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치페이 하거나 구내식당으로.. 줄세운 '김영란法'

양모듬 기자 2016. 9. 2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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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움츠린 시행 첫날.. 공무원은 '몸조심 10계명'] 한정식집 등 고급음식점 '김영란 메뉴'에도 손님 뚝 구청의 기업협찬행사 잇단 취소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 한 냉면집. 야당 국회의원 보좌관 A씨는 국정감사 업무 협의를 위해 관련 부처 공무원과 냉면(1만원) 두 그릇과 빈대떡(2만원) 한 접시를 주문한 뒤 암산으로 음식값을 계산했다. 밥값이 부정 청탁 금지법(일명 김영란법) 한도인 1인당 3만원이 넘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식사를 끝내고 A씨는 공무원에게 "각자 계산하자"며 신용카드를 꺼내 정확히 반만 계산했다. 계산대에는 A씨처럼 각자 먹은 음식값을 계산하려는 손님들이 길게 줄지어 있었다. A씨는 "'더치페이'를 하니까 깔끔하고 좋은데 계산대 줄이 길어진 게 불편하더라"고 말했다.

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28일 정부청사가 밀집한 세종시와 국회가 있는 서울 여의도 등 전국의 관공서와 학교 인근 식당에선 이런 모습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노동부 이모(32) 사무관은 "첫 케이스로 걸리기라도 하면 공무원 인생이 끝장날지도 모를 것 같아 앞으로 한동안은 혼자 먹거나 구내식당을 이용하려 한다"고 말했다. 경기도청 구내식당은 평소 점심때 800명분을 준비했지만, 이날은 1000명분을 준비했다. 업무상 공무원을 많이 만나야 하는 대기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당수 대기업은 임직원에게 "되도록 공무원과 식사 약속을 잡지 말고, 불가피할 경우 1인당 3만원 이하 대중식당을 활용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날 공무원과 교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는 '김영란법 10계명'이란 글이 돌았다. "제자나 부하에겐 물 한잔도 얻어먹지 마라" "택배로 온 선물은 반드시 반송하라" "골프장 갈 때나 식사 후에 '카풀' 하면 그것도 걸린다" 같은 내용들이다. 작성자가 불분명한 이 글에는 골프장에 갈 때 이용하는 '카풀'도 그 거리에 준하는 택시비로 계산되기 때문에 김영란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식의 구체적인 조언도 담겨 있었다. "계속 거래해야 하는 사람이 이성이라면 아예 사귀어라"거나 "공직에 나설 거면 혼자 살아라" 같은 농담 섞인 내용도 10계명에 포함됐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곳도 있었다. 서울대 관계자는 "서울대병원이 있는 연건캠퍼스에선 법 시행을 쌍수 들어 환영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의대 교수나 레지던트 등 병원 직원들은 그동안 '입원·수술 일정을 앞당겨달라'는 부탁에 시달려 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부탁이 부정 청탁에 해당한다는 해석이 나오자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반면 강연료로 많게는 시간당 수백만원까지 받던 서울대 교수들 사이에선 강연료가 시간당 20만원으로 정해지고, 기업들의 학회 협찬도 금지되면서 "앞으로 학내 활동이나 연구에 전념해야겠다"는 자조 섞인 말이 오갔다.

한정식집과 호텔 등 고급 음식점들은 1인당 3만원이 넘지 않는 이른바 '김영란법 메뉴'를 속속 내놓았다. 서울 중구의 한식 레스토랑 '콩두'는 이날부터 2만9800원짜리 '928(9월 28일이란 뜻) 메뉴'를 내놓았다. 이 식당 한윤주 대표는 "오늘 점심 손님의 30%가 '928 메뉴'를 주문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 식당은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세종시 정부청사 인근 한 고깃집은 "점심 메뉴를 2만5000원 아래로 다양하게 만들어 놨는데도 손님이 절반 이상 줄었다"고 말했다. 본지가 서울의 대형 음식점 20곳에 문의해본 결과, 모두 "28일을 기점으로 예약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꽃집도 타격을 받았다. 서울 마포구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신모(33)씨는 "인사철에 들어오던 축하 난 주문이 뚝 끊겼다"며 "현실적으로 5만원 이하 난을 만들어 팔기 어려워서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구청 등에서 기업 협찬을 받아 진행하던 각종 대민(對民) 지원 사업이 예기치 않게 취소되는 일도 있었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주부 김모(38)씨는 "엊그제 보건소에서 태교 음악회 행사 취소 안내 문자를 보내왔다"고 말했다. 이 음악회는 매년 저소득 취약 계층 임신부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행사로, 기저귀 가방·젖병 등 1인당 약 12만원 상당 푸짐한 경품을 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런 경품이 기업 협찬이라서 행사가 취소된 것이다. 서대문구청도 매년 열던 이 행사를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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