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오름기행] 사람과 가까운 오름, 사람이 빚은 숲길

손민호 입력 2016. 10. 21. 00:07 수정 2016. 10. 24.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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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오름기행 ⑭ 저지오름
저지오름은 제주도 서부 중산간마을을 대표하는 오름이다. 서부 중산간지역에는 저지오름보다 더 크고 우람한 오름도 여럿 있지만, 저지오름보다 사람과 가까운 오름은 없다. 마을 이름을 그대로 따온 이름에서도, 같은 이름의 마을과 바투 붙은 자리에서도 저지오름과 사람의 인연을 읽어낼 수 있다. 자연과 사람이 얽히면 대체로 끝이 안 좋게 마련인데 저지오름은 드문 예외의 사례다. 오랜세월 인적이 더해지고 포개진 모습이 오늘의 저지오름이다.
저지리 이야기
저지오름(293m)은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에 있다. 저지리는 물도 귀하고 먹을 것도 마땅치 않아서 지지리 가난했던 중산간마을이다. 4ㆍ3사건이 났을 때는 마을이 통째로 없어졌다. 4ㆍ3사건이 일어나자 남한 정부는 제주도 해안에서 5㎞ 안쪽에 있는 내륙 마을을 태워 버렸다. ‘빨갱이 소굴’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저지마을에도 소개 명령이 떨어졌고 저지리 사람은 모두 차귀도 배가 뜨는 갯마을 고성리로 강제 이주했다. 세상이 잠잠해진 뒤에야 저지리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왔고, 지금은 1100명이 감귤ㆍ메밀ㆍ마늘 따위를 기르며 살고 있다.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저지마을은 여전히 한갓진 중산간마을이지만 여행자가 꾸준히 들고 난다. 제주올레 덕분이다. 제주올레 13코스의 종점이자 14코스 시점이 저지마을회관 앞이다. 14-1코스도 같은 장소에서 갈라진다. 저지마을에서 제주올레 3개 코스가 합해졌다가 갈라진다. 저지예술인마을은 물론이고 저지마을 근처의 낙천리 의자마을, 오 설록 티뮤지엄도 제주올레 덕분에 명소로 거듭났다.
저지오름은 저지마을 뒷산이다. 저지마을회관 바로 뒤에 병풍처럼 서 있다. 제주올레 13코스가 저지오름을 올랐다 내려온 뒤 마을로 들어선다. 별안간 떠오른 저지리 명물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주연이 저지오름이다. 마을과 가깝기도 하거니와 오름 둘레를 따라 걷는 숲길이 좋아서 여행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마을 뒷산은 보통 마을의 진산(鎭山)이다. 오름도 마찬가지다. 성읍의 영주산이 그렇고, 예래동의 군산이 그렇다. 그러나 저지오름은 다르다. 산이 마을을 지켰다는 전설 하나 전해오지 않는다. 외려 마을이 산을 보살핀 사례가 더 많다. 저지오름이라는 이름도 마을에서 비롯됐다. 저지리 옛 이름이 ‘닥모루(닥몰)’다. 닥나무 마루라는 뜻으로‘저(楮)’ 자가 닥나무를 가리킨다. 마을에 닥나무가 많아서 닥모루라 불렸다는데, 마을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저지’가 됐다. 저지리 사람은 오름에 초가지붕을 덮을 때 쓰는 새(띠)가 많아서 새오름이라고 불렀다.
사람이 빚은 숲
오름은 한라산 자락에 얹힌 산악지대 오름을 제외하면 대부분 민둥산이다. 태생이 화산이니 어쩔 수 없는 팔자다. 저지오름도 민둥산이었다. 저지리 사람이 나무를 심기 전까지 저지오름은 촐비러(꼴 베러) 가거나 소를 기르던 언덕배기 풀밭이었다. 김진봉(56) 저지마을개발위원장이 우스개 삼아 말했다. “저지오름에 묘를 잡으면 벌초하러 갈 일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오름 자락에 소를 많이 풀어놨다는 얘기다.
작지곶자왈에서 만난 종가시나무. 가지가 공작 꼬리 모양 넓게 펼쳐져 있어 여러 그루로 보이지만 실은 한 그루다. 곶자왈에서는 나무가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 줄기가 여러 갈래로 뻗어나와 중심을 잡는다.
지금의 저지오름은 숲이다. 깊고도 그윽한 숲이다. 물론 사람이 만든 숲이다. 1962년부터 1978년까지 이어진 산림녹화사업의 결과다. 제주에서 산림녹화사업을 하면 오름 어귀 길가에 삼나무나 편백나무를 심는 게 전부였다. 차 타고 휙 지나가는 높은 사람의 눈에 푸르게만 보이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지리 사람은 달랐다. 처음에는 오름 아랫도리에 소나무를 심었다. 시간이 지나자 소나무가 깊은 숲을 이뤘다. 소나무를 심은 지 16년 뒤에는 오름 윗도리 분화구 주변에 삼나무를 심었다. 삼나무는 소나무보다 빨리 자라서 삼나무도 울창한 숲이 됐다. 그렇게 민둥산은 푸른 산으로 거듭났다.
작지곶자왈에서 흥미로운 식물을 발견했다. 제주도에서는 ‘왕모시’라고 부른다고 했다. 옛날 제주도에서는 통시(제주도의 재래식 화장실) 옆에 왕모시를 심었다고 한다. 왕모시의 넓은 잎이 휴지 대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지금의 저지오름은 식물 220여 종이 서식하는 건강한 숲이다. 사람이 일부러 심은 소나무ㆍ삼나무는 물론이고 옛날에 많았다는 닥나무도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숲길에서 만나는 나무는 훨씬 많고 다양하다. 이를테면 예덕나무ㆍ돈나무ㆍ까마귀쪽나무ㆍ후박나무ㆍ생달나무ㆍ육박나무ㆍ자귀나무 등 뭍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나무가 오솔길을 따라 자리를 잡고 있다. 대부분 따뜻한 기후에서 서식하는 종이다. 나무만 많은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유난히 반짝반짝 윤이 나는 고사리가 수풀 사이에서 보였다. 제주 말로 ‘도체비고비’다. 제주지질공원 해설사 김용하(62)씨의 설명을 옮긴다.

