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와 태리

유선애 입력 2016. 9. 28. 17:35 수정 2016. 9. 28.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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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김태리에게서 우리가 사랑했던 숙희의 얼굴을 보았다.

2016년 한국 영화계가 배출한 가장 빛나는 신인, 박찬욱 감독의 새로운 뮤즈,2016년 한국 영화계가 배출한 가장 빛나는 신인, 박찬욱 감독의 새로운 뮤즈,칸의 새로운 별 등 숱한 화려한 수식을 거둬내고, 그저 연기하는 스물일곱 살의 배우 김태리가 궁금했다. 영화 <아가씨>의 ‘숙희’를 연기했다는 사실 외에그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으므로 대화는 배우 김태리의 과거와 지금의 생각에 집중됐다. 한데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중간 그녀의 얼굴 위로 우리가 사랑했던 숙희의 모습이 겹쳐지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대도’로 살아온 자신에대한 자부심이 단단했던 숙희처럼 그녀는 배우가 되기 이전부터 공들여 쌓아온 ‘일상의 내공’을 믿었다. 그래서 배우가 아닌 삶에 대한 질문에 “배우가 아닌다른 직업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그 길 위에서 내 나름의 살길을 찾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고 답했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작품밖에 모르는 연기 귀신들사이에서 만난 이 현실감각 단단한 스물일곱 살의 여배우가 유난히 예뻐 보인건 그 때문이다.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자존감은 단지 한편의 영화가 성공했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그녀는고단한 연극배우의 길을 선택할 때 고민이 없었느냐는 질문에는 ‘없었다’고 아주 짧게 답했다. 히데코에게 아무 질문 없이 뛰어들던 숙희처럼 그녀는 계산하지 않는다. 히데코의 손을 잡고 비극 밖으로 뛰쳐나와 들판을 달리던 모습이떠올랐다. 배우 김태리 역시 그렇게 계속 달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길을달리는 데 필요한 건 가야 할 방향에 대한 확신과 맞닥뜨릴지도 모를 고난에당당히 맞서는 담대함뿐이니까.


퍼 재킷 자라(Zara), 니트 스웨터 에스카다(Escada), 샤 스커트 레페토(Repetto), 블루 이어링 마위 바이 반자크(Mawi by bbanZZac), 슈즈 슈르떼(Shurte).

들고 있는 수첩은 뭐예요? 일기장이에요.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요. 인터뷰 도중에 일기장이 필요할까 싶어서 가져왔어요. 커닝 페이퍼예요.

뭐가 쓰여 있죠? 순간순간 떠오른 생각이나 기억해야 할 것을 적어둬요. 연극을 시작하면서부터 썼어요. 기억력도 없지만 끈기도 없는 편이라 매년 다이어리는 1, 2월만 채우고 못 썼는데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면서부터는 기록해야 할 필요를 느꼈죠. 과거의 것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지난날을 다 버리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연기를 위한 건가요? 연기보다는 저 자신을 위한 일이죠.

쉽지 않겠지만 이제 기억을 좀 해볼까요.(웃음) 지난 8월, 디렉터스 컷 시상식에서 여자 신인연기자상을 받으며 “연기를 시작하게 된 것도 <아가씨>의 숙희가 된 것도, 지금 이 순간 상을 받는 것까지 모두 우연”이라는 말을 했죠? 우연처럼 만난 사람들과 맞닥뜨린 사건들이 지금 이 순간 훨씬 더 값지게 느껴진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세상에는 많은 인생이 있잖아요. 무수한 길 가운데 단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요. 제가 과거의 한순간에 특정한 생각을 했다는 것, 그리고 선택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더라고요. 배우가 되는 데 영향을 미친 수 많은 우연들에게도요.

박찬욱 감독과 첫 상업 장편영화를 찍고, 칸 국제영화제까지 갔어요. 배우로서는 절정이라 부를 만한 최고의 경험이 필모그래피의 시작점이라는 게 장단점이 있죠? <아가씨>를 만난 것이 내게 좋은 일이 될 수 있을까, 지금 내 상황에서 지나치게 큰 작품과 큰 역할을 만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죠. 당시에는 부정적인 생각이 더 많아 고민도 많았고요. <아가씨>를 만나서 얻은 장점이야 아주 많죠. 이 자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앞으로 얻게 될 많은 기회도 <아가씨>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아직은 내 인생에서 좋은 선택이었다고 확답하기에는 조금 이른 것 같아요.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이니까요.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큰 장점으로 남길 바라죠.

작년 10월까지 <아가씨>를 촬영했죠. 딱 1년이 지났네요. 그사이 가장 많이 변한 건 뭔가요? 많이 불안해졌어요. 1년 사이가 아니라 <아가씨>를 시작하기 전과 후를 생각해봤을 때 그래요.

