서 조금 살다 보니 진이가 먼저 '아빠, 우리 다른 곳으로 떠날 때가 된 것 같아요' 하더라고요. 아내는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하고요, 하하."

―애들이 외국어는 잘하겠어요.

"아이들이 한국어, 영어, 일본어, 독일어는 잘하고 중국어나 스페인어는 조금 해요. 제가 아이들 데리고 옮겨다니며 생활한다니까 먼저들 묻는 게 '학교는 어떻게 하냐', 그다음 질문이 '외국어 공부는 어떻게 시키냐'예요. 독일에 왔을 때 독일어를 전혀 모르니까 기초 코스부터 시작해야 했는데 애들이 주눅이 안 들어요. 낯선 데 적응하는 게 이미 일상이 된 거죠. 외국어는 우리가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익힐 뿐이에요. 애들한테도 외국어 잘한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해요."

"지구는 둥그니까 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살아온 게 후회되진 않나요?

"예전에 다니던 회사 동기를 얼마 전 만났어요. 부장이 돼서 연봉 1억씩 받는대요. 같이 저녁을 먹는데 동기가 회사에 볼일이 생겼다며 급히 나가더라고요. 한국에 있었다면 저도 똑같았겠죠. 전화 받으며 급히 나가는 동기 뒷모습을 보며 '잘 가라, 또 다른 내 인생아'라고 했어요. 돈은 덜 벌지만 적어도 저는 나중에 재밌는 얘기를 많이 아는 동네 할아버지로 늙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비슷한 도전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멕시코에서 막일하던 시절에 너무 힘드니까 나도 모르게 '나 고대 나왔는데'라고 혼잣말을 했어요. 그렇게 말한다 해도 알아듣고 대우해주는 사람 하나도 없죠. 그땐 젊으니까 학벌 같은 기득권을 주저하지 않고 버렸어요. 만약 지금 떠났다면 '나 한국에서 이랬던 사람인데'라며 고개가 빳빳했을 거예요. 한국이 싫으면 외국으로 가라고 꼭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지구는 둥그니까 어디를 가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우리나라 젊은 친구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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