“도깨비 고사리라는 뜻이지요. 도깨비 불 아세요? 밤에 번쩍번쩍 빛나는? 이 고사리 잎에 야광성분이 있어요. 그래서 밤에도 빛이 나요. 그래서 도깨비 고사리이지요.”

저지오름은 2005년 생명의 숲으로 지정됐고, 이태 뒤에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대상을 받았다. 저지오름은 가장 아름다운 숲을 지닌 오름 중 하나로 꼽힌다.

분화구로 내려가다
제주 오름 대부분은 ‘말굽형’이다. 용암이 흘러내린 자리를 따라 분화구 한쪽이 터져 오름이 말굽 모양을 띠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지오름은 원형에 가까운 분화구가 보존돼 있다. 용암이 화산 바깥으로 흘러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름 가운데 원형의 분화구가 놓여 있고 오름 바깥도 원형을 그리고 있어 저지오름을 지도에서 보면 거의 완전한 동그라미로 보인다. 오름 전체 둘레는 약 2.5㎞이고 분화구 둘레는 약 800m다. 저지오름은 반듯하게 잘 생긴 오름이다.

오름이 원형이니 탐방로도 원형이다. 오름 바깥 둘레를 따라 1540m 길이의 저지오름 둘레길이 있고 분화구 능선을 따라 690m 길이의 분화구 둘레길이 있다. 두 길 모두 평탄하고 쉬운 오솔길이다. 앞서 적은 대로 오름 아래 둘레길에는 소나무가 많고 분화구 둘레길에는 삼나무가 많다. 위 아래 둘레길을 390m 길이의 연결로가 잇는다. 꽤 가파른 나무 계단이 놓여 있다. 연결로 구간만 빼면 저지오름은 내내 부드럽다. 다 둘러보는데 두 시간이면 넉넉하다.

정상 전망도 빼어나다. 분화구 정상에 전망대가 설치돼 있는데, 사방이 훤히 트여서 전망대에 오르기만 해도 개운하다. 전망대에서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한라산 자락이 드러나고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수월봉과 바다 너머 차귀도가 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비양도가 서 있고 남쪽으로는 산방산이 서 있다.
작지곶자왈에는 이렇게 움푹 팬 웅덩이가 수두룩했다. 옛날 용암이 분출했던 흔적으로 숨골이라 부른다.
저지오름은 분화구 어귀까지 내려갈 수 있는 흔치 않은 오름이기도 하다. 분화구 정상 전망대에서 분화구 어귀까지 62m 길이의 데크로드가 조성돼 있다. 경사가 아주 심하다. 내려가는 길은 견딜 만한데 올라오는 길은 아주 고역이다. 바닥까지 내려가면 온갖 종류의 덩굴로 뒤덮인 원시림이 드러난다. 긴 세월 사람을 받아본 적이 없어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숲이 차라리 기괴하다. 30년 전만 해도 이 분화구 바닥에서도 유채ㆍ보리 따위를 심었다고 한다. 덩굴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저지리 사람의 묘도 분화구 바닥에 있다고 한다. 저지오름은 분화구에서도 사람을 품고 있었다.

■여행정보

오는 29일 저지리 녹색농촌체험마을 체험장에서 ‘에코파티’가 열린다. 저지리 주민과 함께 생태체험놀이도 하고 저지오름도 오른다. 마을 주변의 작지곶자왈을 탐방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참가비 무료. 제주관광공사 064-740-6975. 저지마을 사무소 064-773-1948. 제주올레 13코스가 저지오름을 올랐다 내려온다. 저지마을회관 앞에서 제주올레 13코스, 14코스, 14-1코스가 만난다. 저지리 주민이 운영하는 ‘저지당몰국수’에서 고기국수(6000원)과 돔베고기(소 1만원)을 먹었다. 064-773-0679.

글ㆍ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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