어떤 종류의 불안이에요? 제가 배우를 업으로 삼기로 한 건 이 일에 재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아가씨>를 만나기 전에는 거침없이 연기한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난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폭풍처럼 들이닥칠 때가 있어요. 물론 하루 걸러 하루씩 생각이 바뀌긴 하지만요.

모든 사람이 배우 김태리가 좋은 연기를 했다고 말하는데도요? 네. 제 생각에는.

칭찬에 무딘 건가요? 저 칭찬 아주 좋아해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참 좋은데 그냥 그걸로 넘겨요. 칭찬이 그날의 제 마음까지 변하게 만들진 않아요. 또 이런 태도가 중요한 것 같고요. 적어도 사람들의 칭찬에 나를 놓아버리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칭찬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배우 김태리를 두고 ‘한 명의 아티스트’라고 표현했어요. 본인의 어떤 모습 때문에 그가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큰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웃음), 개봉하고 인터뷰할 일이 점점 늘다 보면 감독님도 어쩔 수 없이 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게 되잖아요. 그렇다고 매번 같은 대답을 할 수는 없으니까 인터뷰가 거듭될수록 답변도 업그레이드된단 말이에요. 그 최종 진화형이 아닐까요?

지금 쑥스러워서 질문을 피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웃음) 감독님이 말씀을 참 잘하세요. 좋게 말씀해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니트 터틀넥, 골드 지퍼 장식 스커트 모두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슈즈 슈르떼(Shurte).

칸 국제영화제에 가면서 출입국신고서의 직업란에 배우라고 쓰는 게 어색했다고요. 아직도 그래요? 지금도 학생이라고 써요. 그냥 스튜던트.(웃음) 배우라고 쓸 필요는 없잖아요. 누가 물어보면 말할 수 있긴 한데 굳이···.

자신을 배우라고 소개하는 게 낯간지러운가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요.

대학생 때 학교에서 찍힌 ‘과거 사진’이 팬들 사이에서 인기인 거 알아요? 본인 몸이 두 개는 들어가고도 남을 큰 자주색 트레이닝복에 얼굴을 다 가릴 정도로 큰 안경 쓰고 있는데도 예뻐서 모두를 좌절하게 하는 그 사진이요. 푸하하. 전혀 모르다가 나중에 알았는데 그 트레이닝복 친구가 준 거더라고요. 친구가 그 사진을 보내면서 ‘내가 준 옷 정말 잘 입고 다녔구나’ 하는 거예요. 도저히 그게 저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내가 정말 저러고 다녔느냐고 물어봤더니 정말 그랬대요.(웃음)

꾸미는 데 관심이 없었나봐요. 꾸미는 거 좋아하는데 소질은 없나봐요. 또 끈기도 없어서 하루 예쁘게 꾸미고 나가면 바로 지쳐요. 그래서 다음 날에는 포기하는 거죠. 포기하면 편하고 좋으니까.

연극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건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수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할 텐데요.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결심이었나요? 지나고 나니까 그때 그런 건 상관없었구나 생각하지 당시에는 그런 고민조차 없었어요.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낼 수 있거든요. 버스비가 없어도 자전거 타고 다닐 수도 있고, 집에서 밥도 먹여주시고, 갖고 싶은 건 나중에 돈 생겼을 때 사면 되는 거니까요.

친구가 준 옷 입으면 되니까요. 네.(웃음)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솔직하고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네요. 네.


화이트 니트 스웨터 이로(IRO), 아이보리 울 팬츠 에스카다(Escada), 골드 뱅글 몬드(Mond).

배우의 세계 밖에서도요? 배우 아닌 다른 직업을 가졌어도 그 분야에서 나름대로 살길을 찾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어요.

<아가씨> 이후 배우 김태리의 다음은 뭘까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거에요. 모두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하게 된다 해도 괜찮을 자신이 있나요? 지금보다 연기를 못할 수도 있고, 덜 재미있는 영화가 나올 수도 있겠죠. 어떨 때는 관객 분들한테 크게 혼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한 계속 배우로 살 거예요. 인터뷰하다 보면 종종 “<아가씨>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아요. 그럴 때면 “그게 제 최고의 모습이라면 전 망하는데···” 해요.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계속 연기해야 겠죠. 물론 잠깐 고꾸라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마지막은 지금보다 훨씬 좋지 않을까요?


코트, 레이스 원피스 모두 앤디앤뎁(Aady & Debb).

처음으로 돌아가서, 디렉터스 컷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 말미에 ‘좋은 배우가 가져야 할 미덕에 대해 항상 생각하겠다’고 했죠. 스물일곱 살의 배우 김태리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란 어떤 배우인가요? 좋은 배우는 좋은 연기를 하는 배우죠. 그런 좋은 배우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주어진 것을 열심히 해내는 것인 듯해요. 지금 생각에는 그래요. 경험이 많이 쌓이고 많은 작품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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